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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소소 Apr 19. 2024

인생의 사막을 떠돌아다니다

내 인생인데 내가 없다.

언제부턴가 내게 삶은 버텨내야 하는 것이 되었다. 하루하루 소진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고, 한계가 머지않았다는 것을 느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고 이유 없는 분노가 마음속에 쌓여갔다. 도대체 이 상황을 언제까지 견딜 수 있을지, 버텨낼 수 있을지 더 이상 자신이 없었다. 일이 늘 모든 결정의 중심이 되었고, 나의 일상이 일에 맞춰 돌아가고 있었다. 하루 24시간, 주 7일 동안 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일과 삶의 구분이 모호해져 갔고, 평일과 주말의 구분이 없어졌다. 퇴근 없이 마감에 쫓기는 생활이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삶. 열심히 뛰고는 있는데 어디로 가는지 길을 잃은 느낌이었다. 그저 쫓기듯이 인생의 과제들을 열심히 해 나갈 뿐이었다.


이전에도 가벼운 번아웃은 왔었다. 하지만 이번에 찾아온 번아웃은 아주 강한 놈이었다. 자존감이 바닥을 쳤고, 내가 과연 일을 잘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부터, 나의 존재 자체에 대한 부정까지 인생의 밑바닥을 치고 있었다. 쾌활하고 긍정적이던 나의 모습은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그것은 나에게 아주 큰 신호였다. '내가 알고 있던 나는 이런 모습이 아니었는데..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거울 속엔 낯선 모습의 내가 서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지금의 삶을 이대로 살아갈 수 없다, 이대로 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의 소리를 잡아챘다.



결단이 필요한 시기였다. 나는 완전히 무너져 내리기 직전, 한 달간의 휴식을 갖기로 했다. 거창하게 ‘안식월’이라 외치며 발리로 떠났다. 오랜 가뭄 끝에 단비가 내린 것처럼 행복감에 젖어들었다. 우붓에서 요가를 하고, 짱구에서 서핑을 타고, 저녁에는 스파를 받으며 단 꿈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서서히 마음이 회복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일상으로 돌아온 순간, 문제는 다시 반복되었다. 스트레스가 쌓이던 상황은 그대로였다. 세상은 여전히 내가 생각한 대로, 바라는 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예측하지 못한 사건 사고는 계속 발생했고, 문제들을 해결하며 정신없는 하루가 반복되었다. 혼란스럽고, 불안하고, 그래서 정신없는 상황이 지속되면서 나는 또다시 소진되어 갔다.


하지만 이번엔 떠날 수가 없었다. 현실에서 해야 할 일이 있었고, 책임감 있게 행동해야 했다. 일상을 살아가기 위한 활동을 해야만 했다. 원하면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지치고 힘든 하루를 보낸 끝에 비행기표를 결재하고, 어디로든 떠나고 싶은 감정들이 올라오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고단한 하루의 끝엔 늘 보상심리가 발동했다. 예능을 몰아 보든지, 야식과 술을 진탕 먹든지. 하지만 이 방법이 정말로 나에게 득이 됐던 적이 있었나? 문제가 해결되었나? 진지하게 다시 생각해 보았다. 둘 다 아니었다. 당시에는 기분이 조금 나아진 것처럼 보이고, 약간의 위로가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모두 환상이었다. 다음날 눈을 뜨며 마주하게 되는 퉁퉁 부은 얼굴, 산만한 배, 속 쓰림과 함께 삶의 고난을 모두 떠안은 듯 당황한 나를 마주해야 했다. 삶의 문제 또한 그대로 남겨놓은 건 덤이었다.


안식월을 통해 내가 얻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여행을 통해 나의 일상이 환기되기를 원했다. 새로운 자극으로부터 에너지를 충전하고, 활력을 다시 얻고 싶었다. 지친 마음을 회복한 뒤 다시금 앞으로 나아갈 용기와 힘을 얻고 싶었다. 현실로 돌아갔을 때 다시금 새로 뛸 준비가 되어있길 바랐다. 하지만 여행지에서도 생각보다 해야 할 것들이 따라다녔다. 늘 새로운 정보를 찾느라 마음이 분주했고, 낯선 환경으로부터 오는 긴장감이 있었다. 여행을 왔다는 사실은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는 압박감을 주었다. 그런 하루 끝엔 긴장감으로 인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나를 마주하는 시간은 그렇게 뒤로 밀려났다. 여행지에서도 나는 거기에 없었다. 마음은 분주히 계속 다음 목표를 향해 움직였고, 또다시 쫓기듯이 여행하고 있는 내가 있을 뿐이었다.



일상에서 틈을 만드는 것이 중요했다. 지친 마음을 회복하고 삶의 방향을 재정립하는 공간을 일상에서 찾아야 했다. 너무나 빠르게 변하고, 그래서 불안하고,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중심을 잡기 위해 ‘나만의 오아시스 공간(나만의 신성불가침한 성전)’을 찾아 회복하는 시간을 갖기 시작했다. ‘오아시스 공간’이란 일상에서 의도적으로 벗어나 나만의 고요한 공간을 확보하고, 외부의 자극을 차단한 오롯한 나만의 시간과 공간을 말한다. 일상에서 한 발짝 떨어져 상황을 바라보면 보다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상황에 매몰된 경주마가 되어 앞만 보고 달리는 것을 멈추게 된다. 비로소 트랙에서 내려와 현재 서 있는 위치를 확인할 여유가 생긴다.


잠시 고요히 멈춰 나에게로 주의를 돌려보자. 요동치는 마음을 더 휘젓지 말고 잠깐의 틈을 허용해 주자. 마음의 소용돌이가 잠잠해지면 불안, 분노, 스트레스 등의 부정적인 마음들이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한다. 겉으로 드러났던 가짜 감정들이 가라앉고, 숨어있던 진짜 감정들이 하나 둘 떠오르기 시작한다. 분주함과 혼란스러움을 걷어내고 진짜 나의 마음을 듣기 위해 우리에겐 숨 쉴 공간이 필요하다. 나에게 고요함과 잔잔함을 허용해 주자. 나의 영혼이 따라올 수 있도록 시간을 허락해 주자. 당신만의 진실을 들을 수 있도록 나를 기다려주자. 내면의 소리를 듣기 위해 우리에겐 틈이 필요하다.




다음화 이어 보기 > 앞만 보고 달린 결과, 번아웃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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