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깊은 바닥과 내 높은 하늘
외로움에 대한 찬양 혹은 외로움에 대한 변명
인간은 왜 등따숩고 배부르면 자신의 가능성을 다 펼치지 못하고 사는가, 왜 행복할 때 스스로 행복하다는 걸 깨닫지 못하는가, 왜 나락으로 떨어져 봐야 있던 곳이 천국이었단 걸 뒤늦게 아는가, 왜 인간은 지옥에서 천국을 깨닫고, 불행에서 행복을 읽으며, 소속감 안에서 외로움을 꿈꿀까.
조심스럽게, 비밀스럽게 고백하건대, 가족들 중 아무한테도 얘기안하고 회사 휴가를 쓴 날이 며칠된다. 아이들을 학교와 어린이집에 보내고 출근하는 척 집으로 돌아와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낸 적이 있다. 뭐 거창한 계획이 있는건가, 하면 그럴리가. 아침나절에 특히나 에너지가 없는 나는 내 방에 그대로 돌아가서 창문 블라인드를 내리고 침대 구석으로 파고든다. 모로 누워 핸드폰을 보고 눈을 감았다가 떴다가 엎치락 뒤치락하다보면 내 정신은 꿈과 현실의 경계를 오간다. 그렇게 블라인드 틈으로 스며드는 빛 사이로 천천히 꿈틀거리는 먼지와 느리게 유영하는 시간을 몽롱하게 느끼다보면 배회하던 정신이 아득해지다가 이내 까무룩 잠이 든다. 그러다가 눈을 뜨면 기가 막히게 시간은 정오무렵이다. 역시나 천천히 일어나서 식사를 한다. 뭐 거창한 걸 먹는건가, 하면 그럴리가. 베이글에 크림치즈, 딸기잼과 연하게 내린 커피 한 잔이면 나에게는 방해받지 않는 황제의 식탁이다. 베이글을 씹으면서 극장의 영화 상영 시간표들을 확인한다. 어떤 영화이든 아무려면 어때, 아무도 나를 찾지 않고 들키지 않을 깜깜한 공간에서 쿰쿰한 극장안의 습기를 폐끝까지 들이마시고 내쉬며 가만히 앉아서 화면만 바라보면 되는 것을. 영화를 보고는 집 주변의 마트에 가서 장을 본다. 장바구니는 반드시 내가 혼자 가뿐히 들 수 있을만큼 단촐하고 가볍게만 채운다. 그렇게 오전과 오후시간을 보내고나면 나는 곧 돌아올 아이들과 남편에게 좀 일찍 퇴근했다며 짜증을 내지 않고, 상냥하고 다정하게 그들을 맞이할 수 있었다. 유효기간이 며칠쯤 밖에 되지 않는 싱싱한 다정과 상냥. 그들을 맞이하는 내 준비물이다.
어리거나 젊었던 시절, 왁자지껄하고 소란스러운 무리들 틈에서 존재감을 느끼고 그들과의 비교를 통해 ‘나’ 를 느껴왔던 내가 있다면, 40대의 나는 고요함과 적막함속에서 그 누구와의 비교도 없이 오롯이 나만 있는 시간안에서 나를 느낀다. 결혼을 하고 두 번의 출산을 거치고 나서야 나는 외로움과 고독함의 존재 이유를 알게 되었다. 픽사의 애니메이션<인사이드 아웃> 에서 깊은 슬픔을 오롯이 느낀 후에라야 기쁨도 가슴깊이 느낄 수 있다는 걸 깨달은 기쁨이처럼, 무리에 잘 섞이기 위해 외로움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환희의 순간을 더 빛내주는 건 고독함의 깊이였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혼자있는 시간들이 삭제되면서 사무치게 외롭고 싶어졌고, 못견디게 혼자있고 싶어졌다는 얘기.
나는 아이 셋을 키우고 있다. 좀 더 얘기하자면 큰 아들과 자매를 키우고 있다. 좀 더 명확히 얘기하자면, 시어머니가 낳고 내가 데려온 반품도 안되는 큰 아들, 시어머니 아들과 나 사이에서 태어난 자매. 이렇게 셋을 건사하고 있다. 우리엄마 말을 빌리자면 내가 낳았지만 내 국물은 한방울도 안튀어간 딸 둘과 그녀들을 혼자 낳았다고 해도 믿을만큼 독보적으로 힘을 낸 유전자의 주인인 남편. 이렇게 셋은 내 인생에 등장한 순간부터 내가 눈감을 날까지 내 어깨에서 등허리를 걸쳐 올라타 있을, 내 가족이다.
