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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rden Dec 01. 2024

엄마의 엄마, 딸의 딸 1

총천연색이었던 우리 할머니

"할머니들은 다들 저런 존재인가봐."

디즈니 애니메이션 <모아나>를 보던 첫째가 한 말이다. 모아나의 할머니는 엄마,아빠는 반대하는 바다로의 모험을 떠나도록 모아나를 이끌어 결국 모투누이 부족을 항해자들로 살게 해주는 현자다. 할머니는 판단하지 않고, 강요하지 않는다. 그저 넌지시 던져주고 살며시 제시해주며 가만히 터치해주는 존재로 선택은 모아나의 몫이다.


첫째에게 우리엄마도 그런 존재였나보았다. 나에게 엄마는 그런 사람이었다. 이를테면 내가 고민이걱정거리가 있거나 문제를 일으켰다면 걱정을 하고만 있는게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해주는 사람. 일어나라고 다그치는 사람, 손을 당겨서 끌고 가는 사람, 기어코 해결책을 제시할 사람, 결이 되고나면 다시 한 번 앞으로는 이렇게 하는거라고 말해주는 사람. 그게 엄마였는데, 첫째에게 할머니란 문제점을 스스로 찾고, 직접 일어나서, 해결할 수 있도, 그 생각과 행동이 움트고 자라날 수 있도록 품어주고 안아주는 사람. 런 사람이 할머니였나보다.


생각해보면 소설이고 애니메이션이고 다큐멘터리고 '할머니'가 이상하게 묘사되는 경우는 못 찾아본 것 같다. 이상한 엄마, 못된 아빠, 나쁜 할아버지는 본 듯 한데 할머니는 무적의 눈물버튼, 최후의 돌아갈 곳, 마지막 안식처같은 느낌들로 그려진다. 왜일까.


감동브레이커라고 나를 욕할 수도 있겠지만 자식과 손녀에게 다른 포지션을 취하는 대부분의 할니들은 자식들에 한해서 두드리는 계산기를 하나씩 가지고 있다. 우리엄마는 나를 키우면서 당신이 내어준 것, 희생한 것, 포기한 것들을 한 데넣어 나를 빚어내었을 것이었고 그래서 거기에는 기대와 본전, 투자와 수익의 계산이 없다고는 할 수 없는 '손익분기점' 이 형성되어 버린다. 자식앞에서 그런 말을 입에 담아서는 안된다고 육아서에 나오지만 참고 참고 또 참다가 우악스럽게 내지르는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라든가 "그 돈을 모았으면 내가 지금 떵떵거리고 살아!!" 라든가 하는 엄마들의 사자후가 그 손익분기점에 대한 증명이다.


허나 한다리 건너면 천리(千里) 라서인지 나를 낳아준 엄마를 낳아준 할머니들은 마냥 다정하고 평화롭고, 살갑기만 하다. 그건 오랜 시간 인생을 살면서 쌓여온 현명함이나 철학, 순리에 따르며 살아온 어른들의 자연스러움같은 것에서 나오는 아우라일 수 있으나 무엇보다 손자들에게 할머니들은 계산기를 두드려야할 손익분기점이 없기 때문이다. 사랑만으로 바라보고 조언할 수 있기때문에 내내 할머니들은 고상할 수 있다. 좀 더 인정머리없이 얘기해보자면 내주머니를 지킬 수 있으면, 내손을 빌리지않는다면 관대하고 한없이 객관적이고 현명한 조언을 해줄 수 있다. 그러니까 할머니들의 손주를 향햔 마음은 사실 사랑만 있으니까 나올 수 있는 낭만이다. 이건 어디까지나 자본주의적인 분석인 것이고 하여튼 그래서 이물질 하나 없이 순도 100%의 사랑만이 녹아있는 할머니의 마음은 위대하고 고귀하며, 누군가에게 그런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손자는 매우 행운아들이다.


나도 나를 그렇게 바라봐주는 할머니가 계셨다. 계셨었다. 나를 땅에도 내려놓지 말고 물가에도 데려가지 말고 고운 것만 눈에 담아주고 예쁜 소리만 듣게 해주며 키우라고 엄마에게 얘기했던 우리 외할머니. 시집간 지 6년이 되어가도록 아이소식이 없던 고명딸에게 찾아온 빛같은 나를 할머니는 엄마보다 더 예뻐하고 엄마보다 더 귀하게 여겨주셨다. (이건 중의적인 문장인데 해석될 수 있는 두가지 뜻을 다 포함하므로 굳이 바로잡지 않는다. 할머니는 당신의 딸을 예뻐하는 것보다 나를 더 예뻐하셨고, 할머니는 엄마가 나를 예뻐하는 것보다 나를 더 예뻐하셨다는 두 의미 모두를 포함한다.)


