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게차와 보일러

나는 공무원수의사 8편

by 예일맨

나에게는 자동차 운전면허증과 수의사면허증이 있다. 취업과 승진에 도움이 될까 해서 취득한 정보처리기사와 한자 자격증도 있다. 그리고 일하면서 딴 몇 개가 더 있다. 바로 3톤 미만 지게차 면허증과 보일러 관리 자격증이다. 모두 내가 6급으로 승진하고 나서 경기도 수원에 위치한 동물위생시험소 바이오연구팀에서 일할 때 취득한 것들이다.


수의사만이 할 수 있는 “수의직”이라는 직책을 가진 사람이 지게차를 운전하고 보일러를 관리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 지금 생각해도 참 이상하다. 은퇴 후에도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아져서 좋겠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지게차 운전과 보일러 관리가 천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런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좀 묘하다. 그래도 내가 건강만 받쳐주면 평생 할 수 있는 “전문직” 수의사인데 은퇴 후에 할 일이 많아져서 좋아해야 하는 게 맞는 것인지 좀 헷갈리기도 한다.


바이오연구팀의 주 업무는 “유용미생물(영어로 하면 probiotics)”이라고 하는 가축에 이로운 미생물을 대량으로 배양해서 축산농가와 축산 관련 업체에 공급하는 일이다. 2010~2011년 전국적으로 구제역이 창궐했을 때 구제역 방제에 도움이 되는 미생물 제재를 생산하여 농가에 공급하는 것을 목적으로 처음 시작되어 유산균, 효모균, 광합성균, 고초균과 같은 이로운 미생물을 배양하여 농장에 무상 공급하고 있다.


이윤을 추구하는 사기업이 아니기 때문에 정해진 만큼만 예산 범위 내에서 만들어내지만 그 양이 만만치 않다. 한 달에 생산하는 양만 20톤이 넘는다. 최소 포장단위도 액상은 18L 말통, 분말은 20kg 박스이기 때문에 일일이 사람 손으로 나를 수가 없고 팔레트 단위로 운반하여야 한다. 물론 원재료의 무게도 단위가 크다. 그래서 지게차 운전이 필요하다.


현장 일을 담당하는 공무직원들이 세 분이 배치되어 있어서 내가 직접 지게차를 운전할 일은 많지 않았다. 그렇지만 상황에 따라 생산량이 갑자기 많아져서 일손이 부족하거나 공무직원 한 두 사람이 휴가나 병가 등으로 나오지 못할 때에는 생산 관리 담당자로서 지게차 운전을 해야 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지게차 면허를 따기 위해 교육을 신청했다.


이론 교육을 6시간 동안 받고 실습교육은 3시간씩 이틀간 나누어 교육을 받았다. 차 운전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어렵지 않게 운전할 수 있지만 세부적인 조작과 좁은 공간에서 방향을 바꾸며 안전하지만 신속하게 운용하는 것이 역시 쉽지 않았다.


교육을 모두 이수하고 면허를 받기 위해 수원시 권선구청에서 담당자를 기다리고 있는데 나와 같은 용무로 오신 분이 나에게 말을 건다. 3톤 이상 지게차 면허도 따놓으라고 하신다. 요즘 사람들 택배 많이 시키고 물류창고도 많아져서 지게차 운전 잘하면 취업 잘된다고 조언을 해주신다. 나 역시 모르는 척 기분 좋게 맞장구를 치며 지게차 면허의 쓰임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지게차까지는 그렇다 치고. 보일러는 또 무엇인가. 내가 살면서 본 보일러라고는 수도관에 연결해서 쓰는 소형 온수보일러가 전부인데 거대한 보일러 두 대가 떡하니 별도의 방 안에서 웅장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아니 전기드릴도 몇 번 안 써본 내가 저 보일러를 관리해야 한다고? 놀라는 것도 잠시. 정신을 가다듬고 생각해 본다.


지금껏 그렇게 일해오지 않았는가. 갑자기 낯선 곳에 던져져서 생판 처음 보는 일들을 정면으로 맞닥뜨리며 배우면서 일하지 않았는가. 그래도 거의 8년의 공직생활을 통해 많이 컸나 보다. 전보다는 순응이 빠르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도 했으니 나도 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으로 임해 본다.


미생물을 키우기 위해 보일러는 필수 중의 필수 장비이다. 먼저 필요한 만큼 큰 탱크에 물을 채운다. 그리고 키우려고 하는 미생물이 좋아하는 영양소가 듬뿍 들어있는 먹이(‘배지“라고 부른다)를 그 물에 타고 잘 녹인다. 다음에는 그 안에 들어있을지 모르는 다른 미생물을 완전히 없애기 위해 121℃로 15분간 열을 가한다. 마지막으로 미생물을 접종하고 그 미생물이 자라기 좋은 온도(약 37℃가 일반적으로 미생물이 성장하기 좋은 온도이다)와 기타 조건을 설정하고 16시간 정도가 지나면 배양 과정이 끝난다.


이렇게 멸균과 온도 유지를 해야 하는 미생물 배양 과정에 있어 보일러는 매우 중요하다. 그뿐 아니라 보일러는 고온의 증기를 만들어내는 위험하기도 한 장비이기 때문에 담당자를 지정하여 관리하도록 법으로 정하고 있다.


