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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날 계획을 꾸미고 있어요.

by nangbii

떠날 계획을 꾸미고 있어요.

9년전, 후배인 진경이와 원복이. 우리는 무작정 떠났다. 2015년 겨울, 나는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국토대장정. “우리는 몸집이 큰 ‘장정’이 아니니까 소년소녀로 정하는 거야.” 국토대장정이 아니고 국토소년소녀. 재미있는 이름의 프로젝트였다. 전남 진도 팽목항에서 출발해서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까지의 기나긴 여행. 걷다가 힘들면 앉아서 쉬고, 지나가는 차에게 손짓하며 히치하이킹을 했다. 어느 정자 위에서 텐트를 설치해 자고, 운이 좋으면 마을회관에 들어가 할머니 할아버지가 주시는 밥을 얻어먹기도 했다. 여전히 우리는 만나면 그 겨울날을 이야기 하곤 한다. “그때의 자유로움과 언제든, 어디로든 떠날 수 있었던 그 용기가 너무 그리워…” 그때 그 용기와 패기는 대체 어디서 나왔던 것일까? 구체적인 계획도 없이 어떻게 나는 "그냥 가는거지!" 외치고 떠날 수 있었던 것일까.


나는 긴 여행을 떠나려 한다. 배낭을 메고 가야 한다. 여행의 경로는 중국에서부터 시작해 몽골을 거쳐 중앙아시아, 러시아, 유럽으로. 마지막 스페인까지 가보고 싶다.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경험을 해보고 싶다. 유럽은 스물다섯에 휴학하고 가본 적이 있지만 친구들과 함께 갔고, 캐리어를 끌고 갔는데 그것을 진정한 배낭여행이라고 하기는 힘들 것 같다. 꽉 짜여진 여행 일정으로 정신없이 관광지를 둘러봐야 했던 일들은 더 이상 기억에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매번 친구들의 눈치를 봐야 했고 그래서 여행 이후 친구들과의 관계가 약간은 서먹해지기도 했다. 이제는 더 이상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유롭고 여유롭게 나의 시간을 만끽하고 싶다.


지난겨울까지 나는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었다. 일로 인해, 그곳의 사람들로 인해 나의 모든 삶이 망가지고 있었다. 나 자신이 무너져 내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고통에서 벗어나려 결국에는 심리 상담까지 받게 되었고 상담사 선생님은 내가 일을 관둘 수 있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설 연휴가 다가왔을 때 내게 여행 가보는 것을 추천해 주셨다. “낭비님 혼자 어디론가 떠나는 것도 좋을 것 같네요. 무얼 해야 할 필요도 없어요. 온전히 낭비님 만을 위해 일주일 동안 여행을 한번 다녀오시는 것은 어떨까요.” 선생님 말씀에 힘입어 나는 제주로 날아갔다. 제주에서의 여행은 꿈만 같았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한라산 어딘가의 벌판을 걷고 또 걷고, 새카만 바다에서 내게 달려드는 매서운 파도의 파편들을 맞았다. 그 순간에는 내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었다. 오롯이 나만을 위한 소중한 순간들이 너무나 행복했다.

게스트 하우스에 묵으면서 여러 친구를 사귈 수 있었다. 중국 시안에서 온 유즈라는 친구와 노르웨이에서 온 프레드릭. 우리는 함께 그곳에서 새해를 맞았다. 3개월마다 여행을 떠난다는 유즈와 1년째 세계일주 중이라는 프레드릭. 내가 여행을 하는 이유를 물었을 때 그들은 답했다. “여행은 늘 부족한 나를 채워주는 것 같아.” 스물여섯부터 서른여섯. 10년 동안 나는 일하느라 바빴지, 그동안 나 자신을 바라보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면서 남들 사는 대로 따라 살고, 남들 하는 대로 따라 하기만 했다. 이제는 나를 좀 바라보고 내가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깊숙이 알고 싶다.



결국 나는 일을 관뒀다. 3년 동안의 내 선택이 전혀 아쉽지 않았다. “배낭여행. 난 배낭여행 떠날 거야” 관두는 날이 다가올 때마다 계속 나 자신에게 말했다. 그 뒤로 나는 여행 유튜브를 찾아보고, 필요한 준비물들을 검색하고, 지도를 펼쳐놓고 여러 경로를 찾아보았다. 오토바이를 타고 러시아부터 유라시아 횡단을 시작을 하려 했지만 오토바이를 탄 경력이 너무 적고, 오토바이의 출력이 너무 낮아서 금방 포기하게 되었다. 여행에 대한 계획을 꾸밀 때마다 뱃속이 찌릿찌릿하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 내가 이런 걸 좋아했구나.’ 느꼈다. 아직 부모님도 여자친구도 모르는 나의 이런 영악한 계획들을 진행할 때마다 스스로를 아주 깜찍하다 생각하고 있다.


여행일정을 또렷하게 준비한 것은 아니다. 낯선 도시에 도착해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다양한 곳을 돌아다니면서 그 지역의 이야기를 알아가고 싶다. 또 나를 위한 시간을 보내고 싶다. 아무 공원에 가서 앉아 책을 읽고, 노트에 이것저것 긁적일 것이다. 일단 첫 번째 나라인 중국에서의 계획은 어느정도 마무리 되었다. 중국 여행에서는 그동안 궁금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를 가고 싶다. 상해를 시작해 항저우, 창사, 충칭에 있는 각 도시의 임시정부 청사를 갈 계획이다. 그리고 시안에 들러 겨울에 만났던 유즈의 카페를 찾아가서 그동안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내가 일을 관뒀다고 말하면 그 친구는 과연 뭐라고 말할까? 나중에는 스위스에서 공부하고 있는 알베르토라는 까탈루냐 친구도 만날 거다. 잠자리도 밥도 술도 걱정 말라고 했으니 난 꼭 갈 생각이다.


이제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 나는 떠나야 한다. 꽂히면 해야 한다. 그동안 나 스스로에게 너무도 많은 핑계들을 던져왔다. 어차피 잃을 것도 없다. 하고 싶은 것 하면서 살 거라고 말해왔으면서 그동안 이렇게나 하고 싶은 것을 못 했다. 떠나야한다. 아무도 나의 결정을 막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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