내가 전업주부일 때에도, 일을 하게 되었을 때에도 남편은 집안에 관련한 일이나, 갑자기 생각난 급한 용무, 잊고 출근한 물건들에 대한 문의 전화를 이틀에 한 번 이상은 해온다. 마치 내가 개인 비서라도 되는 듯. 오후에는 첫째에게서 전화가 한 번 이상은 온다. 하교후 집에서 어떤 간식을 챙겨먹으면 되는지, 흰 옷에 빨간 국물이 튀었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학원 끝나고 친구들이랑 군것질을 해도 되는지, 된다면 얼마까지 써도 되는지를 묻는 전화다. 마지막으로 오후쯤에는 둘째 어린이집 선생님께 전화가 종종 걸려온다. 오늘 친구랑 놀다가 손등쪽이 살짝 까져서 밴드를 붙여주셨다거나, 옷이 젖어서 여벌옷으로 갈아입혔다거나, 아이의 사생활에 관련한 용건으로 통화를 한다. 전화를 끊고나면 내가 뭘 하려고 했더라, 무슨 생각중이었더라, 그때 쥐고 있던 볼펜은 어딜 갔더라. 모든 게 시작 전으로 리셋되고 내가 하고 있던게 무엇이든지 간에 원점에서부터 나는 다시 시작해야 한다. 본인들에게는 한통의 전화지만 받는 나는 세 통이 되는 걸 그들은 알까. 다시 시작하면 되지 뭐가 문제냐니, 예열이 느린 내 몸과 내 머리로는 시간이 걸리는 일이란말이다.
전화로만 세 통이니 집안에서라면 더 말해 무얼할까. 엄마, 여보, 소리에 귀에서 피가 날 지경이다. 집안에서 판관 포청천도 되어야 하고, 맥가이버도 되어야 하며, 신사임당도 되었다가 히메나 선생님도 되어야 하는 내가 나 자신을 잃지 않고 살기란, 진짜로 저들이 되는 것 보다 더 어렵진 않을는지. 덕분에 나는, 아파트는 집 전체를 통틀어 가족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사각지대란 존재하지 않는 치명적인 구조적 결함을 가진 건축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복층으로 이사를 가고 싶어졌다.
그렇게 쉬지않고 끊임없이 나를 찾고 부르는 세치 혀들은 가족여행 짐싸기나 대청소, 손님맞이 상차림같이 온가족의 도움이 필요한 순간에는 어찌그리 짠 듯이 조신하고, 적막해지는지, 내 인중에만 땀이 차고 내 몸만 이리저리 분주하고 종종댄다. 그들은 하나부터 열까지 지정해주고 시켜야만 움직이는데, 그러다보면 내 다정과 상냥 에너지는 금세 바닥이 나고 단전에서부터 슬슬 화가 끓어 오른다. 왜 내가 심부름을 가장 많이 하냐는 막내, 아빠도 안하는데 왜 내가 하냐는 첫째, 요즘 애들은 버릇이 없어서 시키는 일에 토를 단다는 남편까지 돕지는 않고 세치 혀로 매를 버는 그들을 보면 부아가 치밀면서 그게 표정이나 목소리에 묻어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러면 셋의 불만은 한결같다. 좋게 얘기하면 되지, 시키면 되지, 부르면 되지, 왜 화를 내는지 모르겠다는 내용. 이 집안에서는 늘 나만 잔소리꾼에, 나만 짜증이 많고, 나만 화를 내고, 나만 소리를 지르는, 나만 악역이다. 내가 이렇게 까지 화를 낼 수 있는 인간인지, 짜증이 많은 반면 인내심은 적은지, 내 참을성의 끝은 어디인지 매일을 확인한다.
행복한 지옥, 내지는 불행한 천국. 나는 그렇게 부르기로 했다. 이들과 함께여서 나는 외로움의 가치를, 고독함의 무게를 알게 되었다. 왜 나에게 혼자있는 시간과 지독한 외로움이 허락되었을 때 난 그걸 누리지 못했을까. 나의 내면은 고독과 함께 깊어진다는 걸 고독할 때는 몰랐을까. 내 깊은 바닥이 맞닿은 곳, 내 높은 하늘과 이어지는 곳. 내 모든 절망과 환희는 이들과 함께였다. 우리 어머님이 돌아가셨을 때, 남편이 그토록 원하던 이직자리의 최종 면접에서 낙방했을 때, 그러나 기필코 그보다 더 원하는 자리로 이직하게 되었을 때, 첫째를 동네 축제에서 잃어버렸을 때, 안내방송을 듣고 찾아온 첫째와 다시 만났을 때, 둘째가 우리에게 왔을 때, 내가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을 때 나는 그들과 함께였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래서 나는 외롭고 고독할 내 시간을 더욱더 외롭고 한참이나 고독해하며 나를 위해 쓰고 있다. 때로 그것은 집 안에 갇혀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그 아무것도 하지 않음을 누리는 것이기도 하고, 어제의 짜증과 부아를 가라앉히고 반성하는 시간이기도 하며, 어른 여자들과의 사람다운 대화와 감정의 교류이기도 하다. 그럼으로써 그들과 함께 나는 우리가족일 수 있게 된다.
막내가 묻는다.
-엄마는 커서 뭐가 되고 싶어?
-혼자 있는 사람.
첫째가 묻는다.
-엄마는 다시 태어나면 뭐가 되고 싶어?
-돌멩이가 되고 싶어
마지막으로 남편이 물었다.
-당신은 로또 당첨되면 뭐할꺼야?
-혼자 살 집을 살거야.
실제로 가족들이 했던 질문들과 실제로 내가 했던 답변들이다. 좋은 가족이기 위해서 혼자있는 시간이 필요한, 외로워야 할 나를 위해 변명해 본다. 나의 가장 큰 기쁨이자 슬픔이고 노여움이자 환희일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한 가장 넓은 나의 품을 내어주려면 어쩔 수가 없다, 나에게 외로움과 고독이라는 친구가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러니까 오늘은, 제발,
Leave me alone plea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