보일러 관리를 하기 위해 필요한 자격증을 취득하는 과정은 지게차 면허증에 비해 훨씬 더 어려웠다. 에너지이용합리화법에 따라 가스를 원료로 사용하는 보일러의 관리자가 되기 위해서는 ”인정검사대상기기 관리자“ 자격과 ”가스용보일러 관리자“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 각각 20시간의 교육을 이수하고 시험까지 치러야 자격증 취득이 가능하다.


코로나19 발생으로 온라인 교육 창구가 개설되어 다행인지 불행인지 사무실에서 40시간의 교육을 들을 수 있었다. 정신없이 바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일을 하면서 40시간 교육을 들어야 하니 몇 주 동안 내 컴퓨터 듀얼 모니터의 오른쪽은 늘 강사님의 얼굴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두 번의 현장 시험을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여 두 장의 자격증 카드를 손에 넣었고 당당히 보일러 관리자로 공식 선임될 수 있었다.


물론 고작 40시간의 교육으로 자격증을 땄다고 해서 실제 관리를 도맡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보일러 유지보수 업체가 매달 한 두 번 방문하여 보일러의 작동과 안전에 관한 정밀한 관리를 해주었기 때문에 어려운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상황도 일어나지는 않았다.


다만, 가까이에 있는 관리자로서 수시로 보일러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지, 기계에서 무언가 새거나 떨어지는 것은 없는지 둘러보는 일을 하였다. 그리고 보일러의 청관제가 여유 있게 채워져 있는지, 연수기가 잘 작동하여 연수를 잘 만들어내고 있는지, 추운 겨울에는 동파 방지를 위해 설치한 열풍기가 잘 작동하는지 등을 확인하여 문제를 사전에 예방하는 것이 나의 주된 역할이었다.

지게차를 운전한 첫날 영상을 찍어서 아이에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자격증을 따고 온 날에는 어김없이 꺼내 들고 아이에게 자랑을 했다. 지게차도 운전할 줄 알고 보일러도 만질 줄 아는 멋진 아빠인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였을까. 아니면 공무원이, 그것도 수의사 공무원이 지게차를 운전하고 보일러를 관리하는 것이 "세상에 이런 일이"에나 나올 법한 신기하고 재미있는 일이어서였을까.


뭐든지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는 말을 머릿속으로 되뇌며 이겨냈다. 일반적으로 해보기 어려운 경험을 해보는 것은 아주 좋은 일이다. 축산물안전팀에서 그토록 점검하고 다녔던 수많은 업체의 현장 근로자와 비슷한 삶을 아주 잠깐이라도 살아보는 것은 분명히 내 인생에 도움이 되는 일일 것이다.


그렇지만 바이오연구팀의 생산관리 업무를 했던 약 2년 5개월은 수의사로서 정체성을 고민해야 하는 시간이었다. 내가 했던 일은 수의사가 아니어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고, 기계를 다뤄보았거나 현장 일을 해본 사람이 더 잘할 수 있는 일이었다.


기관에서 고용할 수 있는 인원의 수에는 한계가 있어 적임자를 새로 뽑아서 배치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또한, 공무원이 자신의 직렬과 전혀 관계없는 일을 하게 되는 경우도 매우 많다. 공무원이 원래 그런 거라고, 주어지는 대로 많은 생각을 하지 않고서 그저 일할 수도 있다. 하지만 수의사라는 전문가가 아닌가. 힘들게 대학에 들어가 6년을 공부해서 시험까지 통과해야만 될 수 있는 그런 직업이 아닌가.


어떤 행정직 공무원이 자신은 동사무소에서 일할 때 건축 허가 업무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감사실에서 근무할 때 수감자였던 어떤 시청 공무원은 행정직인데도 불구하고 반려동물센터의 전반적인 관리 업무를 몇 년째 도맡아 하고 있었다. 각각의 기관에 건축직이 있고 수의직이 있는데도 말이다. 실제로 공공기관에서 일어나는 현실이다.


완벽한 인력 배치는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직렬에 맡는 부서에 배치되어 자신의 전문 분야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만 공무원이 존재 가치를 보다 명확하게 발견할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더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고 일을 하면 할수록 자신의 분야에서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느끼고 더 먼 미래의 가능성 또한 열어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게차 운전과 보일러 관리를 했던 시간이 무가치한 시간이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색다른 경험의 시간이었고 새로운 도전의 시간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게차 면허증과 보일러 면허증은 지금 내 지갑 속에서 잠자고 있을 뿐이다. 다시 그 부서에서 일하게 되지 않는 한 그것들은 다시 꺼낼 일은 없을 것 같다.


나는 수의사이다. 하지만 수의사라는 타이틀이 내 실력을 보장해주지 못한다. 수의사다운 수의사가 되려면 수의사만이 할 수 있고, 수의사만이 알 수 있는 차별화된 전문성을 보다 날카롭게 다듬어야 한다. 수의직들만 모여있는 곳에서 수의사의 일이 아닌 것 같은 일을 했기 때문에 수의사인 나에 대하여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지게차와 보일러는 내가 더 훌륭한 수의사가 되기 위해 고민하라고 하나님께서 만나게 해 주신 좋은 친구들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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