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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분주 May 30. 2023

농부가 되기는 글렀습니다

블루베리 농장 아르바이트 한지 한 달이 되었다. 주말이고 대체공휴일이고 나발이고 블루베리가 최고로 비싼 시기라 공장 돌아가듯 기계처럼 일하고 있다.


블루베리도 따고 흙도 담고 삽목도 하고. 평소에 해보고 싶었던 농장일은 원 없이 다. 블루베리 해보니 이제는 딸기도 따보고 싶고 감자도 캐보고 싶고 참외도 따보고 싶다. 크기마다 손맛이 다를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랄까. 일은 고되지만 재밌다. 몸은 조오온나 피곤하지만 덕분에 오랫동안 날 괴롭혔던 불면증이 싹 사라졌다. 대신 오후 7시에 잠든다. 꿀잠을 얻었지만 저녁을 잃었다.


세상 모든 재밌고 흥미로운 일은 내가 자는 사이에 일어나고 있었다. 자고 일어나니 누리호가 발사됐고 자고 일어나니 닥터차정숙이 이혼 준비를 하고 있고 자고 일어나니 친구들이 벌써 다음 만남의 메뉴와 장소를 즈그들끼리 다 정하고. 북 치고 장구 치고.


세상이 나만 따돌리는 기분 같은 기분.

블루베리 농장의 김파트라슈는 피곤행.



비가 내리면 비닐하우스 안 벌레들은 하우스파티라도 하듯이 어디서든 다 기어 나온다. 모기는 이제 반려곤충처럼 엥엥 거리며 따라붙는게 귀엽게 느껴진다. 애벌레 개미 거미 나방 온갖 잡벌레 등등등 곤충도감에 있을 모든 벌레들이 가득하다. 비가 추륵추륵 내리는 월요일이었다. 그날따라 벌레가 꽤 많았다. 땅에도 우글우글 블루베리 나뭇잎에서 우글우글. 이리 파드닥 저리 파드닥. 날아다니고 기어 다니고 뛰어다니고 곤충 트라우마생기기 딱 좋은 날이었다.


퇴근 시간이 되어 하우스에서 나오는데 등 쪽에 뭔가가 있는 기분이었다. 분명 뭔가가 있는데. 뒤에 따라오던 영자이모에게 등을 봐달라 했다. 영자이모가 쓱 보더니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난 영자이모를 믿었다. 근데 계속 뭔가가 있는 거 같은 아리송한 찝찝한 느낌을 떨치지 못해 등에 손을 갖다대보니 옷 안에 비엔나 소시지 같은 통통하고 딱딱한 게 만져졌다. 


ㅆㅂ 이게 뭐지. 

티셔츠 등 쪽에 단추가 달렸나. 


다시 영자이모를 불렀다. 등에 뭐가 있는 거 같아요. 이모는 다시 대충 쓱 보더니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흠. 영자이모, 블루베리 몰래 많이 좝수셔서 눈이 보이실 텐데 오늘따라 시력이 피곤하신가 보다.


등에 붙은 뭔가가 등허리 쪽에서 날개뼈 쪽으로 재빠르게 사사삭 이동했다. 촉이 왔다. 백프로 천프로 뭔가가 있다. 영자이모가 못 미더워서 지나가는 젊고 눈 밝은 선희이모한테 한번 봐달라 했다. 선희이모는 영자이모와는 달리 적극적으로 내 티셔츠를 위로 들쳐 봐줬다. 곧 으아아아아아아악 이게 뭐야ㅑㅑㅑㅑ 왕거미다 니 등에 왕거미가 붙어있다


그리고는 썡하게 도망가셨다 힝.



그 자리에서 나는 체면이고 뭐고 없이 입고 있던 티셔츠를 등목 하는 자연인 아저씨처럼 훌러덩 벗고 헬스클럽 마사지 진동 벨트에 올라탄 듯 온몸을 털어댔다. 순식간에 뭔가가 땅에 툭 떨어졌고 엄청난 스피드로 그것을 장화로 짓밟아버렸다. 이 모든 게 5초 만에 이루어졌다. 


곧이어 나온 다른 이모들과 외국인 일꾼들이 놀란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뜻밖의 상체 전체공개와 뱃살 커밍아웃. 앞 사정을 모르는 그들은 내가 단지 후덥지근하다는 이유로 노출증 환자 마냥 좋지도 않은 웃통을 홀라당 까고 있다고 생각했겠지. 그들은 재빠르게 안 본 척 못 본 척하며 내 옆을 후다닥 빠른 게걸음으로 지나쳐갔다.

오ㅗㅇ 오해예요오요. 

그런 거 아니에요. 정말이예요 믿어주세요.


요즘 젊은것들은 쯧쯧 이라며 혀를 찼겠지. 다시 티셔츠를 머쓱하게 주섬주섬 껴입었다 허허.


땅에 떨어진 왕거미의 정체가 궁금했다. 물렸을 상황을 대비해 해독제로 무엇이 필요한지 알아야 하니 왕거미를 유심히 봤는데 생김새가 거미 같아 보이진 않았다. 작업반장삼촌에게 물어보니 무슨 어쩌고 하늘소라고 했다. 머리가 하얘졌다. 어디서 얼핏 하늘소는 천연기념물 이라 들은것 같다. \


내가 밟아버리다니. 

