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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분주 Jul 19. 2023

대한외국인 부모님과 조선인 딸

  이제껏 하고 싶은걸 다 하고 살아왔다. 내 인생은 내가 주인공이라는 생각에 주변 사람들을 괴롭게 하지 않는 선에서 마음먹고 계획한 거는 거의 이뤘다. 아이고 그때 할걸 해버릴걸 껄껄 거리는 껄무새가 되고 싶지 않다. 해도 후회 안해도 후회라면 하고 후회하는게 낫다....물론 결혼과 죽음빼고. 하지만 이런 나에게도 단 하나, 유일하게 10년 동안이나 할까 말까 할까 말까 고민하게 만든 게 있으니.


바로 그것은 문신이다.


어릴 적 나에게 문신이란, 어두운 세계에 몸담아 있는 자들만 할 수 있는 고유영역이라 생각했다. 길가다 문신한 사람들을 보면 괜스레 눈알을 넙치처럼 옆으로 깔고 혹여나 어깨라도 부딪쳐 쥐어터질까봐 한껏 움츠리고 걷던 시기도 있었다. 하지만 어느샌가 연예인들이 문신을 하고선 당당하게 대중 앞에 나오고 주변에서 너도나도 하나씩 하는 걸 보니 이제 문신은 하나의 개성이라는 인식이 된 것 같았다.


뒷골목 선생님들처럼 용 한 마리 호랑이 한 마리가 아닌 나 자신에게 의미가 있는 특별한 것을 몸에 새기고 싶었다. 하지만 문신이라는 게 몸에 잉크를 주입시켜 평생 안고 살아가야 하는 거라 신중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어린마음에 문신을 한것에 대해 평생 후회 안할 자신있는데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은 견디기 힘들것 같았다. 부모님은 나를 자유롭게 키웠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시골 보수향이 짙은 나는 은근 주변 눈치를 살핀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어머어머 김 씨 딸내미 봤어? 세상에 마상에나, 디자인한다더니, 어디 그림 그릴 종이가 없어서 몸에 그 지랄발광을 했나벼 흉측하다 흉측해'라 수군댈 것 같았다. 또는 미래의 내 손자가 문신을 보고는 '할머니 양아치야?' 할까 봐 조금은 두려웠다. 그래서 스스로 약속했다. 문신하고 싶은 이 마음이 20대의 객기스러움이 가득 담긴 겉멋에서 오는 충동일 수 있으니 10년 뒤 30대가 되어 조금 더 내 삶의 주체가 되었을 때, 그때도 문신에 대한 마음이 변함이 없으면 그때 하기로.





그렇게 10년이 지났다.

마음이 여전했다. 겉멋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문신해야겠어.

하지만 아무리 내 몸 내 삶이지만 부모님의 허락은 받아야 한다. '신체발부 수지부모'란 말이 있지 않은가. 아 우리 부모님이 수지 부모님이란 뜻이 아니고, 부모로부터 받은 몸이니 부모님에게도 내 신체에 대해 지분이 있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지금으로부터 3년 전 여름, 부모님께 근엄하고 진지하게 문신을 새기고 싶다 말했다. 절대절대로 혐오스럽거나 크기가 왕 커서 한눈에 뙇 보이거나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는 어둡고 음산한 문신이 아니라 나만의 의미가 담겨 있는 작디작은 그림하나 보이지도 않는 곳에 새기고 싶다 말했다. 그러자 엄마는 말을 다 듣고서는 지금 이게 뭔 소리인가 싶은 표정으로 물었다.


"니 벌써 문신 몇 개 있지 않나?"


... 뭐지. 엄마가 뭘 본 걸까.

예전부터 하고는 싶었는데 할까 말까 10년 동안 고민만 하다가 결국 못했고 이제는 더 늦기 전에 하나 하고 싶다고 묻지도 않은 옛날옛적 은비까비 전래동화 마냥 10년 전으로 거슬러올라가 언제 처음 문신을 하고 싶었는지 왜 못했는지 왜 지금까지 고민만 했는지 구구절절 자진납세 창법으로 떠들어댔다. 가만히 듣고 있는 아빠는 갑자기,

"꽃인가 십자가인가 진즉에 했지 않나. 내가 본 거 같은디?"

봤슈. 지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슈.

저-어기 니 등짝에 문신 있는 거 내가 분명 봤슈.


아빠는 허준을 일러바친 돌쇠처럼 자꾸 내 등에 문신이 있는 걸 봤다고 엄마의 말에 힘을 싦어주었다.

도대체 두 사람 다 뭘 본 걸까. 나 말고 또 다른 딸이 있는 게 아닐까 싶은 찝찝한 마음이 들었다.


