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력서를 다시 작성했다. 언제 어디서 좋은 기회가 생길지 모르니 이력서는 항상 최신으로 업데이트를 해놓고 일할 준비를 해야 한다 행운은 준비된 자에게 온다는 말을 믿기 때문이다. 나의 이력은 화려하다. 정말 이일저일 가리지 않고 열심히 했다. 작은 일이라도 언젠가는 써먹을 수 있는 경력과 경험이 될 거라 생각해 초밥집 아르바이트부터, 커피숍, 햄공장, 핸드폰 조립공장, 농장, 영어유치원, 학원, 준코, 패스트푸드, 과외 등 참 많은 일을 했다.
온갖 잡일을 전부 이력서에 나열하는 게 딱히 큰 장점이 될 것 같지 않아 취업에 도움이 될 만한 굵직굵직한 이력만 적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영어학원 일을 구하는데 신들린 비율로 고추냉이를 만들어 내는 기술은 필요가 없을 테니. 하지만 엄마가 작은 경력이라도 적어두면 오히려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는, 열심히 뭐든 해내는 듬직한 사람으로 보인다고 일일이 다 적어두라 했다.
보자-보자 지난 17년 동안 내가 무슨 노예짓을 해왔더라. 기억을 더듬어 시간 역순으로 나의 발자국을 되짚어봤다. 음 첫 아르바이트는 초밥집이었고, 준코에서 안주 열심히 날랐고, 휴학하고 커피숍에 일했었고 … 또 뭐가 있더라. 그리고 문득 기억 한편에 머물러있던 나의 두달짜리 맥주집이 생각났다.
아 잠뱅이 맥주집이여.
십여 년 전에 아르바이트를 했던 곳으로 지어진지 얼마 되지 않은 고오오오급 아파트단지 내 상가에 위치한 생맥주집이었다. 사장님은 단란주점을 경영하신 여자분으로 경매로 나온 목 좋은 맥주집이란 소리에 덜컥 낙찰받았다고 한다. 단란주점을 왜 관뒀는지는 말해주지 않았지만 손님 없는 시간에 사장님의 주옥같은 단란주점 에피소드를 들으며 신세계를 대리 경험했었다. 성인이 된 지 얼마 안 된 나로서는 사장님의 저세상 매운 토크에 부모님 몰래 야한 책을 보는 듯 너무 흥미 진진해서 매일 출근시간이 기다려졌다. 사장님의 손흥민 수준의 화려한 입 드리블에 나도 모르게 서서히 빠져들어갔다. 단란주점 토크콘서트에 월급을 받아가는 대신 오히려 내가 돈을 내야 하나 싶은 정도로 즐거웠다.
맥주집 아르바이트는 대체적으로 쉬웠다. 손님들도 대부분 아파트 단지 사람들이라 진상은 없었다 아니 있긴 했지만 정말 간혹 가다 한 번씩이라 그다지 힘든 일이라 생각되지 않았다. *맥주집 진상 에피소드 최고의 진상을 픽해주세요 (brunch.co.kr) 90%가 아파트 손님이라면 10%는 사장님의 단란주점 단골손님들이었다. 사장님의 큰손 손님들은 매너가 좋았다. 대부분이 소위 말하는 '돈 좀 있는 사람들'로 항상 양주를 시켜드셨고 사장님은 항상 그 테이블에 앉아 입담을 과시했다. 하루는 처음 보는 사장님 손님들이 서빙하며 돌아다니는 나를 불러 세웠다.
"어이- 아가씨 이리 와봐."
나는 추가로 술이나 안주 주문 또는 담배 심부름인가 싶어 한아름에 달려갔다.
"여기- 술 좀 따라봐."
나에게 빈 맥주잔을 들이밀며 맥주를 따라보라 했다. 이런 일은 처음이라 나는 당황스러워 어쩔 줄 몰랐다. 그러자 사장님은 다그치는 목소리로 그 손님한테 말했다.
"오빠, 얘는 그런 애 아니야. 아르바이트하는 대학생이야."
사장님이 말하는 그런 애는 뭘까.
그 말을 들은 손님은 미안하다고 나에게 바로 사과했고, 뒤돌아 가려는 찰나에 그럼 더운데 시원하게 맥주 한잔 마시고 일하라고 빈 잔에 맥주를 붓고는 나에게 잔을 건넸다. 난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손사례를 쳤다. 사장님은 얼른 마시고 가버리라는 간절함의 눈빛을 나에게 보냈다. 사장님 10년 지기 지인이라 했는데 건방지게 굴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걸 마셔야 하나 말아야 하나 우물쭈물하는 나를 보더니 손님은 갑자기 아, 내가 매너가 없었네 잠시만, 곧 그 손님은 주머니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내더니,
만원 쾌-척. 마셔라 마셔. 마셔라 마셔.
지갑에서 초-록빛 만 원짜리 한 장을 꺼내 맥주컵에 삥-두르더니 나에게 다시 건넸다.
"어서 한잔 시원하게 쭉- 들이켜."
이게 뭐지. 황당스러운 상황에 나는 순간 짜장면 먹을래 짬뽕 먹을래 수준의 어려운 양자택일을 놓고 고민을 했다. 어머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이예욧 라고 정색하며 자존심을 지킬 것인가. 열심히 사는 대학생 아르바이트생에게 용돈 하라고 돈 이불을 두른 맥주잔을 그의 호의라 생각하고 쿨하게 받아들일 것인가. 최저시급이 4천 원이었던 그 당시, 만원이면 2시간 30분을 일한 돈인데. 아 어쩌지.
