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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분주 Feb 22. 2023

제가 한번 남자를 만나보겠습니다

봄의 차가운 첫 바람 때문인지 겨울의 쌀랑한 마지막 바람 때문인지 요즘 내 마음에 바람이 들어 연애가 하고 싶어졌다. 물론 여전히 아직도 비혼을 99% 꿈꾸지만 마지막 1%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가능성을 열어뒀다. 내 눈에 들어오는 1% 남자가 있다면 모든 걸 바칠 준비가 되어있으니 제발 나타나길 비나이다.


이제는 환불도 되지 않는 유행이 지나버린 옷처럼 남자들 눈에 들일이 없고, 친구의 남편의 친구들도 다 유부남이라 소개받을 인연도 없고, 길 가다가 내 번호를 물어볼 시력 나쁜 남자도 찾아보기 힘들다. 이제는 30대 후반으로 달려가면서 그나마 마지막 희망이었던 엄마 지인 찬스도 없어졌다 더군다나 나는 백수라서 괜찮은 처자 리스트에서 아웃이 되어버렸다.




지난 3년 동안 나는 4명의 남자와 선을 봤고 그 어느 누구와도 두 번째 만남으로는 이어지지 않았다. 물론 다들 나에게 넌지시 다음 만남에 대해 흘렸지만 내가 그들을 깠.. 에헴.


나는 상대방이 누구든 최선을 다한다. 아 물론 상대방과 연애를 하고자 최선을 다하는 건 아니고 그 자리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한다는 말이다. 그것이 나를 소개시켜준 사람에 대한 예의이고 나의 자존심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다.


약속 날짜가 잡히면 최소 2주 전부터 무리한 다이어트를 시작하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바르고 뿌리고 입고 걸치는 아이템들을 싹 다 새것으로 장만한다. 소개팅 한 번에 최소 30만 원을 쓰는 셈이다. 괜히 상대방한테 꿀리기 싫은 못난 자존심에 조금이라도 잘 보이고 싶어 치르는 나만의 의식 같은 것이다.


대게 나와 맞선을 본 남자들은 엄마와 이모의 아는 사람의 팔촌의 사촌의 동네사람의 지인을 통해 건너 건너 건너 매칭이 된 케이스로 이름 세글자 가진 남자라는 것만 알고 나간다. 상대방을 직접 만나기 전에 주선자에게 그 어떤 것도 물어보지 않는다. 이미 알아버리면 실망할 수도 있고 너무 기대할 수도 있으니 최대한 모르는 상태에서 만나는 걸 선호한다. 그래야 상대방과 직접 만났을 때 그나마 10분이라도 말할 거리가 생길 테니까.




나의 인생 첫 번째 맞선 상대자는 붉은 악마남이다. 

엄마의 친구의 지인의 조카로 나이는 나보다 1-2살 많았다. 직업은 뭐였더라 아버지 사업을 도와준다고 했던 것 같은데 기억도 나질 않는다. 엄마가 계에에에속 '딱 한 번만' 만나보라고 사정사정을 해서 나간 자리라 별 기대 없이 나간 건데 기대 안 하길 잘했다. 키가 나보다 한참 작았다. 굽있는 신발을 안 신었어도 나보다 작았을 것이다. 키가 나보다 컸어도, 키가 2미터가 되었도 이어지진 않았겠지만 적어도 키차이로 인해 이모와 조카 사이로는 보이지 말아야 한다.


카페 프런트에서 음료를 진중히 고르는 그의 모습에 나는 똥줄이 탔다. 후딱 음료를 고르고 어서 무릎을 굽혀 앉고 싶었다 나를 올려다보는 그 남자의 눈빛이 여간 부담스러웠으니까. 키 차이에 머쓱해하던 그 남자의 민망한 헛웃음에 미안한 마음이 들어, 할 수만 있다면 갈비뼈 6-7번을 잠시 접어두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그 남자는 오늘 맞선을 위해 백화점에서 고오오급 코트까지 사서 입고 왔다며 우쭐댔는데 어두운 쥐색 롱코트로 근사 하긴 했다 그도 나처럼 맞선 자리에 나름 최선을 다했구나 감동받을 찰나에 그가 카페안이 덥다고 꽁꽁 봉인되어 있는 코트 단추를 풀어헤쳤는데 그 안에 빨간색과 회색의 조화가 어우러진 레드페이스 등산복이 있으리라고 생각도 못했다.

당신을 향한 나의 마음을 옷으로 대변했소.

열정은 레드지.


혹시 몰래카메라 인가 싶어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어디에도 카메라와 이경규는 보이지 않았다. 붉은 악마 세대인 건 알겠는데 맞선에 등산복을 입고 오는 건 무슨 트렌드인가. 혹시 맞선 끝나고 등산하러 가시나 싶은 마음에 취미가 뭐냐고 넌지시 물었는데 온라인 게임으로 만난 사람들과 술마시고 맛집 도장깨기라 했다


역시 정말 나랑 안 맞는구나. 

나는 그렇게 그의 공감할 수 없는 게임이야기만 잔뜩 듣고는 영혼이 탈곡된 채로 헤어졌다.


