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살이가 나에게 준 선물
내복 바지, 핫팩, 귀마개, 롱패딩 점퍼를 장착하고,
우리 집 강아지도 따뜻하게 패딩 입히고
여느 때처럼 걷고 있었다.
정수리와 코 끝에 차가운 것이 닿는 느낌이더니
어느새 싸라기 눈이 내리는 것이 아닌가.
올해 첫눈은 강아지 코지와 그렇게 단 둘이 맞았다.
함박눈이 아니라서
눈이 온 건가? 싶을 만큼 쌓이지도 않았지만
11월 중순답게 추워진 날씨가 다행스럽기도 했다.
크리스마스 무렵이면 스키장에 자연설이 소복했는데,
최근 몇 년간 12월도 너무 따뜻하여 비만 내렸던 터라
여름은 여름답게, 겨울은 겨울답게 나는 것이 좋다.
(**소복하게 쌓인 첫 눈은 10월 21일 저녁**)
겨울을 준비하며
집과 자동차 단열도 점검하고,
정원의 식물들도 정리하고,
카펫도 깔고,
겨울 옷도 새로 장만하고,
크리스마스 소품과 장식도 슬슬 꺼내놓으며
1년이 또 이렇게 흘렀구나 세월도 실감한다.
학창 시절에는 그렇게나 안 가던 시간이
어른이 된 지금은 정말 쏜살같이 흐른다.
40대가 된 지금
내 나이가 참 아깝다는 생각도 하곤 한다.
하루하루 매 순간을 아주 소중하고, 감사하게,
누리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
20대, 30대에 세상이 정해놓은
인생의 과업들을 향해
앞만 보고 달렸던 시기.
그리고 남들은
목표를 향해 더욱더 강하게 매진하고 있을 40대에
나는 달리던 걸음을 잠시 멈추고
천천히 그리고 깊게 숨 고르기를 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시간이 주어짐에 너무 감사하다.
자의든, 타의든 하게 된 독일살이에서
나는 타인의 시선과 세상이 만든 기준에서 벗어나
단전에서부터 올라오는 자유로움을 느낀다.
원래 여유가 없던 사람이고,
늘 쫓기듯이 발 빠르게 움직여야 직성이 풀렸는데
세월과 독일살이는 나에게 여유를 선물로 안겨줬다.
노인이 되어서도 일에만 몰두하는 부모세대를 보면서
나는 돌아오지 않을 나의 젊은 시기에
충분히 생각하고, 나만의 인생철학을 꼭 만들어
앞을 보고 달리는 와중에도 소소한 행복들을
사이사이에 차곡차곡 채워 넣자고도 다짐한다.
눈앞에 놓인 당면과제들이 산처럼 쌓여있고,
책임감 있게 해내야 하겠지만,
그것을 인생의 전부로 채워서는
결코 풍성하게 삶을 느낄 수 없다.
관성 때문인지, 성공과 성취만을 쫓다 보면
초심을 잃고, 주객이 전도된 채 생을 마감하는 경우들을 너무 많이 보게 된다.
영원을 살 것처럼 살다
언제 살았었냐는 듯 사라지는 인생들을
목도하게 되면서 더더욱 그런 마음이 든다.
나는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항상 생각하는데,
그 순간에 가장 후회될 일이 무엇일까,
그 순간에 가장 잘한 일은 무엇일까를
역으로 생각해 보면
지금 내가 이 순간에 어떻게 살고 싶은지
그 답을 얻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일단 다시 걸으러 나가자.
강아지랑 함께 장단 맞춰
차가운 바람 속
거친 숨소리를 느끼고
자박자박 발소리를 들으며
걷다 보면
어느새 소란했던 머릿속이 잔잔해지고
무념무상의 상태가 되니까.
세상이 던진 쓰레기는
깨끗하게 비우고
나만의 것으로 채우는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