막상 덥석 넙쭉 받아 마시기에는 앞에 쪼를 빼둔 게 있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곤란한 상황이었다. 곧 사장님은 어른이 주시는 건 마시는 거라고, 삼촌이 주는 거라 생각하고 한잔 쭉 마시고 일보라고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줬다. 그래도 그렇지. 나 김분주 비록 가난하지만 자존심은 있지 그럼그럼. 그리고는 비장한 표정으로,
원샷.
쭉쭉쭉쭉 술이 들어간다 쭉쭉쭉. 잘 봐 술 들어간다. 언제까지 어깨춤을 추게할꺼야.
냅다 받아마시고는 만원을 오른손에 꼬-옥 쥐고 감사하다 폴더 인사하고 자리로 돌아왔다.
이상하게 그날 맥주는 참 달콤했다.
엄마한테 10년도 더 된 '맥주 한잔에 자존심을 판 이야기'를 하자 그 당시 오만 원권이 있었으면 오만 원을 줬을 텐데 시대를 잘못 탔다고 아쉬워했다.
엄.. 엄마?
여기 맥주집이 아직까지 기억에 남아있는 이유는 물론 입담 좋은 사장님 때문도 있지만 주방 이모때문이기도 하다. 주방에서 안주담당을 하던 이모는 60대 후반으로 사장님과 참 성향이 안 맞았다. 사실 사장님은 딱히 주방이모를 미워하지 않았는데 주방이모는 틈만 나면 사장님의 어두운 이면에 대해 나에게 일일이 보고했다. 이모는 사장님의 경영방식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고, 사장님의 단란주점 단골손님들도 싫어했고 무엇보다 사장님을 그냥 싫어했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상당히 싫어했던 걸로 기억난다.
사장님을 좋아했던 나로서는 주방이모의 수위 높은 사장님 험담이 신경 쓰였으나 나말고는 딱히 말동무가 없는 것 같아서 가만히 들어줬다. 하지만 사장님께 뭔가 죄책감이 들기도 하여 아주 가-끔 소심하게 듣기 싫은 티를 내면 이모가 상황을 눈치채고 주방으로 쏘-옥 들어가서는 뒷돈대신 바싹한 치킨너겟과 짭짭한 감자튀김을 튀겨주셨다. 그럴 때마다 나는,
와아ㅏ아ㅏ앙. 마시쪄. 게눈 감추듯 사라진 죄책감.
고소한 기름에 튀겨진 치킨너겟에 나는 두 귀를 팔아버렸다.
주방이모는 사장님 험담에 국한하지 않고 사육사옆에 찰싹 붙어있는 푸바오처럼 나에게 달라붙어 이놈저놈이년저년 동네사람의 사촌의 팔촌까지 팔만대장경을 읆듯이 끊임없이 뒷담화 하셨다. 보통은 사장님 출근 전 혹은 단란주점 단골손님이 방문하여 사장님이 테이블에 앉아있을 때 혹은 손님이 적어 사장님이 외출했을 때, 주방이모의 일방적인 아무 말 대잔치가 벌어졌는데 어쩌다 삘이 꽂히면 이모 혀에 가속도가 붙어 몇시간을 폭주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내 귀는 너덜너덜했지만 시기 적절하게 내어다 주는 치킨너켓 뇌물에 나는 잠자코 들어줬다.
비 오는 주말 밤이었다. 안주 주문 실수로 사장님과 주방이모가 다퉜다. 가운데 끼여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그냥 진정들 하시라고 테크노를 추듯 왼쪽 오른쪽을 번갈아보며 분위기를 바꿔보려 했다. 사장님이 주방이모에게 서운하다면서 언니처럼 생각해서 편하게 대했는데 이게 뭐냐고 볼멘소리를 했는데 주방이모가 갑자기,
"분주도 사장 너, 이상한 거 맞다고 나랑 여러 차례 이야기했어. 나만 너 그리 생각하는 거 아녀, "
... 나만 못 죽어. 같이 죽자 알바년아.
주방이모가 단독으로 사장 험담 솔로콘서트를 한 것에 대해 갑작스럽게 나에게 공동책임을 전가했다.
ㅈ됐다.
사장님을 험담 한 적은 없지만 치킨너겟에 혼이 팔려 고개를 몇 번 끄덕였던게 암묵적 동의가 되어버린 상황이었다. 사장님은 '니.. 니가 어떻게 나에게…' 배신당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 그게 아니라, 주방이모가 계속 사장님 욕을 하셔서..."
뜬금없는 이모 고발요.
에라이 될 대로 돼라. 일단 나만 살고 보자 싶어,
"이모가 사장님 이야기를(욕을) 계속했는데 그냥 옆에서 고개만 몇 번 끄덕였지 별 의미 없었어요. 정말이에요."
혓바닥은 고장난 선풍기처럼 계속 돌아가기 바빴고 나의 '주방이모 니 탓이오' 일러 받치기 스킬이 토크분쇄기처럼 가게 안 분위기를 고요하게 분쇄해버렸다. 다행히 손님이 들어와 사건은 일단 마무리되었고, 화가 머리끝까지 난 사장님은 말도 없이 가게를 휭 나가버렸다. 그리하여 퇴근 때까지 나는 자발적으로 파놓은 무덤에 조용히 들어가 이모 눈치를 살피기 바빴다. 1년보다 긴 퇴근 시간이었다. 그리고 다음날, 주방이모는 자의인지 타의인지 출근하지 않았고 사장님은 다음 주방이모를 구할 때까지 주방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안주를 만드셨다.
그리고 난,
당분간 민망함에 아가리 자숙을 하게 되었다.
끗.
+
맥주집 아르바이트 경력은 이력서에서 빼는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