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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rden Sep 08. 2024

내가 비롯된 곳 2

두번째 이야기, 엄마.


첫번째 엄마이야기는,

https://brunch.co.kr/@inthegarden/80


엄마는 무심함과, 다정함 사이의 그 어드메에서 잡는 균형감각이 탁월한 사람이었다. 마음을 먼저 열어 보여준 사람에게는 누구보다 다정한 리스너이자 현명한 조언자가 되어주었지만, 그 사람이 가려고 할 때는 잡지 않았다. 오는 사람을 막지 않았고, 가는 사람을 잡지 않는 무심함때문일지, 엄마는 동네 아줌마들과 끈끈했지만 결코 질척이지는 않았다. 기실 동네 여자들의 불화와 갈등은 너무 많은 말과 만남이 오가며 이간질과 뒷담화가 난무하는 가운데 질척이며 생기는 거였다. 엄마는 들은 얘기 이상을 궁금해하지 않고, 그 위에 말을 보태지 아니하였으며, 그자리에서 일어나면서 털어버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었는데, 엄마는 실은 동네 아줌마들의 치부랄지, 비밀이랄지, 그런 것들을 엄청나게 알고 있었다. 도무지 엄마가 말하는 사건과 그 아줌마의 이미지가 매치가 안되어서 진짜? 그아줌마가 그랬다고? 하고 재차 삼차 물었지만 엄마는 특유의 심드렁함으로 그렇다, 고 했다. 그들의 비밀은 엄마의 무심함으로 지켜질 수 있었다. 그런 엄마의 인간과계와 관계안에서의 위치를 무시로 보고 자란 나도 그런 방식을 답습하려 했지만, 그건 훈련이 아니라, 본능과 촉의 영역이라 나는 종종 어떠한 인간관계에서는 필요 이상으로 미련을 가졌고, 또 어떤 때는 지나치게 가차없었다.    


또, 여느 여자아이들과 비슷하게 나도 어느 정도 엄마의 속을 끓이고, 또 얼마간은 애를 태우며 크고 작은 문제를 일으키고 그걸 수습하는 과정속에서 몸과 마음이 조금씩 자랐다. 정확히 얘기하면, 크고 작은 문제를 (내가) 일으키고, 그걸 (엄마가) 수습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문제와 갈등을 해결하는 자세를 배우며 컸다. 엄마는 엄격했지만 너그러웠던 걸로 기억한다. 아침에 눈뜨자마자 부모님께 안녕히 주무셨어요, 인사를 하고 곧장 화장실로 직행해 세수와 양치질을 반드시 하게끔했다. 땟국에 절어서 놀이터에서 돌아온 저녁무렵에는 현관발치에서 바지와 양말을 벗고 종종걸음으로 화장실로 가서 몸을 씻게 하셨고, 밥을 먹고나면 항상 숙제를 하는 시간이었다. 그런 작은 일과는 엄격하게 지키게 했지만, 어린이들이 응당 할 수 있었던 큰 실수와 사고에는 든든한 방패가 되어 주었다.


국민학교 2학년때 인라인스케이트를 타다가 계란아주머니와 부딪혀서 계란 수십판을 깨먹었던 일이 기억난다. 간이 작고 겁이 많았던 내가 칠 수 있었던 꽤나 큰 사고였다. 엄마는 그때 나에게 화를 내지 않았고, 나를 대신해 조용하게 손해를 산정해 배상했고, 나와함께 신속하고 정중하게 사과했다. 그런 것들을 보면서 가족을 벗어나 사회에 발을 내디딜 때 보폭의 적절한 정도와 내딛을 적당한 타이밍을 판단하는 법을 자연스럽게 배웠던 것 같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엄마는 사과를 해야 할 때와, 받아야할 때, 돈으로 하는 보상이 필요할 때와, 그런 보상을 받았을 때 그게 정말 고맙게 받을 수 있는 건지, 빚으로 얹혀 나중에 갚아야할 것인지를 아는 사람이었다. 가까워질 사람과, 손절할 사람, 계산적으로 굴어야할 사람과 마음놓고 베풀어도 될 사람 역시 본능적으로 아는 사람, 아직도 나는 발치도 쫓아갈 수 없는 관계의 달인, 그게 엄마였다.


