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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rden Sep 02. 2024

적당한 진심과, 적절한 거리

결혼한 누나에게, 미혼 남동생이란,

- 4살짜리 남자애가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엉엉 울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누가 내 눈에 모래 뿌렸어." 7살먹은 여자애가 남자애의 눈시울부터 눈꺼풀 안쪽을 빈틈없이 채운 모래를 본다. 가재수건을 물에 적셔와서 남자애를 앉히고 가만히 앉아 모래, 그리고 모래와 뒤섞인 눈물도 함께 닦아내준다. 눈가를 다 닦아내고 이내 여자 아이가 "가자!" 하고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영문도 모르고 따라나선 남자애를 데리고 놀이터에 도착한 여자애는 묻는다. "누가 모래뿌렸어? 가리켜봐." 가만히 어느 한 쪽을 가리킨 남자애. 여자애는 핵토파스칼급 속도로 냅다 달려가 그애에게 남자애의 눈에 들어있던 모래보다 더 많이 더 오래 더 깊이 모래를 던진다.

- 한일월드컵이 한창이던 2002년. 고주망태가 되어 잘 걷지도 못하는 22살 여자애가 동네에서 전화를 한다. "야!!!! 우리나라가 이탈리아를 이긴 이 역사적 시점에 공부가 되냐?? 얼른 좋은말로 할때 튀어나와라!!" 고3이던 남자애는 꼭지가 돌았지만 혹시 여자애가 집을 못찾아서 길바닥에서 잠이라도 들거나 워낙 흉흉한 세상이라 희박하지만 가능성이 없진않은 여러 안좋은 경우의 수가 두서없이 떠오르기도 해서 여자애가 부르는 데로 간다. 고3인데 어쩌고 저쩌고 궁시렁대면서도 발걸음을 재게 재촉한다.

- 이번에는 밤11시.27살 여자애가 다급히 핸드폰으로 어디엔가 전활 건다. "큰일났어! 얼른 내 방으로 와봐!" 다급한 목소리로 남자애를 찾는다. 남자애는 허둥지둥 방으로 향한다. "왜 왜 무슨일인데???" 급하게 뛰어온 예비역 24살 남자애. 여자애는 침대에 누워 천연덕스럽게 답한다. "나 너무 피곤해서 못일어나겠어. 내 방 불좀 끄고 나가줘."


우리 가족사이에 두고두고 구전되는 몇 일화다. 여자애가 나, 남자애가 내 동생. 이건 그냥 우리가  웃으며 술안주처럼 하는 얘기지만 생각해보면 동생을 대하고 사랑하는 내 방식에 대한 얘기다. 그리고, 또한 남동생과 나의 권력구도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나는 동생을 너무 사랑했지만 그건 내방식이었다. 갑이 을을 사랑하는 방식이랄까. 동생이 원하고 필요한 방식이 무엇이었는지 관심없던, 하지만 극진한 사랑만은 진심이던 내가 주고싶은 날것 그대로의 사랑이 내 사랑이었다. 사실 그건 사랑이 아닌데 그땐 그걸 알지못했고 그걸 몰랐던 건 나뿐만은 아니었지 싶다. 엄마 아빠도 내가 동생을 많이 아끼는 정의롭고 기센 든든한 누나라고 늘 치켜세워줬었으니까. 그때의 엄마 아빠는 첫째와 둘째의 서열을 바로잡아 동기간의 기강을 세우는 일을 가정교육의 하나라고 생각했었다. 아마도 80년대 초 태생인 내가 딸이라서 더, 첫째 밀어주기를 하셨던 당시로서는 나름대로 신식 부모님이셨던게다. 당시만해도 남녀차별은 끝물이긴 했겠지만 현재 진행형이었다. 엄마 아빠의 마음에는 조금도 딸이라서 덜 가르치고 덜 해줘야 한다는 생각이 없었기에 더 나에게 힘을 실어주셨던 걸, 나는 동생에게 내 권력을 마음대로 휘둘러도 된다고 착각했던 것 같다.


우리는 누가봐도 이상하리만치 친하고 가까운 자매 이상의 남매였다. 성인이 되어서도 그런 관계는 지금까지 이어지는데, 남편을 비롯 내 주변의 친구와 지인에게 동생과의 관계를 자랑스레 떠벌리면 그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그게, 니가 잘해서 그런게 아니야.”

“00같은 동생 세상에 없다, 너.”


남들은 그렇게들 얘기하는데, 그건 그들의 생각이고 또 내딴에는 늘 자매가 고파서 어딘가는 부족하다고 느낀 남자형제였고 우리사이에는 어쩔 수 없는 벽이 있다고 생각해왔다. 이를테면, 남편과의 갈등, 엄마에게 잘 못하는 아빠의 흉을 동생에게 볼때마다 남편과 아빠의 대변인을 자처하는 동생을 보면 어쩔 수없는 빡침을 느꼈고, 그건 동생의 솔직한 마음이었을 것이었다. 특히 요즘처럼 젠더갈등이 심한 때에 사실 성별의 벽은 생각보다 견고하다. 한녀라서, 또 한남이라서 십수번을 다시 태어나도 이해하지 못할 일들이 우리 사이에는 많이 있다. 내가 아빠가 아닌 엄마기 때문에 느끼는 육아에서의 애로사항들, 남자가 아닌 여자라서 직장에서 느끼는 곤혹들, 동생은 성심성의껏 들어주었지만 나의 진심과 밑바닥까지는 절대로 모를 것이었다. 그리고 그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반대로 동생이 ‘미혼’의 ‘남자’ 라서, 외국에 거주하는 ‘외국인 노동자’ 라서 느끼는 외로움과 노곤함, 아픔들을 나도 나대로 들어는 주지만 그 밑바닥은 절대로 모를 것인 듯, 그건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그래서일지 여동생이라면 어쩌면 수십번도 더 했을 니가 있어서 정말 든든하고 위로가 된다는 말을 남동생이라서 못했다. 말로 표현하는 대신 면전에서 동생의 영역을 침범하며 내맘대로 어깃장놓고 사랑한다고 우기고는 했을지언정, 정작 해줬어야 하는 그 한마디를 못했다. 이렇게 적어놓고 보니 진짜 못났다,나. 지금에와서 생각해보면 오히려 사랑이 뭔지 알았던 건 내동생이 아니었을까, 한다.  숱한 일화에도 우리가 아직 사이좋은 남매로 남을 수 있었던 걸 보면. 내가 우리사이에 재를 뿌렸다가 수습하고 북치도 장구치고 도랑치고 가재잡는 동안 늘 한결같이 그자리에 있던 동생덕분에 우리가 '아직도' 좋은 남매로 포장될 수 있었다는 걸 이제야 인정한다. 그걸 인정하는 데 40여년이 걸렸다.  


