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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담 Jul 07. 2024

결국 다정함에게 돌아간다


내 몸뚱이와 몇 안 되는 짐 꾸러미, 설렘과 떨림으로 요란했던 것에 비해 인생 첫 독립을 위한 준비물은 소소했다. 여러 번 짐을 옮겨도 끄떡없을 컨디션과 주방용품 조금에, 여벌 옷 그리고 이부자리 정도만 챙겨 연고 없는 타지로 덜컥 와버렸다.

그 말인즉슨, 가지고 온 것보다 두고 온 게 훨씬 많았다. 이를테면 단골 가게라든지.


꾸준히 발도장을 찍는 몇 곳이 있다. 집 코앞에 있는 닭강정집과 15분 거리에 있는 미용실이 대표적인데, 서로의 얼굴을 익힌 지 최소 7년이니 단골 자격은 충분하다. 닭강정집은 많으면 매주 한 번씩 그리고 미용실은 적어도 반년마다 갔으니 웬만한 친구들보다 더 자주 본 셈이다. 그러다 보니 가게에 들어서면 형식적인 인사보단 약간의 삑사리가 날랑 말랑한 편안한 목소리로 서로의 안부를 주고받곤 했다.


"오랜만이에요", 요즘 들어 우리들의 인사말이다.

여전히 그곳들의 단골이긴 하지만, 지하철로 두 시간은 달려야 하는 곳으로 이사한 후로는 찾아가는 빈도가 확연히 줄었다. 한 달에 한 번, 일 년에 한 번 정도만 가도 훌륭한 축에 속한다.

사장님들 몰래  접근성이 좋은 새로운 가게로 이탈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이윽고 다시 돌아가게 된다.

다른 곳은 왠지 모르게 제맛이 안 난다고 해야 되나.

   

                                          *                                        


혼자 사는 집은 늘 조용하다. 출근 전과 퇴근 후 잠시 머무는 정도의 인기척뿐. 네 식구에 강아지까지 왁자지껄한 공간에서 갓 빠져나왔던 날, 이 공간이 더더욱 삭막하게 느껴졌던 건 당연했다.

그리 심하진 않았지만 이사 직후엔 향수병 비슷한 거에 걸렸었다. 괜히 눈물이 찔끔 난다거나, 입맛이 없는 정도. 이럴 땐 영화나 드라마로 오디오를 채웠고, 게임을 통해 적막감을 깨곤 했다.

동물 주민들과 함께 마을을 가꾸는 아주 단순한 게임인 [동물의 숲]은 잔잔하게 시간 때우기 최고인 게임이다. 평소에 게임을 즐겨하는 편이 아니다 보니 금방 시들해졌지만, 별거 없는 이 게임이 생뚱맞게 생각날 때가 있다. 바로 오늘처럼.


하도 안 해서 방전된 게임기를 부랴부랴 살려내니 정겨운 테마곡이 흘러나온다. 제일 먼저 반겨주는 건 먼지 쌓인 집 안에 득실대는 바퀴벌레들. 콕콕 밟아주는 걸로 게임을 시작한다. 그다음으로는 생존신고도 할 겸 마을 친구들이 보이는 족족 말을 걸고 다녔다.

"어딜 갔던 거야! 너를 다시 만나서 기뻐!"

아무리 프로그래밍된 대사라지만 매번 생각이 많아지게 만든다. 너무 오랫동안 안 들어왔었나 내지 앞으로는 자주 들어와야겠다는 일종의 다짐을 하게 한다. 과연 이 결심이 얼마나 갈지는 미지수지만.


                                          *


타지에서 자리 잡은 지 3년 차가 될 때까지 번듯한 단골집 하나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생길 뻔했는데 실패했다. 카페 한 곳이 꽤 마음에 들어 자주 가려 했건만 어느샌가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이후 이곳저곳 가본 결과, 여태까지 이거다 싶은 곳을 발견하지 못해 떠돌이 신세를 자처했다.

아무래도 커피를 좋아하다 보니 다른 건 몰라도 카페만큼은 마음껏 마음을 내어줄 공간이 필요했고, 지금도 여전히 필요하다.


카페에 가기 전 사전 조사를 한다. 메뉴는 무엇이 있고 분위기는 어떤지, 노랫소리가 너무 크지는 않은지 등 나름 깐깐한 기준으로 잣대를 들이민다. 거기에 맛까지 있으면 더할 나위 없다.

평일엔 시간이 안 되니 별일 없으면 주말에는 꼭 커피를 마시러 간다. 어김없이 어디로 갈까 한참을 헤매다가 눈에 띄는 곳 발견, 걸어서 15분 거리에 새로운 카페가 오픈했다.  

군더더기 없는 메뉴판과 따끈따끈한 마들렌, 차분한 우드톤과 이를 적당히 밝혀주는 아이보리톤 그리고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팝송까지. 마치 이상형을 만난 듯한 느낌이다. 부부가 함께 운영하는 공간으로 아내는 디저트를 굽고 남편은 커피를 내린다.


또다시 주말이 돌아왔고, 이번엔 별 고민 없이 발걸음이 향했다. 지난주와 똑같이 커피 한 잔에 마들렌 하나를 주문했다.

"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누군가의 기억에 남는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다. 직접적으로 표현하진 않았지만 그 후로도 몇 번이고 찾아간 걸로 봐서는 나를 기억해 줬다는 사실에 적잖이 들떴던 게 분명하다.


"에어컨이 너무 춥거나 덥지는 않으세요?"

"오후에 비가 엄청 많이 온다는데 우산은 챙기셨나요?"

매번 갈 때마다 주문한 음식과 함께 '안녕하세요'와 '안녕히 가세요'를 제외한 여러 문장을 받는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적당히 시간을 보낸 후 잘 먹었다는 인사와 함께 카페를 나왔는데, 한 5초 후쯤인가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요"라는 소리의 출발점에서부터 사장님 부부가 와다다 뛰어오신다.

아내가 주고 싶다 했다며 손에 쥐어주신 마들렌 두 개. 이번엔 여러 문장과 더불어 달콤함까지 얹혀주셨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괜히 웃음이 났다. 사장님 부부의 뜀박질이 사랑스러워서. 매일 가고 싶은 곳을 찾은 것 같아서.  


                                          *


일주일 중 월요일이 가장 힘들다. 한 템포 쉬었다가 원래의 흐름을 따라가기까지 꽤 품이 드니까. 하지만 이번에 맞이한 월요일은 조금 달랐다.

냉장고 안에 고이 넣어둔 다정함에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설렘으로 넘친다.


어쩌면 다정함으로부터 되돌아갈 힘이 나는 걸지도 모르겠다. 잘 지내다가 온 거냐는 가족의 물음과 말랑이의 무해한 인사, 닭강정집과 미용실 사장님의 친근한 말투 그리고 게임 속 캐릭터들의 따뜻한 환영식까지. 언제가 됐든 마음 놓고 다시 돌아가게 된다.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언제든 돌아올 수 있는 일상이 되어주고, 쓸쓸하고 힘들 때 위로가 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얼음을 둥둥 띄운 둥굴레차 한 잔에 마들렌을 그릇에 내어와 한 입, 다정함은 초코와 오렌지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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