타인과의 거리조절에는 탁월했던 엄마가 유일하게 ‘을’을 자처하던 관계있었다면 그게 아빠였는데, 그것 역시 전적으로 나와 남동생때문이라는걸, 다 크고 나서 뒤늦게 알았다. 엄마는 아빠와 싸우는 모습을 우리에게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고, 아빠의 흉을 우리에게 본 적도 한 번이 없었다. 그래도 나와 남동생은 엄마 아빠가 잉꼬부부는 아니며, 싸웠을 때와 화해했을 때를 그날 집안의 공기속에서 전부 캐치해냈는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싸운 모습을 직접 보는 것과 눈치껏 아는 것과는 하늘과 땅 만큼의 차이가 있었다. 결과적으로 그것이 옳았는가, 의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내가 15년 이상의 결혼생활을 해보고 아이들 둘 키워본 이상, 엄마를 존경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아빠는 그럼 무얼 하고 있었는가, 아빠역시 엄마와 싸우는 모습을 우리에게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고, 엄마의 흉을 우리에게 본 적이 한 번도 없는 것 아니냐 라고 묻는다면 맞긴 하다. 아빠는 갈등이 생기는 상황이 되면 동굴로 숨고 입을 닫는, 전형적인 그시절 가장이었던 터라, 엄마와 아빠의 이상한 기류를 눈치챈 나와 남동생을 안심시키고 전날과 다름없는 일상을 유지시켜주느라 동동거리던 엄마와는 달리 혼자 우아하게 안방을 차지하고 앉아 도를 닦고 독서를 하고 있었더랬다. 그러니까 아빠가 ‘무위’ 로서 품위를 지켰다면, 엄마는 ‘작위’ 로서 나와 동생을 지켜주었다.


내가 동네아줌마의 비밀들과 아빠의 치명적인 단점과 싸움패턴에 대해 엄마에게 낱낱이 들었을 때는 이미, 그 이야기가 내게 아무런 힘도 없이 그저 이야기로서밖에 역할을 다하지 못할, 20대 중반 즈음은 되었을 때였다. 그러니까, 그런 얘기들을 들었다고 해서 아줌마들을 쳐다보는 눈빛이 달라졌거나, 좋은 사람으로 알고 있던 아빠를 나쁘게 본다거나 하게 되지는 않았다는 얘기다. 한번 수다를 떨기 시작하면 그 화력으로 불꽃놀이도 할 수 있을 사람이 또 엄마인데, 수다에 등장하기 가장 적합한 그런 소재들을 엄만 어떻게 참았을까, 싶한편으로는 그렇게 입 무거운 친구들 둔 엄마의 인연들이 부럽다.


가끔 엄마는 성인이 된 나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끝에 잡았어야하는 인연들에 대함 아쉬움을 얘기하곤 했다. 13평짜리 주공아파트에 네식구가 살 때 방한 칸에 세들어 살며 공장에 나가던 곰살궂고 싹싹하던 시골출신 아가씨나 일을 하면서도 시집살이를 하느라 자주 만나고 노닥거리지 못했지만 사람은 참 어질고 괜찮았던 보험을 하던 아줌마처럼 이사한 뒤로 연락이 뜸해지다가 결국 끊어져버린 인연을 후회했다. 엄마의 무심함이 다정함의 이면에 있던게 아니라 실은 핸드폰도, 카카오톡도 없던 그 시절, 오로지 노력과 정성에 의해서만 연락과 안부가  가능했던 때라서 그렇게 된거였다. 먹고 사느라 연락하고 안부를 물을 틈이 엄마에겐 없었다. 엄마의 후회는 그래서 자의에 의한 선택이 아니라 타의에 의한 것이었고, 그 타의에 나도 들어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면 엄마에게 아주 많이 미안해진다. 엄마를 보며 나는 타의로 후회를 하고싶진 않아서  후회하지 않는 나, 와 그럼에도 아이들에게 좋은 엄마, 사이에서 이래저래 저울질을 해보지만 그것 역시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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