아빠를 따라 서울에 올라온 엄마는 경남 창원에 있는 친정엘 1년에 고작 두 번, 많아야 세 번 정도만 갈 수 있었다. 선생님니던 아빠가 방학일 때에만 거기엘 내려갈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1년에 할머니를 두세번 밖에 볼 수가 없었다. 그마저도 시골은 재미없고 따분하니까 가고싶지 않아 했었고, 억지로 할머니네 끌려간다고 생각했었다. 할머니는 방학때마다 만나는 나에게 늘 "돌크듯 뽀독뽀독  큰다." 고 얘기해주셨다.


할머니는 늘 일하느라 바쁘셨고 잠시 짬이 나도 시골 할머니가 도시에서 온 어린 나와 어떤 대화를 해야하는지 아이들과는 어떻게 놀아주는지 모르셨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와 한 공간에 있었을 때 언제라도 보면 할머니의 시선은 나를 좇고 있었다. 실제로도 나는 1년에 3cm이상을 큰 적이 거의 없을 정도로 태어나서부터 작았고 줄곧 작았고 성인이 되어서도 계속 작다. 1년에 두 번 할머니를 만났다고 치면 2분기에 1.5cm 정도 컸다는 얘기가 되니 눈으로 좇으며 할머니는 그 어떤 정확한 자보다도 정확하게 내 키를 가늠하고 계셨던 거다. 랜만에 보는 다른 어른들이 입버릇처럼 '많이 컸다'고 하는 걸 감안헤보면 정말 정확한 분석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시골에 내려가서도 나는 할머니와 딱히 어디엘 놀러가거니 뭘 하거나 그런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할머니를 떠올리면 생각나는건, 나를 바라보는 할머니, 새벽에 일찍 깨어 밖에서 부스럭부스럭 거리는 할머니의 그림자, "밥무로오이라" 집이었다면 한창 꿈나라였을 시간에 아침먹으러 오라고 부르는 할머니의 목소리, 할머니집 앞 개울에서 걸레를 빨고 틀니도 씻고 세수를 하는 할머니의 뒷모습, 서울로 올라가는 우리 차가 사라질 때까지 서서 손을 흔들던 점처럼 작은 할머니 같은 것들이다. 래도 그런 기억 속에서 적어도 할머니는 주인공처럼 선명하고 천연색을 띈 컬러풀한 모습이었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 우리집에서 한달 여를 머무르셨던 할머니는 내가 학교를 다녀오거나, 친구들을 만나고 돌아오면 여전히 말을 건다거나 알은체를 하시기보다 그저 눈으로 나를 좇고 계셨다. 우리집에 와계신 할머니는 그러나 내가 어릴 때 갔던 시골에서의 할머니와는 다르게 그림 속 나무1 이나 새2 처럼 흐릿하고 색이 없는 배경같았다. 그때의 할머니에 대해 기억나는게 거의 없다. 내인생과 할머니 인생을 통틀어 우리가 가장 오랜 시간 함께하게 된 기간이었는데도 그랬다. 아마 내 기억속에서만 그럴 것이다. 할머니는 늘 주인공이었을텐데 나는 한번도 그런  할머니를 내 생애와 연결지어 생각해보질 못했다.


그래서였을까. 할머니에게 일어났던 수많은 사건들과 상처들, 엄마도 일부는 짊어졌을 당신들 인생의 생채기는 나와는 접점이 없어서 내게는 그저 무용담에 불과해보였고 책속의 일같았다. 외삼들과 외숙모의 죽음, 그 죽음의 현장에서 할머니는 삶아남았다는 죄책감, 부모잃은 자녀들은 할머니 몫이 되었다는 무게감. 그런 것들은 할머니는 삶의 굴레처럼 평생 짊어지고 살아내셨다. 그럼에도 할머니는 사랑을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부어주었으니 그 사랑이 마지막 손자인 나에게도 부족하지 않게 흘러내려왔을 것이다.


할머니는 사랑을 말없이 부어주고 계셨을 그 때에 나에게는 중간 기말고사와 학점이, 남자친구와의 애정전선에 생길 문제가, 취업시장에 불어닥친 한파가 더 중요했다. 핑계를 대자만 할머니와 맞닿아 지내본 시간이 없어서, 우리 사이에는 '엄마' 밖에 나눠 가진게 없어서 내리사랑을 눈으로 보았지만 마음으로는 느끼지 못했고, 나를 그렇게 아꼈던 할머니를 마음으로 안아드리지도 못했다.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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