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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분주 Feb 25. 2024

달집에 불이 붙거든 날 생각해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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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대보름.

이 날은 갖가지 나물과 팥밥을 지어먹고, 어둠이 내려앉은 마을 곳곳에는 나무와 짚을 높게 쌓아 올린 '달집'이라는 불꽃이 피어난다. 활활 타오르는 달집의 불꽃은 한해 무탈을 기원하는 희망을 상징하며, 어둠을 밝히는 빛은 액운을 물리치는 힘을 지닌다고 사람들은 믿는다. 그리고 달집 앞에 모여 불을 바라보며 소원을 빌어본다. 어릴 적에는 달집 옆에서 빈 깡통에 짚을 말아 넣고 불길을 놓아 휭휭 돌리는 쥐불놀이를 하곤 했는데 요즘은 안전 문제를 고려하여 쥐불놀이를 즐기는 모습은 점점 사라지고 있어 아쉽다.


나에게는 달집과 관련된 잊지 못할 추억이 하나 있다. 사실 잊고 살았는데 나의 모든 과거를 알고 있는 절친 H가 전화로 나의 흑역사를 말해주는 바람에 갑자기 생각이 났다. 추억을 공유한 친구가 있어 때로는 즐겁지만 한편으로는 소름 끼친다.


스무한 살이 되던 해, 지금은 주택가로 변해버린 동네 뒤편 넓은 공터에는 매년처럼 달집이 쌓여 있었다. 동네사람들은 속옷과 현금을 챙겨 들고 설렘 가득한 얼굴로 삼삼오오 모였다. 왜 속옷을 태우는지는 그 기원은 알 수 없으나 미신쟁이인 우리 엄마는 우리 가족의 안녕을 빌고 안 좋은 기운을 태워야 한다고 옷장에서 오래된 속옷을 찾았다. 빵구가 난 아빠의 속옷과 색이 바래진 낡은 오빠 속옷, 그리고 본인의 것을 챙겼고 나에게도 속옷을 챙겨 들고 어서 달집 구경을 가지고 했다. 성인이 된 나의 속옷들은 대부분이 새로 장만한 비교적 새 옷들이어서 선뜻 태우기가 아까웠다. 옷장을 뒤적거려 보니 친구들이 스무 살 된 기념으로 선물해 준 야시시한 속옷이 고이 처박혀 있었다. 어차피 친구들도 재미로 사준 선물이고 디자인이 너무 화려해 한 번인가 입고는 스스로가 흉측스러워 옷장 깊숙이 넣어둔 해괴망측한 속옷이었다. 이번 기회에 그냥 불태워 없애버리자 싶어 아무도 볼 수 없도록 두루마리 휴지에 야무지게 똘똘 말아 엄마에게 줬다.  


동네 사람들은 홀린 듯이 달집 태우기를 위해 모여들었다. 5시의 정각 알림과 함께 풍물패의 흥겨운 꽹과리 소리가 울려 퍼지며 축제 분위기는 고조되었다. 한쪽에는 돼지고기 수육과 떡, 과일들이 차려져 있었고, 높게 쌓아 올린 달집 주변에는 사람들이 소원이 적힌 종이와 그들의 속옷을 안녕과 함께 던져놓았다. 나는 야들야들하게 잘 삶겨 나온 수육을 보자마자 흡입하기 바빴고, 엄마는 오랜만에 보는 동네아주머니들과 인사를 한다고 달집은 뒷전이었다.


곧 어둠이 내려앉자 누군가 볏짚에 불을 붙였다. 환호성과 함께 불꽃이 타오르며 달집을 집어삼켰다. 불길은 서서히 하늘을 향해 치솟았고, 뜨거운 불길만큼이나 사람들의 반응도 뜨거워졌다. 원래는 불을 피우기 전에 속옷을 끼워 넣어야 했지만 엄마는 수다를 떨느라 정신을 못 차렸고, 불길이 거세게 타오른 후에야 깜박 잊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엄마는 급하게 속옷 뭉치를 꺼내 피구왕 통키처럼 불꽃 속옷슛을 날렸다. 건조기에서 갓 꺼낸 수건들처럼 엉켜있던 속옷들은 불길에 닿기도 전에 공중에서 흩어져버렸다. 다행히 아빠와 오빠 속옷은 무게가 나가 불길 속으로 무사히 안착했지만 나의 빤스와 두루마리 휴지가 분해되면서 바람이 빠진 행사장 풍선처럼 힘맥아리 없이 달집 앞으로 나의 빤스만,


히이~잉↘ 하고 툭 떨어졌다.

그것도 달집 앞에 툭.


두루마리 휴지가 마치 빵빠레 축하 퍼레이드 처럼 하늘에서 히융히융 떨어지더니

사람들의 이목을 한 곳에 모은 후 작렬하게 전사했다.

졸지에 동네사람들 앞에서 빤스 커밍아웃을 해버린셈이 되었다.


입은듯 안입듯한 누드색이거나, 잿더미와 색이 같은 검정색이었으면 티가 안났을텐데,

안타깝게도 내것은, 거친 세상, 초원을 달리듯 힘차게 달려나가라는 친구들의 염원이 담긴 정열의 얼룩말무늬 였다.

'나 오늘 한가해요'라 울부짖는 화려한 패턴.

나는야 킬리만자로의 얼룩말.


당황한 엄마는 뛰어가 얼른 주우려고 했지만 화염이 강해지는 바람에 안전요원분이 엄마에게 위험하다고 뒤로 물러가라고 했다. 그리하여 나의 빤스는 덩그러니 한 동안 그곳에 안착해 있었다. 불꽃은 점점 최고조에 이르렀고, 딴짓하던 사람들 모두 달집 주변으로 웅성웅성 모여들었다. 달집에 붙은 불보다 더 시선을 강탈하는 얼룩무늬 내 빤스를 보고 동네 아주머니들은,

김씨네 딸, 야만적이네.

아따, 불보다 더 화끈하구마잉.


그리고는 일제히 자리에 주구리고 앉아 빤스를 멍하니 쳐다보셨다.

불멍보다 더한 빤스멍.


다행히 안전요원분이 덩그러니 떨어져 있는 흉측스러운 내 빤스를 불길로 휙 차서 넣어주셨다. 이로서 나의 얼룩말무늬 빤스는 화염 속에서 재가 되었고, 나 역시 멘탈이 재처럼 새까맣게 타버렸다.



2017년, 김씨네 야생마

불꽃과 함께 사라지다.








+

포토샵으로 AI에게 나의 얼룩말 빤스 사건을 그려달라고 주문했더니 나온 결과물이다.

..............?



얼룩말, 고놈 참 요염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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