코로나로 3년동안 얼굴을 못보던 동생이 한국에 들어와서 2주간 머물다가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던 그 때, 알게 되었다. 동생은 들어오기 한참 전부터, 아니 코로나가 시작되던 시점부터 늘 가족의 안부도 먼저 물어왔고, 아픈 곳은 없는지 먼저 챙겼다. 아무도 요구한 적 없는 여자 조카 둘의 선물과 학용품을 챙겨뒀고, 남편의 골프용품을 챙겨온 것도 동생이었다. 결혼을 하고, 남편과 아이들이 생기면서 늘 나의 우선순위는 ‘내가족’ 이었다. 동생에게도 우선순위는 ‘내가족’ 이었을테지만 미혼인 그에게는 내가족에 나까지 포함되어 있으니 그리도 살뜰히 챙길 수 있었을 것이었다. 역시나 나는 내 방식으로 동생에게 무심했고, 사랑하는 건 하는거고, 예전과는 다른 수법으로 내 방식을 고수했던 거였다. 오랜기간 얼굴을 못보는 동안 의무적으로라도 한 번, 또 한번쯤은 생각난 김에라도 한 번 먼저 연락하고 챙길 수 있었다. 하지만 역시나 갑과 을의 방식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미안했다.  


그렇게 오랜만에 본 것도 처음, 그렇게 목적없이 쉬러만 온 것도 처음, 직장엘 다니면서 동생을 맞은 것 역시 처음이라 체력이 안받쳐줘서 먹고싶은만큼, 놀고싶은만큼, 하고싶은만큼,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동생에게는 여행지이고 쉬러왔을 이곳이, 나에게는 매일매일이 반복되는 생활이 이어지는 곳이라, 같은 공간에서 간극을 매우지 못한 이몽으로, 가는 시간에 발만 동동 굴렀다. 그래도 영혼의 저편에서 최선을 끌어다 밤늦게까지 얘기하고 맥주들이켜고 산책하고 수런거리느라 나는 2주간 상거지꼴로 회사에 출근했다가 네발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코로나 탓일지, 덕일지, 3년만에 바리바리 가족들 선물들을 이고지고 싸온 동생을 보면서 느끼게 된건, 적당히 표현되는 진심이란 없다는 사실이었다. 한껏, 맘껏, 힘껏, 표현해야 겨우 가 닿을까말까 한 게 우리의 진심이었다. 많이 표현해야했었다. 타국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네가 짠하고 안쓰럽지만 지금껏 그래왔듯 그 누구보다 열심히, 잘 해낼거라 믿는다고.  누나는 너에게 많은 부분을 의지하고 있으며  그보다 더 많이 응원하고 있고 꼭 그만큼 너를 사랑한다고.


적당하게 표현되는 진심이란 없고, 그건 어디까지나 마음의 일이라 눈에 보이질 않으니까, 사랑한다면, 또한 나의 방식이 아니라 너의 생각을 고민해봐야 한다. 서로 지나치게 가까이 다가섰다가 한없이 멀어지고 마는 사이들은 거리조절에 실패해서다. 우리엄마는 늘 나에게 친구든 지인이든 단점과 상대에 대한 불만을 들키지 않을 정도로만 만나라고 하셨었다. 그게 ‘거리’ 에 관한 이야기였다는 걸 이제야 깨닫는다. 자식보다 손녀가 예쁜 이유, 옆에 끼고사는 자식보다 멀리 살아 명절에만 보는 자식이 아픈 손가락인 이유, 매일 얼굴을 보는 배우자가 앙숙인 이유, 떨어져있는 거리만큼 낭비하지 못한 애정은 쌓이고, 붙어있는만큼 고갈된 애정은 차오르지 못해서다. 우리 사이에 적당한 거리는 늘 필요하다. 거칠고 억셌던 내 방식이 아니라 느리고 늦되었지만 잔잔하고 차분하던 내동생의 방식처럼 누구나 두르고 있는 각자의 고유한 테두리를 지켜주는 것, 그것이 오래도록 변하지않는 관계를 지속하는 최소한의 방법일 것이다.


지금까지 남동생이 해준대로, 나도 이제 그렇게 동생의 방식을 생각해보려 한다. 앞으로도 본인의 ‘내가족’ 이 생기기 전까진 내 동생으로 불러도 될 남동생에게 너무 다가가 서로 뜨거워서 데이지 않고, 너무 멀어져 차갑게 서로를 잊지도 않을, 마음을 다한 진심이 잘 전달될 적당한 거리를 이제서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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