내가 천연기념물을 죽였다. 감방으로 가는 것인가. 

감옥사람들이 나를 이름대신 5289인 번호로 불리겠지. 천연기념물 살인마 이곳 부산교도소에 잠들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급히 인터넷을 검색했다. '블루베리 하늘소' '블루베리 천연기념물' '천연기념물 감옥'. 많은 기사들이 검색되었다. 내 등짝을 운동장 누비듯 돌아다닌 그것은 바로 블루베리 농사의 적인 알락하늘소 였다. 


해충이다. 휴.

사진 보니 좀 귀엽게 생긴 것 같기도. 그날 이후로 벌레퇴치에 좋다는 계피를 사탕목걸이처럼 줄줄이 엮어 목에 걸고 버물리를 샤워하듯 온몸에 바르고 일한다. 벌레보다는 이모들이 냄새난다고 나를 피하는 것 같다.

 



쉬는 날 마트에 갔다. 크고 싱싱한 수박이 눈에 보였다. 블루베리 이모들하고 나눠 먹어야지 싶어 한통사서 먹기 좋게 예쁘게 잘라 락앤락 통에 담았다. 휴게실 냉장고에 찹찹하게 넣어서 쉬는 시간에 이모들 감동하게 짠- 하고 서프라이즈로 보여줄 생각에 한껏 들떠 있었다. 이쁨 받겠지? 더운 날 센스 있게 잘 들고 왔다고 칭찬받겠지 룰루. 뱃살 내놓고 미친년마냥 서 있던 내 모습을 지울 수 있겠지.


다음날, 쉬는 시간이 되어 이모들한테 갈증을 없애줄 시원한 간식을 집에서 챙겨 왔다고 어서 휴게실로 가자고 보챘다. 이모들도 은근 기대하는 눈치였다. 이모들이 둥글게 모여 앉으셨고 냉장고에서 통을 꺼내 이모들 앞에 뙇 놓고 뚜껑을 열었다. 


이모들 더우시죠 여기 시원한,

열무김치 한주먹씩 하세ㅔㅔㅔㅔ요.



아오. 씨이이이발. 통 잘못 가져왔다. 

김치통이랑 수박 담은 통이랑 생긴 게 같아서 확인도 안 하고 새벽에 바빠 그냥 들고 와버렸다

이모들 동시에 날 바라보던 표정.


열 명의 이모들은 동시에 이 병신 같은 년은 뭐지 싶은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니년이 말한 어제부터 이모들을 위해 준비한 시원하고 달달한 간식이 이것이더냐 이년아. 간식으로 먹기에는 짜고 맵구나. 그날 결국 우리는 오전 간식으로 깡생수만 벌컥벌컥 마셨다.




인생은 타이밍이고 선착순이다.

하루는 반장삼촌이 오늘 흙담을 사람 4명이 필요하다고 지원하라고 했다. 시원한 밖에서 하는 일이라고 과일 따는 것보다 쉽다고 했다. 블루베리 따는 거 말고는 다른 일은 한 적이 없어서 어떤 일을 하는지 몰랐다. 설명을 들어보니 대충 흙을 플라스틱 통에 담고 박스에 넣으면 된다고 했다. 개꿀. 쉬울 것 같았다. 하우스 밖에서 작업한다는 소리에 날씨도 덥고 벌레도 피하고 싶고 해서 냉큼 지원했다. 하지만 나 말고는 다른 이모들은 미동도 안 했다. 더운 하우스보다는 바람 부는 밖에서 흙장난하듯 흙 담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이모들은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서 삼촌이 임의로 몇 명을 선발했다. 이때 알았어야 했다. 왜 이모들이 반장삼촌과 눈을 안 마주치려고 했던 이유를.


설명에 따라 비료랑 섞어둔 흙을 양손으로 퍼다 넣으면 되는 일이었다. 생각보다 쉬운데?

응 그렇게 400kg. 쭈구려서 8시간 동안 넣으세ㅔㅔㅔㅔㅔ요.

쉽다고 했자나요.

이런 쉽..


무릎 아프고 허리 아프고 손목 아프고.

나는 누구인가 왜 여기 있는가 아 인생은 무엇인가. 아버지 정답을 알려줘. 너무 힘들고 이것은 내가 할 수 있는 한계선을 넘었다. 4시간쯤 지났을 때 난 도저히 못해 안 해 싶어 포기선언을 하려는 찰나,

흙요정들이여 어서 드세여ㅕㅕㅕ.

점심 특식 제공. 짜장면. 흙담은 사람들만 짜장면 쾌척.



힘든 마음 모난 마음 뭉친 어깨 굳은 허리가 눈 녹듯 샤르륵. 

앞으로 죽을 때까지 흙만 넣겠습니다. 영혼을 갈아 넣겠습니다. 제발 저한테만 맡겨주세요.

아픈 허리에는 물리치료보다 즉각 효과가 나오는 춘장치료.







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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