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종훈, 그는 고졸과 연습생으로서 신화였다.
빙그레 이글스와 한화 이글스의 4번 타자이자 홈런왕 장종훈을 평가하다.
이 사람은 대전의 야구 스타이자 전국의 야구 스타이다. 이 사람은 무에서 유를 만든 프로야구 신화의 상징이다. 이 사람은 모든 사람에게 희망과 용기 그리고 끈기의 중요성을 보여줬다. 좀 더 쉬운 힌트. 빙그레 이글스의 연습생에서 출발해 지금은 한화 이글스의 영구 결번으로 기록된 위대한 선수이다. 정답은 '장종훈 선수'이다.
이번 인물 탐구는 연습생 신화이자 노력형의 스타, 그리고 홈런왕으로서 소탈함과 겸손을 두루 갖춘 장종훈 선수에 대해 적어보려고 한다. 이 선수는 엄청난 업적이 너무도 많기에 아주 간략하고 핵심만 추려서 적어보려고 한다.
장종훈 선수는 앞서 말했듯이 프로야구 선수로서 지명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간절하게 야구를 하고 싶었던 그는 빙그레 이글스의 연습생으로 입단한다. 하지만 연습생 신분이었으니, 연봉은 고사하고 급여는 거의 아르바이트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야구 선수로서의 꿈을 키우며 묵묵히 연습하고, 훈련하고, 버텨냈다. 그리고 기회가 왔다. 1987년에 처음 1군에 데뷔하여 2루타를 뽑아낸 것이다. 그 2루타가 그를 현재까지의 전설로 남게 된 신호탄이었다. 그는 이렇게 특유의 근성과 연습, 부단한 노력으로 마침내 빙그레 이글스의 핵심 선수가 되었다. 아니, 초특급 프로야구 스타가 되었다.
그는 중장거리가 아닌 장거리 타자로서 유격수 최초의 홈런왕을 차지했고, 이것이 발판이 되어 1990년과 1991년 그리고 1992년까지 3 시즌 연속 홈런왕이 되었다. 하지만 수비 불안으로 인하여 유격수 포지션에서 1루수로 전환되었고, 그 이후에는 나이가 들면서 지명타자로서 활약한다. 이렇게 장종훈 선수는 앞서 말했듯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면서 야구 생활을 했다. 그 이면에는 많은 선배들과 코치들의 도움이 있었다. 특유의 성실성이 있던 장종훈 선수를 보았기에 대성할 것이라고 생각한 그들이 물심양면으로 지원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많은 도움 속에 그는 더 많은 훈련을 했고, 그것이 홈런왕과 MVP를 차지하는 영광이 되었다. 동시에 소속팀 빙그레 이글스도 1988년부터 1992년까지 5 시즌 동안 가을 야구를 할 수 있는 막강 전력을 갖추게 되었다. 당시, 다이너마이트 타선이라는 별칭이 있던 빙그레 이글스의 선봉장 역할을 한 선수가 장종훈이었다. 우선, 홈런의 경우 최초의 30 홈런은 1988년 해태 타이거스의 김성한 선수가 기록했는데, 그 기록을 경신했고, 1992년에는 40개 이상의 홈런을 치는 스타가 되었다. 그만큼 그의 활약은 해가 갈수록 눈부셨다. 하지만, 빙그레 이글스는 막강한 실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준우승 4번이라는 아쉬움을 남긴다.
1993년 시즌에 접어들면서 빙그레 이글스는 지난 5 시즌 동안 우승하지 못한 여파로 침체에 접어든다. 장종훈 선수도 이 시기부터 약간씩 부진하게 된다. 결정적 원인은 지나친 훈련과 연습으로 인한 혹사였다. 당시에는 체계적인 트레이닝이 없었다. 그래서 장종훈 선수뿐 아니라 다른 야구 선수들도 그 시스템을 받아들이지 못해 나이가 들면서 급격하게 부진했고, 결국 이른 은퇴가 많았다. 그래서 그의 너무도 임팩트한 짧은 활약은 두고두고 아쉬운 순간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그는 과거의 영광을 버리고 팀을 위해 다시 몸을 만들었고, 부활에 성공한다. 초특급 활약은 아니었지만, 그는 팀의 선임이자 리더가 되는 시기부터 성적이 상승되었고, 팀도 정비가 되면서 1999년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5번 도전 끝에 이룬 첫 우승이었다. 팀 이름은 빙그레에서 한화로 바뀌었지만, 그는 한 팀에서 희생하고 노력한 끝에 비로소 달콤한 선물을 받게 된 것이다.
그 달콤한 선물을 받은 후, 장종훈 선수는 김태균이라는 신인의 활약에 조금씩 입지가 줄어들었고, 2005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한다. 그는 1987년부터 2005년까지 19 시즌 동안 정말 대단한 활약을 했다. 홈런왕, 골든글러브, MVP를 모두 받았다. 그리고 1991년과 1995년 한일 슈퍼게임에 출전하여 꽤 인상적인 활약도 펼쳤다. 이러한 활약과 그의 성품을 통해 빙그레에서 한화까지 선수 생활을 했던 그는 구단으로부터 영구 결번이라는 명예도 얻으면서 야구 선수로서의 모든 것을 누렸다. 여기까지 장종훈 선수의 활약을 간략하게 정리해 보았다.