의외로 문신에 호의적인 부모님의 반응에 힘입어 나는 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의지가 불타오르던 여름을 지나 선선한 가을 겨울이 되니 서서히 문신 열정이 식어버렸다.


 


그렇게 1년이 지났다.

다시 반팔을 입는 여름이 되었고, 여기저기 문신한 사람들이 눈에 밟히니 치유된 줄 알았던 문신병이 또 돋았다. 안 되겠어. 이번에는 꼭 하고 말겠어. 며칠 밤새 고민했던 최종 디자인까지 들고 다시 부모님께 마지막 허락을 받으러 고향에 갔다.


"이거 봐 예쁘지, 나 이번에 진짜 진짜 진-짜 문신할 거니까 말리지 마."


막상 디자인을 보면 또 마음이 달라져 부모님이 최종 반대를 할지 모르니 확실히 못 박아두자고 생각했다. 아빠가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고는 말했다.

"아직도 안 했냐?"

네 년은 입만 나불댔구나 절레절레. 혓바닥이 길구나.

아빠의 표정은 나를 한심한 ㅅㄲ라 생각하는 것 같은 느낌 같은 느낌.


"으이고 쫄보야 쫄보. 어디 간이 생기다 말았나. 11년째 고민만 하냐. 징글징글하다."

옆에 있던 엄마도 거들었다. 사랑과 전쟁 드라마에 나오는 그 어떤 표독한 시어머니보다 더 나를 못마땅해했다.


.... 졸지에 한심한 새끼와 쫄보새끼 콤비네이션이 되어버렸다. 엄마의 돌직구 같은 팩트가 목젖을 강타해 할 말을 잃었다. 우와 우리 부모님 둘 다 시골출신이면서 마인드는 헐리우드네. 오히려 내가 더 조선시대 보수적인 성향이 짙었네. 결심했다. 부모님의 초 긍정적인 사고방식이 느슨해진 나의 정신줄을 바로잡기 위해 초고속 싸대기 역할을 했다. 진짜 해야지. 고마워요 엄마아빠. 쫄보새끼가 아니라는 걸 증명해 보일게요.



하지만 그렇게 또

김보수쫄보새끼는 문신을 하지 못한채 흐지부지 1년을 보냈다.




작년, 마침내 귀신에 홀린 듯 호다닥 문신을 해버렸다.

팔 안쪽에 작은 나비를 하나 새겼다. 이름과도 연관되고 꽃을 좋아하는 내가 평생 꽃을 찾아 여기저기 여행하듯 살고 싶다는 나만의 억지 의미를 꾸역 꾸역 끼워 맞췄다. 주말에 고향으로 내려가 자랑스럽게 쫜! 보여드렸는데 엄마 반응이 시큰둥했다.


"난 별로 마음에 안 든다."


... 엄마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모양 때문인가 위치 때문인가.

티셔츠 소매 때문에 보이지도 크기도 안 커 가까이서 안 보면 안 보인다고 치혀 풍차를 돌렸다. 그래도 엄마는 못마땅해했다. 그 옆에서 아빠는 자꾸,

이상하다. 저 어어어번에 내가 분명 등짝인가 다리짝인가 문신 있는 거 봤는디.

봤슈 참말루 봤슈. 2차 돌쇠 드립.

멈출 생각이 없는 아빠의 돌쇠 물레방아.



... 지친다 우리 집.




가족끼리 외식을 나갔다. 밥을 먹는 내내 맞은편에 앉은 엄마는 내 문신을 보고는


쓰읍

절레절레

못마땅


3단 콤보를 시전 했다. 문신했다고 눈치압박 주는 게 박지성 수준이네.

그리고는 엄마는 큰 결심을 한 듯 먹던 돈가스를 내려놓고 말했다.


"아무래도 마음에 안 든다."


... 알았어 미안해. 그만하라고.

이미 해버린 걸 어쩌겠어요. 이제 그으으으만.


"아무리 봐도 니 문신 마음에 안 든다. 이왕 돈 주고 했으면 대문짝만 하게 크게 했어야지 쫄보처럼 그리 쬐깐한게 해서는 보이지도 않네. 어이구 쫄보야 쫄보야 어디 가서 김 씨 딸이라고 하지 마라."


... 아.



우리 엄마는 경상남도 미국시 헐리우드면 출신인걸 깜빡했다.



  



우리 아빠, 나이 칠십에 겉멋이 드셨네.

난 돼도 아빠는 안돼.




끗.




+

여보, 아버님댁에 문신 토시 하나 놔드려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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