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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rden Jul 18. 2024

자매의 생태계

같고도 다른 그녀들의 생존전략


세자매중 맞이인 고등학교 친구에게 전해들은 얘기가 있다. 친구는 바로 아래 동생과 연년생이라 매일같이 밥그릇 싸움을 했었는데, 싸움의 가장 큰 이유는 단연 새 옷의 개시와 옷장열쇠를 둘러싼 것이었다. 누가 먼저 새 옷을 개시하는가, 그날 아침 옷장 열쇠를 누가 들고 튀는가에 따라 전쟁은 시작됐고 그날도 예외는 아니었다. 주말아침, 언니 몰래 새벽같이 일어나 새옷을 꺼내입고 옷장 열쇠까지 들고 놀러간 둘째가 귀가할 때까지 벼르던 친구는 동생이 들어오기 무섭게 잽싸게 머리채를 낚아챘고 그렇게 그날도 치고받고 싸웠다. 싸움은 여느날과 다르지 않았다. 다른 건 어머니였다. 그날따라 몸아 안좋아 하루종일 쉬시던 친구의 어머니는, 도저히 그날은 이 싸움을 못견디겠다 싶으셨나 보았다. 어머니는 휘적휘적 주방에서 칼을 빼들고 와서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 같은 힘없는 모습으로 몸을 겨우 지탱한 채, 아무래도 둘중에 한 놈은 죽어야 끝이날 것 같으니 옥상에 가서 결판을 짓고 오라고 칼과 함께 둘을 쫓아내셨다고 한다.


세상의 모든 둘째들은 첫째들을 위해 태어나는 거라던 얘길 어디에선가 들은 적이 있다. 우리 아기 외로울까봐, 살아가는데 가장 친하고 찐한 친구를 만들어주고 싶어서 둘째들은 잉태된다. 애만큼이나 내가 중요해서 내 인생에 둘째란 없다고 못박았던 나도, 둘째가 생기기 전까진 우리 아기 외로우면 어쩌지, 우리 부부가 죽고 이 세상천지에 혼자 남게되면 어떡하지, 하며 마치 직무를 유기한 엄마처럼 죄책감이 마음의 한켠에 늘 보릿자루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둘째가 생기지 않다면 끝끝내 덜 수 없는 죄책감이었을지도 모르겠다.이 세상에 둘째가 찾아오는 방법은 그거 하나일지 몰라도, 그렇게 찾아온 둘째는 소중함이란 함께 지내온 시간에 비례하는 것은 아니란 진리를 알려준다. 첫째보다 뒤에, 첫째를 위해 찾아왔지만 단번에 첫째와 나란한 위치에 자리하게 되는 둘째들은 직립보행을 시작하고, 자아를 가진 ‘사람’ 행세를 하기 시작하면서 첫째를 위해 둘째를 만들어준다는 부모들의 생각이 얼마나 편협하고 어리석은지를 알려주게 된다. 친구의 어머니도 그 순간 연년생으로 자매를 낳아 친구로 만들어준 걸 후회하셨을 것이다.  


우리 집에 있는 자매도 생존경쟁이 아니면 저럴 수가 없다싶게 서로를 겨눈다. 친구네처럼 연년생이 아니어서인지, 아직은 어려서인지, 그도아니면 성격탓인지 머리채는 잡지 않았지만 서로가 미움으로 충만하다. 어느날 갑자기 사랑을 강탈당한 첫째, 태어나는 순간부터 사랑의 온전한 모습도 보지 못한 채, 경쟁자를 마주한 둘째, 둘은 마치 먹이사슬의 포식자와 피식자들이 보여주는 생존본능처럼 각자 다른 방식으로 엄마의 사랑을 갈구한다. 보통 첫째는 물리적으로 정신적으로 강한 몸과 지식을 이용해 둘째를 괴롭히고 이용한다. 보통 터울이 적은 자매들이 그래서 싸움이 커질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노력해도 덩치나 지능이 언니를 따라잡을 수 없고 자신의 마음과 미움을 담는 데 적합한 어휘를 아직 못찾은 둘째는 나한테 조용히 다가와 언니를 이르거나, 자신이 아기라서 보호받아야 한다는 점을 끊임없이 내게 일러준다. 밖에 나가서 동생들을 보면 언니인 척을 그렇게나 해대면서도 본능적으로 엄마한테는 어떤 점을 어필해야 하는가를 알고 있는 것이다. 첫째는 잘못을 저질러놓고도 동심으로 포장하는 그런 둘째가 환장하게 밉다. 그런 둘을 보고 있는 나는 어쩌란 말인지, 트위스트라도 춰야할 지 난감하다. 둘을 다 끌어안고 싶은 내 마음은 끝간 데 없지만, 내 몸은 하나인지라, 아무리 사랑해주고 베풀어주고, 이해시키고, 나누어줘도 자매에게는 택도 없는 반쪽짜리 사랑이다. 아이가 하나일 때 전체 파이는 작았을지라도 온전한 모양이었던 사랑이 별안간 둘째의 등장으로 그 모양이 이그러진다. 사랑의 총량이 늘었는데도 사랑의 효율은 오히려 줄어든, 명백한 규모의 불경제라 할 만하다.