앞서 말했듯이, 장종훈 선수는 성적도 좋았지만, 인품도 아주 훌륭했다. 그중에서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는 일화가 있다. 그는 선수 시절, 김원형 투수의 공을 쳤는데, 그 공이 그만 김원형 선수의 얼굴에 정통으로 맞은 것이다. 엄청난 사고였다. 그로 인해 김원형 선수는 피를 많이 흘리며 쓰러졌고, 선수 생명이 끝날지도 모르는 상황까지 직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장종훈 선수는 그 상황에서 1루로 가지 않았고, 마운드로 바로 뛰어갔다. 평상시 플레이로 1루로 갔으면 안타로 기록될 수 있었는데, 선수의 생명을 중시한 그는 본능적으로 김원형 투수에게 달려간 것이다. 그래서 결과는 아웃으로 처리되었지만, 그 사건은 장종훈 선수가 얼마나 인품이 훌륭한 지를 보여주는 큰 사건으로 팬들에게 남아있다. 훗날, 김원형 투수도 그의 행동에 놀라움과 동시에 감사함을 표시했다고 하니,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의 인품이 모든 야구 선수들에게 얼마나 훌륭한 지를 알 수 있었다.
그는 인품도 훌륭했지만, 고졸 신화라는 전무후무한 입지적 인물이기도 하다. 모 대학에서 장종훈 선수에게 대학 진학을 권유했다. 조건도 아주 좋았다. 그럼에도 그는 거절했다고 한다. 이유를 들어보니, 내가 대학을 가면 고졸이라는 학력으로 꿈을 키우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누를 끼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본인 스스로 불공평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는 진정한 프로야구 선수로서의 면모를 보여준 것인지도 모른다. 수많은 대학들이 인기 스타나 선수들을 모셔서 홍보 차원 혹은 명예를 주기 위해 줄기차게 활동하고 있는 점은 누구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단칼에 그 제안을 거절한 것 자체가 프로 야구 스타로서의 역할을 다 한 것이다. 만약, 대학을 갔다면 그의 학력과 커리어는 올라갈 수 있었겠지만, 주변의 따가운 눈치를 받고, 고졸 신화의 흠집을 내는 상황을 초래했을지도 모른다.
주변 야구 선수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고졸 신화의 창시자인 장종훈 선수는 앞서 말했듯이 엄청난 연습 벌레로 잘 알려져 있다. 우리가 흔히 연습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주어진 시간에 반복하는 단순한 생각 속의 시간 보내는 심리적 상황을 떠오른다. 그러나 장종훈 선수의 연습은 상상 이상이었다. 손의 물집이 수십 군데 잡히는 혹독한 연습이었다. 아무것도 없으니 최고가 되려면 반복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절실함 속 연습이 그의 커리어 향상에 도움을 주었을 수도 있다. 당시, 주변 선수들도 그의 연습량에 혀를 내둘렀으니, 가히 연습이라는 단어 앞에서는 이 분에게 할 말이 없을 것이다. 물론, 그것이 독이 되어 부상이 빨리 왔고, 몸이 일찍 상하게 되어 성적이 하락하는 부작용이 나타났지만......
1980년대부터 시작한 프로야구는 이제 40년 이상이 되었다. 이렇게 꽤 오랜 세월임에도 장종훈 선수를 능가하는 연습생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물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여러 고졸 출신 스타 선수들도 있지만, 인품이나 기타 면모에서는 아직까지도 장종훈 선수를 뛰어넘는 선수는 없다. 그래서 빙그레 이글스부터 한화 이글스까지 이어져오는 현시점에서 대전 팬들은 그의 활약을 기억하고 있고, 동시에 해당 팀에서 그의 계보를 잇는 선수가 나오지 않아서 답답함을 많이 느끼기도 한다. 물론, 김태균 선수가 그 계보를 이어받긴 했지만 우승을 못한 것이 흠이라는 점은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간략하게 장종훈 선수에 대해 정리해 보았다. 이 선수에 대한 각종 기록과 사실 및 주요 야구 내용 등을 정리하려면 책 1권을 써도 무방할 정도로 방대하다. 실제로 당시 팀 동료였던 한화 이글스의 레전드 구대성 선수도 책을 냈는데, 하물며 장종훈 선수의 일대기를 책으로 편찬했다면 지금 베스트셀러나 스테디셀러급의 위용을 보여줄지도 모른다.
연습생에서 출발해 모든 타이틀을 획득한 위대한 장종훈 선수, 은퇴 후 지도자 생활에서는 약간의 부침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자양분이 되어 다시 지도자가 되고 난 후, 다양한 노하우들을 후배들에게 가르친다면 또다시 멋진 코치이자 지도자로서의 큰 역할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어느 누구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그는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
빙그레 이글스와 한화 이글스를 이끈 레전드 장종훈 선수에 대해 이렇게 마무리하고 싶다. 그는 인간으로서 무에서 유를 창조한 신화이다. 그의 아성을 넘을 수 있는 선수는 나오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인품과 근성을 많은 선수들이 본받아야 할 것이다. 물론, 우리도 마찬가지로 그의 연습과 노력, 인품을 본받아야 한다. 그는 이제 야구 선수가 아니지만 당시 그의 호쾌한 스윙과 멋진 홈런 모습을 보면서 느낀 우리의 기쁨과 즐거움을 추억함과 동시에 그가 보여준 프로 선수로서의 훌륭한 행동과 모습도 생각해 보며 행동하는 것이 어떠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