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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소소 May 24. 2024

빛과 그림자

잃어버린 나를 찾아서. 나는 누구인가?

8시간의 묵언명상


떠올리면 가슴 한편이 시려오는 그런 기억을 가지고 있는가. 우리는 누구나 비밀을 안고 살아간다. 현재의 내 위치에서 결코 밝히고 싶지 않은 과거의 실패, 부끄러움, 수치심 등.. 주변 사람들에게 결코 들키고 싶지 않고, 알리고 싶은 과거의 경험들이 있을 것이다. 27살의 나는 이룬 것 하나 없는 실패자였다. 20대의 빛나는 청춘은 나를 비껴가는 듯했다. 1평짜리 독서실 책상이 내 세상의 전부였다. 재수, 삼수, 편입을 거쳐 고시 공부도 사시까지 치렀다. 하지만 결국 내가 원하는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 원하는 대학을 가지 못했고, 원하는 직업을 갖지 못했고, 원하는 성공을 얻지 못했기에 늘 부족하다는 생각이 나를 계속 따라다녔다. 그렇게 나의 20대는 ‘인내’라는 한 단어로 압축할 수 있다. 미래를 떠올릴 때면 먹구름이 가득했다. 끊임없이 이어진 어두운 터널 속에서 언제 빠져나갈 수 있을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인정할 수가 없어서, 아쉬움이 남을 것 같아서 한번 더, 한 번만 더를 외치며 20대를 지나왔다. 그리고 딱 10년째 되는 해를 끝으로 나는 공부의 길을 벗어 나왔다.


나에게 그 시절은 '잃어버린 10년'으로 기억되어 있다. 긴 시간 동안 겪어온 좌절감과 패배감은 나의 뇌리 속에 강하게 박혀있다. 학창 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들을 제외하곤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이야기. 남편에게조차도 처음부터 밝히지 못했던 나의 가장 아프고, 부끄럽고, 들키고 싶지 않은 비밀이었다. 공부로 좌절감을 겪지 않았을 것 같은 그에게 얘기한다는 것은 나를 더욱 초라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나는 동기부여가 강한 사람이었고, 인내와 끈기만큼은 자신 있는 사람이었기에 결코 쉽게 포기할 수가 없었다. 지금 나의 위치가 어떻든, 결국 성공할 것이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으며 온몸으로 버텨왔다. 하지만 공부의 길은 합격과 불합격, 성공과 실패로 가혹하기 나뉘는 세계였고, 과정은 처참하게 무시되는 곳이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원하는 성공을 얻지 못했고, 늘 패배감과 좌절감을 안고 살아갔다. 그렇게 관계 속에서, 사회 속에서 인정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면 ‘내가 능력이 없어서’, ‘성공하지 못해서’ 그런 거라는 비난과 자책으로 이어졌다. 나의 20대가 모두 거부당한 기분이었다.


그로부터 5년이란 시간이 지났다. 어느새 30대가 되었고, 일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며 세상 밖을 경험해 나갔다. 그토록 원하던 대학교의 대학원생으로도 전문성을 쌓아가고 있었다. 겉으로는 나의 20대가 모두 보상받은 듯이 보였다. 그래서 늘 부족하고 아쉬웠던 마음들이 이제는 괜찮아졌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침묵하며 오로지 나의 내면의 소리에 집중하는 8시간의 묵언명상을 통해 나는 완전히 다른 현실을 마주해야 했다. 나의 아주 깊은 기저에는 ‘인정받고 싶은 어린아이’가 있었다. 부모님께 인정받고 싶었던 마음, 언니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마음, 남편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마음, 그리고 시부모님께 인정받고 싶었던 마음까지. 결국 인정받기 위한 마음이 나에게 가장 강력한 동기부여가 되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지금까지 나를 이끈 건 성장욕구로 인한 동기부여라고 생각했던 나의 정체성이 처참하게 부서지는 순간이었다.



비로소 해방되다


그제야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그고 나를 보호하려고 웅크리고 있던 어린아이가 보였다. 인정받고 싶었지만 인정받지 못했던 어린아이가, 좌절하고 슬퍼했던 어린아이가 아직도 그곳에 웅크린 채 토라져 있었다. 사실은 인정받고 싶어서 열심히 하고, 나를 채찍질했던 것인데.. 스스로는 동기부여가 강해서 계속 열심히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구나. ‘그랬구나.. 사실은 인정받고 싶은데 인정받지 못해서, 그래서 그렇게 힘들었구나..’라고 스스로를 다독여줬다. 그렇게 나는 내면의 어린아이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다. ‘현재는 그렇지 않은데 내가 오해하고, 편견을 갖고 바라보고 있었구나.’, ‘계속 과거를 바라보고 있었구나.’, ‘내가 생각보다 더 경계하고 방어하고 있었구나..’, '너를 알아주지 못해 미안해, 너를 방치하고 모른척해서 미안해..' 내면아이에게 진심 어린 위로와 사과를 건넸다.