맞선이 끝나고 엄마의 어땠냐는 별점후기 전화에 사람은 좋아 보이나 나랑 맞지 않다고 하니, 한번봐서는 알수없다고 자주 만나 서서히 알아가면서 맞춰가면 된다고 했다. 솔직히 외모도 내 타입이 아니지만 이모 체면을 봐서 최선을 다했다 어필하니 엄마는 외모가 중요하지 않다고 한번만 더 만나보라 했다. 그래서 참고 참았다가 결국 그는 탈모가 진행되고 있는 키 작은 낙타같다고 말하자 엄마는 금방 수긍하고 전화를 끊어줬다. 그렇게 나의 첫번째 맞선이 마무리되었다.




나의 두 번째 맞선자는 이모의 지인의 직장 동료의 아들이다. 남자에게서 먼저 카톡이 왔는데 그를 멀티프로필에 넣는다는 걸 깜빡해 그가 나의 메인 프로필 사진들을 봐버렸다. 얼마나 결혼이 급했는지 그는 연신 나의 외모에 대해 칭찬을 늘어뜨렸다. 키가 크니 스타일이 좋으니 인기가 많을 것 같니 등등. 참 이상한 사람이다. 내 프로필은 뒷모습을 저어어어 멀리서 찍은 사진이었는데 그는 도대체 뭘 보고 나의 앞모습을 칭찬한 걸까. 몽골인의 시력을 가지셨나 아님 관심법으로 날 들여다본 것인가.


만나는 날 비가 왔다. 음식점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우산 없이 헐레벌떡 뛰어오는 그 남자가 보였다. 키는 컸고, 배우 공유 .... 의 파마스타일에 흰색 니트를 입은 걸로 기억한다. 그 남자는 연신 손을 덜덜 떨어댔고 춥냐는 나의 말에 미인 앞이라 떨려서 그렇다고 수줍게 대답했다. 참 순수하네 싶었는데 그는 목소리마저 떨어댔다 무슨 염소처럼.


그는 말도 조리 있게 잘하고 하는 일에 자부심을 느끼는 멋진 분이셨다. 다만 염소처럼 메-에에 떠는 거에 비해 목소리가 상당히 컸다. 분명 우리 둘이 만나서 이야기하는데 청중은 20명이라도 되는 것처럼 옆 테이블의 모든 사람들이 그의 목소리에 주목했다. 마치 '여보시게들. 나 지금 맞선을 하고 있는 이 여자한테 매력어필을 하는 중이라오 모두들 주목' 외치는 것처럼. 흥분할수록 점점 높아지는 그의 목소리에 반비례하여 나의 고개는 쪽팔림에 점점 테이블로 처박히고 있었다.


" 이제껏  일-만하고 사느↗ 으라 연애할  시간 도오오 없-었는데    분-주우우씨를 보니   연애 안하고   기-다리기이일     자알 해따↗는 생각-이   듭네요오오     오오" 

소리질러러러  


여느 선거유세차량 보다 크고 쨍-하게 울린 그의 19단 고음. 옥타브 솔까지 올라가는 곡예 수준의 그의 목소리에 머리가 지끈거려 빠른 조퇴가 마려웠다. 하지만 멀리서 나를 보러 와주셨기에 커피까지는 마셔야 된다는 강박관념에 근처 사람이 바글바글한 대형 커피숍으로 자리를 이동했다. 사람들 대화 소리에 그의 목소리가 묻힐 거라 생각했는데 그의 목소리는 예상과 달리 모든 소음을 뚫고 내 달팽이관에 정확하게 꽂혔다. 사람들이 웅성웅성 거리며 우리를 쳐다보는 건 기분 탓인지 정말 대화가 들린건지 아직도 모르겠다. 그렇게 식당과 카페 테이블에 고개만 처 박은채로 2시간을 보내고 헤어졌다.


이번에는 내가 먼저 엄마한테 전화하여 당분간은 돈 버는데 집중하고 싶다고 연애는 사치인것 같다고 짧게 말하고 끊었다. 뭔가 자꾸 귀에 그 남자 목소리가 들리는것 같았다. 이 찜찜한 기분을 없애기 위해 핵불닭볶음면을 호로록 먹고서는 짜릿한 매운맛에 위가 녹아내리는 고통을 느끼며 울면서 잠에 들었다. 고통을 고통으로 치료했다.




내가 앞서 만난 두 분 다 좋으신 분이고 훌륭하시지만 나와 안 맞았다. 

엄마도 딱히 당장 나의 결혼을 바라는 건 아닌데 자꾸 엄마 주변에서 늙은 딸이 혼자 아등바등 사는 게 안타깝다며 건너의 건너의 건너의 건너를 통해 짝을 연결시켜주려고 한다. 두 번의 맞선을 통해 나는 험한 세상 혼자 살아가야겠다 다짐했다. 나에게 맞는 남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것 같았다.


엄마한테는 일도 너무 바쁘고 주말에는 집에서 편히 쉬고 싶다고 딱 잘라 말했는데 엄마의 친구의 남편의 지인의 아들이 잘생긴 연예인 닮았다는 말을 듣고는 없는 시간을 쪼개서라도 만나보겠다는 나의 강한 의지를 전달했다. 맞선에 입고 나갈 드레스를 쇼핑하며 행복한 상상에 젖어있던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귀에 염소목소리가 아닌 웨딩벨이 들리는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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