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20년 전의 일이다. 한 기업의 면접장에서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내가 몇날 며칠을 이악물고 준비해간 그 기업의 여러가지 정보와 나의 강점, 입사 후 포부 등에 대한 정성이 무색해지는 성의없는 질문이었지만, 누구에게나 언제라도 던질 수 있는 무난한 질문이기도 했다.그 때 다른 사람들을 보니 보통, 제인 구달 이라든가 노암 촘스키, 아니면 헤르타 뮐러처럼 이름도 어려운 외국 사람을 드는 게 주류였고 드물게 노무현 대통령이나 세종대왕같은 내국인도 있었다. 다시말해, ‘엄마’ 라고 대답한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그 때 기가 찬다는 듯한 면접관의 표정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뭐 저런 꼴통이 다 있지, 라든가 바보인건가, 하는 그런 류의 표정. 그 때 나는 그들의 나이브한 질문에 그렇지 못한 태도로 임하며 열정적으로 우리엄마를 존경하는 이유에 대해 어필했었는데, 아마도 니들이 우리엄마에 대해서 뭘 아냐는 마음이었지 싶다. 나의 그런 태도는 다른 경쟁자들에게는 ‘알아서’ 나가 떨어져준 셈이 되었다.
존경이라니,,,,,, 그렇다. 생각해본 적이 없는 문제였다. 엄마는 내가 내리는 모든 결정의 원천이자, 내가 하는 많은 행동의 동기다. 내안의 뿌리깊은 나무를 엄마가 심었다. 그러나 사회적 업적과 개인적 삶 사이에는 얼마만큼의 연관성이 있는 것인가. 우리가 존경해야 하는 것은 그이의 사회적인 업적인가, 개인적인 삶인가. 엄마가 나의 존경을 받는 건 필연인데 그게 왜 타인에게 는 인정받을 수 없는 일이 되어버리는가. 면접에서 떨어지고 나서야 그 관계에 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 이야기는 또 십수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엄마는 손재주가 아주 좋았다. 종이접기 유튜브나 책같은 게 없던 80년대에도 엄마는 종이접기와 오리기로 우리집 곳곳에 잠자리떼나 포도송이같은 것들을 붙여주었다. 수제비 반죽으로 곰이나 토끼도 만들어 주었고, 학교에 다닐 때에는 스승의날 예쁘게. 포장한 선물위에 붙일 팔각 별모양 리본같은 걸 그자리에서 뚝딱 만들어서 달아주곤 하셨다. 그때로서는 보고서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뭐든 다 잘해내는 엄마의 손재주중에서 내가 가장 동경했던 건 뜨개질이었는데, 뜨개질을 할 때 엄마의 표정은 삶에 이력이 난 자의 그것이었다. 심드렁한 표정과는 대조를 이루며 야무진 손 끝에서 한줄 한줄 생겨나는 작품의 무늬나 짜임은 참으로 이질적인 것이었으니, 엄마의 표정과 다정한 작품 사이의 멀고 먼 거리에는 무엇이 놓여있는지 알 수 없었다. 크면서 어렴풋이 그 간극을 짐작하게 되었는데, 그건 엄마에게 몇번이고 뜨개질을 가르쳐달라고 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었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 엄마는 “뜨개질을 배우면 뜨개질을 하는 팔자가 된다” 면서 한사코 뜨개질을 안가르쳐 주었는데, 상냥하고 포근한 작품들과 심드렁하고 지루해보이는 표정 사이에는 엄마의 실제 인생과 엄마가 나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인생의 좁힐 수 없는 거리가 들어가 있는 게 아닐까 한다. 뭐 어쨌든 열의는 있었으나, 배우지는 못한 덕분에 나는 '뜨개질도 못하는' 무능력자가 되었다. 피아노 덮개나 작은 담요, 내가 입었던 여름 원피스나 겨울 스웨터같은 것들이 엄마 손끝에서 완성되었고, 매일의 일상속에서 나는 그것들을 보고, 입고, 만지고, 쓰면서 자랐다. 은연중에 그런 것들이 내 취향에 일부 기여했을 것이다.
우리가 마지막 이사를 마치고 마침내 G시에서 가장 좋다는 아파트에 정착이란 걸 하게 되었을 때, 엄마는 숨통이 조금은 틔였던 것 같다. 더이상은 아끼고 조이고 졸라매지 않아도 되는 생활이 거기에 있었다. 그 집이 최종 목표였던 엄마는 공무원의 아내답게 여전히 알뜰하고 살뜰히 살림과 가정을 돌보았지만 확실히 그 아파트에서 의식주를 넘는 약간의 고차원적인 무언가가 필요했던 것 같다. 특별히 잘하는 건 없지만, 또 그렇다고 못하는 건 하나도 없는 걸 당신의 자랑으로 삼던 엄마는 등을 말고 앉아 김을 굽거나, 화초를 돌보거나, 그것도 아니면 신문을 짚어가며 주식동향을 보는 것 말고도 여러가지 취미생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어느 날에는 메이크업 키트가 집에 있었고, 또 어떤 날엔 A4용지에 그려진 악보와 하모니카나, 종이위에 조악하게 그려진 컴퓨터 쿼티자판같은 것들이 나뒹굴었다. 그 뒤로도 서예붓과 화선지, 골프채와 장갑같은 것들도 우리집을 거쳐 갔던 것 같고, 수영복을 보았던 것 같기도 하다. 워낙에 엄마는 손재주가 좋았으니 뭘 하든 할 사람이었고, 어떤 걸 배워도 잘 할 사람이었을 거라고 장담한다.
