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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분주 Mar 13. 2024

난 피부만 예민한 여자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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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던한 성격이다.

하지만 피부만은 예민하다.


20대에는 게이샤처럼 얼굴에 화장을 아스팔트 두께만큼 덧바르고, 씻고 자지 않아도 다음 날 아침에는 마치 새로 태어난 신생아처럼 피부가 고왔다. 타고난 모태 피부미인이라 생각해 관리를 전혀 하지 않았다. 이영애가 좋다고 광고에 나와 아무리 신상을 흔들어대도 나는 베이비로션 하나만 대충 발라도 피부가 나쁘지 않았다.



5년 전 엄마와 일본 온천여행을 간 뒤, 피부가 확 달라졌다.

엄마와 첫 여행이라 생각해 무리해서 고오급 온천을 예약했고, 비싼 돈을 지불한 만큼 뽕을 뽑아야 된다고 생각해 온천에 있는 제품을 마구잡이로 써버렸다. 그중 유명 일본 화장품 회사에서 만든 값비싼 각질제거제에 꽂혀 나는 본전 뽑을 생각에, 얼굴에 있는 모든 각질을 제거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30분이나 얼굴을 비비고 찌찌고 볶고 난리를 쳤다 그리고 난 병을 얻었다. 각질도 제거하고 피부도 제거를 해버렸다.


여행 후 얼굴이 화끈해지더니 울긋불긋한 염증 같은 게 올라왔고 물만 대여도 화상 입은 것처럼 따가웠다. 피부과 진료 결과는 피부염이었다. 얼마나 예민했냐면 눈물 한 방울을 또르르 흘려도 뾰루지가 뿅 하고 튀어나올 정도였다. 얼굴을 다 밀어버리겠다는 집념으로 너무 비벼대서 피부층이 파괴됐다나 뭐라나. 그로부터 난 2년 동안 피부과를 다니면서 약을 달고 살았고, 얼굴에 맞는 기초화장품을 찾으라 돈을 엄청 썼다. 이제는 그때만큼 피부가 예민하진 않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조심은 하고 있는 편이다.



어느 날, 카카오톡 단체방에서 친구 한 명이 다이소에서 출시한 화장품 하나를 열정적으로 홍보를 했다. 피부에 맞는 사람은 피부가 반지르르르르 해져서 파리가 미끄러질 수 있지만 안 맞는 사람은 울긋불긋 뒤집어져서 멍게가 될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친구는 다행히 자기 피부에 맞아서 요즘 효과를 제대로 보고 있다며 마치 다이소 임원인냥 우리들에게 주야장천 홍보를 했다. 워낙 인기가 많다 보니 구하기가 쉽지 않다고 눈에 보일 때 무조건 사라고 조언까지 덧붙여가면서 일장연설을 했다.


도자기가 될 것인가

멍게가 될 것인가


친구의 말을 듣고 검색해 보니, 다들 구하기 어렵다고 한 마디씩 했다. 처음에는 별 관심도 없었는데, 주변에서 너무 좋다고 하니 없던 오기가 생겨버렸다. 다음날 아침 일찍 동네 다이소에 갔지만, 요즘 인기라서 직원들도 보기 어려운 제품이라 했다. 피부가 예민하긴 하지만 혹시나 나에게 잘 받으면 피부미인이 될수 있을것 같은 이상한 믿음이 생겼다.


아...

더 사고 싶다, 미친 듯 더 사고 싶다.


바로 가질 수 없게 되니 욕망은 점점 망상이 되어가고, 을매나 좋으면 구하기조차 어렵다는 걸까. 바르면 도자기가 아닌 깐 달걀처럼 탱탱 말랑 말랑해지겠지?


상사병을 앓고 있는 나에게 친구가 어렵게 구했다며 한 박스를 줬다. 설레는 마음으로 얼굴에 펴 발랐는데 따꼼따꼼했다. 제품명 그대로 바늘로 꼭꼭 찌르는 것 같은 느낌이다. 이게 뭐가 대단해서 이렇게 난리지 싶었는데 다음 날 거울을 보니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피부가 좋아진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애매했다. 다음날도, 그다음 날에도 3일을 연속 발랐는데 주변 사람들에게 피부가 조금 좋아진 것 같다는 말을 듣자 의심이 맹신이 되어버렸다. 믿습니다 다이소 사랑해요 다이소.


얼굴에 뾰루지가 안 나는 것 만으로 성공이라 생각했는데 좋아졌다는 소리를 들으니 더 더 더 많이 챙겨놓고 싶었다. 다이소 어플을 깔고 시간 나는 틈틈이 재고를 찾아다녔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나보다 발 빠른 사람이 생각보다 많았고 늘 빈손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한 박스에 6개가 들어있는 제품을 아껴 아껴 사용하며 마침내 다 쓰고 말았다. 다른 화장품 가게에서 비슷한 성분의 제품을 찾아봤지만, 가격이 무려 6배나 비쌌다. 이미 저렴한 가격에 좋은 효과를 경험한 몸으로는 굳이 비싼 제품을 고를 수 없었다.


매일 아침마다 숨 쉬듯 다이소 재고를 확인하며 안타까운 마음에 발을 동동 굴렸는데 아빠가 우연히 통영 다이소에 급하게 건전지를 사러 갔다가 젊은 아가씨가 사가는 걸 보고 '이게 그거구나' 싶어서 얼른 2 상자를 사 왔다고 나에게 무심한 듯 툭 건넸다.


아빠 덕분에 12일 연장된 내 도자기 피부.

광이 난다 광이나. 나도 광년이구만.

놓치지 않을꼬예요.


솜사탕을 아껴먹는 아이처럼 야금야금 찔끔찔끔 비닐처럼 얇게 발랐다. 생명연장선처럼 아껴 발랐다. 12개에서 점점 줄어드는 것을 보며 조급함이 커졌지만, 더 이상 구하기 어렵다는 사실과 재고를 찾아다니는 것에 지친 마음에 미련을 버리기로 결심했다. 친구들과 수원 여행을 떠나면서 다이소 화장품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끊기로 마음먹었다. *미련을 버리자고는 했지만 수원에서도 친구들과 다이소 투어를 하며 제품을 찾아다.. 녀 ㅆ...


일주일 후, 집으로 돌아온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아빠와 검정 비닐봉지였다.

아빠는 100점짜리 시험지를 자랑하는 아이처럼 큰방에서 봉지를 들고 나왔다.


무뚝뚝한 아빠의 손에 들린 봉지 안에는

사랑이 담겨있었다.


나를 기쁘게 해 주기 위해 다이소를 다 돌아다니며 구했다고 한다. 집에 돌아와 기뻐할 내 생각에 매일 이곳 저곳 돌아다니며 부탁했다고 했다. 두 개씩 수량이 정해져 있어 많이는 구하지 못했다며 쑥스럽게 말하는 아빠의 주름진 미소에서 나는 봄을 느꼈다. 



사랑이

사람의 모습을 한다면

우리 아빠이지 않을까.










참고로 우리아빠에게 중간은 없습니다.

전지적 아빠 시점 (brunch.co.kr)






+

다이소 홍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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