묵언명상을 경험한 때가 2022년이니 불과 얼마 전까지도 나는 내가 만들어낸 마음의 감옥에 갇혀 있던 셈이다. 나는 더 이상 힘이 없는 어린아이가 아니었지만, 현실에서 위험과 어려움을 마주하게 되면 무력했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 계속해서 나를 괴롭혔다. 현재와 그때의 나는 너무나 다른 상황에 있었다. 하지만 나는 변화된 상황을 전혀 보지 못하고 있었다. 부모님도, 언니도 이제는 나의 삶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얘기하지 않고 나의 의견을 존중을 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과거의 경험으로 인해, 내가 무력했던 어린 시절에 형성된 기억에 사로잡혀 있었다. 시간도, 상황도, 나도, 상대방도 변했음에도 나의 마음은 계속 과거에 머물러 부정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나는 능력이 없어',  ‘나는 혼자 할 수 있는 게 없어.’, '나는 실패자야.’ 등의 자기 비난이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다.


그렇게 처음으로 나를 마주하곤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정화의 눈물이었다. 늘 그때를 생각하면 나에겐 눈물꼭지가 있는 것처럼 금방 서글퍼지고 가슴이 아파왔다. 하지만 이번의 눈물은 다른 의미였다. 스스로에 대한 위로와 안부를 물으며 비로소 해방된 기분이었다. 가슴을 조이던 사슬이 풀리고 이내 평화로운 마음이 스며들었다. 그렇게 회복된 마음으로 다시금 현재의 상황을 바라보니 이미 인정받고 있던 내가 보였다. 어린 시절에 문제라고 인식했던 상황들은 어느새 정리가 되어 있었고,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부모님은 내가 독립적이고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아이라는 것을 알고 계시며, 언니 또한 내가 생각 없이 살아서 더 이상 보호해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시부모님 또한 둘이 존중하며 사이좋게 잘 지내는구나를 받아들인 느낌이었다.



3가지 방어체계


사람은 감당하기 힘든 상황에 닥치면 '투쟁, 도피, 얼어붙음'이라는 3가지 반응을 보인다. 이러한 반응은 상황에 따라, 사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어릴 적부터 나에게 생존 도구는 ‘투쟁’이었다. 하지만 투쟁해서 상황이 악화되거나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는 상황이었던 것을 겪었던 사람은 도피나 얼어붙음이라는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한 사람 안에서도 세 가지의 반응이 섞여서 나타나기도 한다. 어떤 상황이냐에 따라 다른 생존 도구가 발현되기도 한다. 나의 경우엔 도피나 얼어붙음을 통해서는 상황이 해결되지 않았다. 원하는 것, 원하는 삶이 있으면 투쟁해서 얻어야 했다.


나는 원하는 목표를 이룰 때까지 결코 그만두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이러한 나의 성향 때문에 나는 늘 자기 계발 의지가 강하고, 동기부여가 잘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더 깊숙이 바라보니 다른 원인이 숨어 있었다. 투쟁의 기저에는 사실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크게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 더 잘하고 싶었고, 세상이 말하는 기준에 들고 싶었고, 타인의 인정을 받아야 잘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되었다. 어린 시절에는 비교적 쉽게 사랑을 받았는데 어른이 되며 사랑을 받기 위해선 여러 가지 조건들이 붙어야 했다.


그렇게 나는 20대에는 우리 가족으로부터, 30대에는 시부모님으로부터의 투쟁을 지속했다. 부모님이 좋다고 얘기하는 길이 아닌 내가 가고 싶은 길을 간다는 것, 그 누구도 믿어주지 않지만 스스로를 포기하지 못해 공부를 지속했던 고시생활,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해 힘든 상황에서 그럴 줄 알았다는 비난의 목소리, 시부모님의 반대에 부딪쳐 결혼을 하지 못할 수도 있는 상황까지. 이러한 현실 속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도피나 얼어붙음이 아니었다. 기꺼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내가 원하는 상황을 만들 것이라는 다짐, 투쟁의 연속이었다.


투쟁은 우리에게 필요한 방어체계이다. 투쟁을 통해 우리는 성장하고, 스스로를 보호할 힘을 키울 수 있게 된다. 하지만 투쟁에는 많은 에너지가 들어간다. 나를 돌봐주지 않고 투쟁만 지속하다 보면 버티지 못하는 순간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해결되지 못한 좌절감, 서운함, 슬픈 감정들은 일상을 지내면서 각기 다른 상황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올라온다. 일상을 잘 지내가다도 비슷한 상황을 마주하면 그때의 감정과 편견들로 이야기를 듣게 되고 판단하고, 왜곡해서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대게 과거의 해결되지 못한 감정은 나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로 향하기 마련이다.


당신은 투쟁, 도피, 얼어붙음 중 어떤 방어체계를 가지고 있는가. 현재 당신에게 가장 큰 문제로 다가오는 인생의 영역(진로, 연애, 경제력 등) 하나를 골라보자. 스스로 나의 방어체계가 무엇인지 안다면, 우리는 그것을 인식할 때마다 새로운 선택을 할 수 있게 된다. 나의 문제를 타인의 문제로 끌고 가지 말자. 나만의 변화된 새로운 이야기를 다시 써 내려가보자. 모든 것은 우리의 선택으로 바뀔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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