brunch

지도

길을 잃으면

by 빨강




구글지도에서 목적지를 설정했다. 시작부터 왼쪽으로 가야 할지 오른쪽으로 가야 할지 헷갈린다. 휴대전화를 들고 왼쪽으로 몇 걸음 오른쪽으로 몇 걸음 걸어본다. 지도의 길이가 줄어드는 걸 보고 맞는 길로 가고 있다고 스스로를 위안한다. 방향이 같으면 목적지는 어떻게든 나온다.


낯선 곳에선 주변을 살펴보며 길을 찾을 여유가 없다. 오직 휴대전화만 보고 길을 걷는다. 어떤 간판이 있는지 어디를 지나왔는지 다시 그 길을 찾아갈 수 있는지에 대해 확신이 없다.

건물들은 높고, 오색 간판들은 현란해서 머리를 어지럽게 한다. 지나간 곳 같기도 하고 새로운 곳 같기도 하다.


지도대로 길을 찾다가 방향을 틀리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제대로 된 방향으로 가는 게 가장 빠른 방법이다.

30미터 앞에서 우회전하세요.

900미터 앞에 목적지가 있습니다.

30미터 전에 우회전을 하게 되면 목적지는 멀어진다. 내 위치와 지도 사이에 거리가 생긴다. 그 간극이 나를 더 위축되게 만든다. 돌아가면 돼. 돌아가면 돼. 머릿속으로 되뇌어도 걸음은 빨라지기만 한다. 제대로 된 안전한 길을 찾으려고.


지도는 가장 빠른 길, 편안한 길, 수정된 길을 알려준다. 모험심이 많은 사람은 돌아가더라도 자기만의 길을 간다. 늦더라도 목적지만 제때 도착하면 되니까.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늦는다는 말에 조바심이 나서 경로대로 가지 않으면 불안하다.


대부분의 삶이란 정해진 일들이 차례차례 기다리고 있다.

학교를 다니고 직장을 다니고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노년을 걱정하고. 적어도 내 또래의 삶에는 이런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경로를 이탈하셨습니다.


나는 경로 이탈자다. 내 앞에는 가야 할 선이 그려져 있지 않다. 내 위치만 지도상에 깜박깜박인다. 목적지까지 내 맘대로 가기만 하면 된다. 수백 수만 개의 길이 놓여 있다. 어떤 길은 힘들고 어떤 길은 화려하다. 갈라지는 길 앞에서 그때그때 내가 가고 싶은 대로 걸음을 옮긴다. 그럼 주변의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휴대전화만 보고 걷는 초등학교 남자애가. 킥보드를 타다 넘어진 남자애에게 달려오는 엄마가. 스피커폰으로 통화를 하고 가는 중년 여성이. 페트병이 가득 든 봉지를 들고 가는 할머니 옆에 강아지가. 감나무 가지에 앉은 물까치 세 마리가. 카트를 끌고 장을 보러 가는 아줌마가. 한낮에 칼눈을 하고 담벼락 위에 앉은 검은 고양이가.


천천히 주변을 살피며 걷는다. 하나하나 눈에 담는다. 건물들은 다르게 생긴 모양새를 눈여겨본다. 길을 헤매더라도 다시 찾아갈 수 있도록. 돌아와서 다시 길을 찾을 수 있도록. 지도에는 보이지 않는 촘촘한 세상이 있다.





keyword
화, 목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