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여름잠 13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가담 Oct 01. 2024

언젠가 추억이 될 오늘에 너무 연연하지 않기를



 사진 한 장이 도착했다. 본래보다 한층 더 또렷한 것으로. 게다가 언제 묻혔는지도 모를 옷의 얼룩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소니에서 출시한 디지털카메라가 지금껏 쓴 물건 중 가장 오래된 물건일 거다. 요즘 핸드폰과는 다른, 물 한 방울 떨어트린 듯한 흐리멍덩함이 마음에 쏙 든다. 아마 사진 가장자리에 '1990년'이라고 적어놔도 그럴싸해 보일 거다.
 민이가 보낸 내 사진의 원본 또한 그랬었다. 디지털카메라답게 어딘가 촌스럽고 날 것 그대로인 느낌이 가득했는데, 민이의 손을 거치고 나니 낮은 해상도는 껑충, 거슬리던 옷의 얼룩은 말끔히 사라져 버려다.

 원본과 편집본 중 어느 것이 낫냐는 민이의 물음에 잠시 고민했다. 각자 다른 매력이 있기에, 아무래도 둘을 적절히 섞는 게 좋을듯하다. 기본은 유지하되, 옷에 묻은 얼룩만 살짝 지우자는 그런 전략이다.
 민이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원본이 더 좋다는 것엔 이의가 없지만, 얼룩에 대해선 나보다 한 수 더 둔다.


"얼룩도 그대로 둬야겠어. 나중에 추억이 될 수도 있잖아!"    
 
 얼룩 하나가 추억이 되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 없지만, 어쩐지 민이의 말에 힘을 더하고 싶어진다.
  
                                          *

 민이와 카페에서 시간을 보낼 땐 암묵적인 패턴이 있다. 자질구레한 대화가 오고 난 후엔 그간 찍은 사진을 구경하곤 하는데, 우리에겐 이 시간이 카페에 가는 묘미다. 질리도록 봐왔지만 보고 또 봐도 새로운 게 사진이니까.
 어김없이 주말이 돌아왔고, 우리 다운 시간을 보냈다. 3년 전 처음으로 함께 찍은 사진부터 근래에 찍은 사진까지 손이 가는 대로 둘러봤다.

한 장, 무더위로 한껏 젖은 등짝.
두 장, 살짝 오른 살집.
세 장, 새로 생긴 손가락의 점.

  사진마다 눈길이 가는 포인트가 있다. 별거 아니지만 신경 쓰이고 마음이 가는 것, 없던 이야깃거리도 만들어주는 기특한 녀석이다.
 이번 여름이 무진장 더웠다는 것과 맛있는 걸 잔뜩 먹고 다녔다는 것, 그리고 함께 나이 들고 가고 있음에 대한 증거를 발견한 셈이다.

 지난날과 그 순간에 대해 또다시 웃고 떠들다 보니 어느새 한 시간이 훌쩍 흘러가 버렸다.  

                                          *
 
 하루에도 몇 번씩 얼룩을 남긴다. 너무 긴장해서 혹은 너무 놓아버린 탓에 의도치 않게 묻힌 미숙함이다. 당황스럽고 부끄러워 어떻게든 지워보려 애써보지만, 존재감이 워낙 커서 그런지 쉽지가 않다. 그러면 그럴수록 오히려 그날의 기억이 불쑥 떠올라 이불을 발로 팡팡 걷어차고 싶어진다.  
 시간이 약이란 말이 맞는 것 같다. 강렬한 기억도 언젠간 흐릿해지기 마련이니. 적당히 아득해질 때쯤엔 지저분한 얼룩 같던 기억은 별처럼 반짝반짝 빛나 보이고, 그땐 그랬었다는 담담한 말로 되받아치며 웃는 게 사람이다.

 결국 민이 말에 힘입어 사진 속 옷의 얼룩을 그대로 두기로 마음먹었다. 어쩌면 그의 말대로 하나의 추억이 될지도 모르니까. 이 얼룩으로부터 과연 우리가 어떤 대화를 나누게 될지 벌써 기대가 된다.

 작은 얼룩이 진한 추억이 되기를 바라며, 나의 칠칠치 못한 찰나를 증거로 남겨본다.

이전 12화 여행 같은 나날을 꿈꾸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