맞다. 손재주가 좋았던 엄마는 이것 저것 다 기웃거려보았지만, 어느 것 하나에도 마음을 주지 못하고 이내 다 그만두었다. 엄마는 그동안 삶의 최전선에서 잘하는 것만을 더 잘하면서 살아왔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 천직이었던 엄마는 과외를 치며 아이들에게 쓸 교재와 교구는 오래도록 열과 성을 다해 만들었고, 우리집에 조금이라도 미적 감각이 필요한 여러 부분을 손재주로 채우면서 살아왔다. 한 푼이 두 푼되고 두 푼이 지폐되는, 그렇게 티클이 기어이 태산도 된다는 걸 증명하면서 뿌듯했다. 그게 엄마의 자부심이었고, 집안에서 엄마의 쓸모였다. 그렇게만 살아온 엄마의 손과 머리에 설고 서툰 일이란 건 용납이 안되는 모양이었다. 늘 누군가를 지도편달하고, 조언의 말을 해주던 엄마가 반대의 입장에서 걸음마를 떼는 아기처럼 도움을 받고, 가르침을 듣는 일은 아무래도 영 어색한 것 같았다. 아무리 손재주가 좋아도 배우는 과정과 시간만큼은 끈기와 참을성이 재능보다도 더 필요한 법이다. 재주는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끈기와 인내가 없었던 엄마는 그렇게 당시에는 시도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시피했던 골프나 메이크업, 내가 보기에 정말 재능이 있어보였던 서예와 손글씨, 저런건 대체 누구때문에 배웠을까 싶었던 컴퓨터와 바둑에 이르기까지 전 종목을 그 어떤 미련과 아쉬움도 없이 다 ‘때려치웠다’.
엄마는 늘 나보다 키가 컸고, 예뻤고, 모든 걸 다 알고 있었고, 옳았다. 엄마의 존재는 내가 어떤 수를 쓰더라도 넘어설 수 없는 깎아지른 산같아서 나는 어른이 되고도 한참을 엄마의 그늘아래에서 서성였다. 그러나 엄마도 사람이었고, 완벽하지 않았다. 다 있는 줄 알았던 엄마에게도 당연히 없는 게 있었다. 반복적으로 취미생활을 밥먹듯이 때려치우는 엄마를 보며 어른이 완벽하다는 환상을 벗을 수 있었다. 그만둘 때와 동일한 속도로 이내 다른 취미생활을 함부로 찾아내는 엄마의 경솔함이 내가 알던 엄마에 대한 이미지를 낯설게 했다. 내가 엄마에게 느끼는 마음이란 그러니까 존경이라기 보다는 사랑과 애틋함이 아니었을지. 딸에게는 뜨개질을 알려주고 싶지 않았던, 딸이 당신보다 더 잘난 사람으로 살길 바랐던 그 때의 엄마는 젊었을텐데 생활에 쫓겨 매일이 고단하고 피로했을 엄마를 어루만져 주고 싶었던 마음을 어떻게 존경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무얼 꿈꾸며 그다지도 겁없이 이런 저런 취미를 수집하듯 찾아다닌걸까 생각할수록 웃음이 나는 이 마음은 분명 존경과는 결이 다른 것이었다.
이런 생각을 할 수 있게 해준 그 면접관에게 어이없게도 감사하는 마음이 되었다. 지금도 티비에 명장이나 장인, 달인같은 사람이 나오면 엄마는 믹스커피를 홀짝이면서 “내가 그 때 저걸 계속했더라면 지금쯤,,,,,,” 이라는 말을 주문처럼 읊는다. 엄마가 그 때 그걸 했더라면 나는 이제 어디에서든 떵떵거리며 대가가 된 엄마를 존경한다고 말할 수 있었던 걸까. 그렇지만 나는 알고 있다. 엄마의 말투나 표정안에 일말의 후회나 안타까움 따위는 없다는 걸 말이다. 나는 엄마를 사랑한다. 험준한 산맥이 아니라 동네의 야트막한 동산이 되어가는 나이든 엄마를 사랑한다. 한때는 존경이었을지 모를 엄마의 날렵한 손끝과 거기서 태어나던 아름다운 존재들이 이제는 애틋하다. 그래서 이제는 엄마로부터 비롯돼 내 삶에 알게 모르게 스며든유무형의 모든 것들을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