내가 우리집 자매를 키우고 관찰하면서 느낀게, 두어가지 정도 된다. 첫번째는, 서로 상대방의 떡을 더 크게 보고있다는 점이다. 첫째는 6세까지는 언니든 동생이든 아무런 생각이 없더니 동생이 태어나고부터는 나한테 언니를 낳아달라고 조르기 시작했다. 반대로 태어날 때부터 언니가 있었던 둘째는 태어나서 줄곧 자신도 여동생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노래를 부른다. 스스로 본인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고 판단하는 한편, 상대방에게는 불만을 품고 있는게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언니인 아이는 언니를, 동생인 아이는 동생을 원할 수가 있을까. 완벽한 동상이몽이지만 한편으로 자신의 동기간을 마음에 안들어한다는 점에서 어쩌면 그리 의견이 일치하는지 이런 걸 두고 자매는 닮는다고 하는걸까.


두번째는, 둘은 같은 공간에 놓여져 있을 뿐, 공유하는 세계관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그저 각자의 세계속에 살고 있다는 점이다.그건 아마도 여섯살이라는 나이차이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계획에 없이 갑자기 둘째가 찾아오는 바람에 터울같은 게 계산되었을 리 없다. 같이 공부를 하라고 앉혀놓아도, 영화를 보여주려 티비를 켜도, 내가 잠깐 집을 비우고 외출을 하려해도 둘은 같이할 수 있는 게 없다. 첫째는 타의적으로 엄마노릇을 떠맡아서 불만이고, 둘째는 아무래도 엄마에는 못미치는 언니의 보살핌이 불만이다. 놀라운 것은 여섯살이라는 나이차이는 밥을 6,570끼나 더 먹었을 만큼 성장과정에서는 같이 할 수 있는게 단 하나도 없을만큼 실로 큰데, 더 놀라운 것은 싸울 때만큼 나이차이가 딱히 안느껴지는 순간도 없다는 점이다. 열세살은 일곱살이 되고 일곱살은 열세살이 되어서 조근조근 서로를 저주하는 자매를 보면, 나는 깜냥도 안되는 주제에 어쩌자고 둘이나 낳아서 키우고 있는가, 하는 생각을 안할 수가 없다. 그런 순간 나도 친구 어머니의 마음이 된다.


생각이 생각에 꼬리를 물다보면, 근원적인 물음에 이르른다. 둘은 커서 높은 확률로 좋은 배우자를 만나 각자 가정을 꾸릴 것이고, 출산을 할 것이다, 그럼 자매말고도 이 험한 세상에 본인의 피붙이가 하나쯤은 생길 것이다, 부모가 죽는 일은 분명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이지만, 또한 누구나 겪을 수밖에 없는 ‘단 한번의’ 슬픔이다, 단 한번의 슬픔을 같이 짊어지게 만들어주고자 내 일평생을 오롯이 육아에 투자하는 게 맞는 걸일까, 15년 가량을 육체적인 육아의 상태에 있었던 내가 키워낸 자매는 서로를 거부한다, 둘 다 자매가 싫다고 노래를 부른다면 내가 어린시절부터 꿈꿔오던 자매의 로망이란 한낱 허상이었던걸까, 에까지 생각이 미친다. 자매의 정체란 대체 뭘까. 그녀들의 생태계는 대체 어떤 설명이 가능할까.


비교적 최근 언젠가는 이런 일이 있었다. 둘째가 놀이터에서 놀다가 조금 연배가 높은 아이와 투닥대는 걸 마침 학교에서 돌아오던 첫째가 봤다. 놀이터 벤치에서 다른 아이 엄마와 이야기하느라 내가 놓친 장면이었다. 첫째는 득달같이 달려가 너 누군데 내동생한테 시비를 거냐며, 한번만 더 그러면 참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고는 둘째 손을 잡고 나에게로 데려왔다. “엄마가 둘째를 데리고 왔으면 잘 보고 있어야지. 다른애들이 시비걸게 내버려두면 어떡해!” 라며 나를 가르치는 첫째. 이런 현상(?)은 둘째에게서도 나타난다. 티비에 예쁜 소녀나 아이돌이 나올때마다 “우리 첫째가 이렇게 크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 얘기하는 나를 보면 늘 둘째는, “우리언니가 더 예쁜데?” 라고 얘길해서 나를 마치 첫째가 아이돌보다 안 예쁘다는걸 공식적으로 인정한 엄마를 만들어버린다. 욕을 해도 내가 하고, 칭찬을 해도 내가 해야지 남이 내 자매를 건드리는 건 나에 대한 도전과 다름없으니 참을 수가 없는 알다가도 모르겠는 자매의 세계.


이 아이들 사이에서 취해야할 나의 포지션과 태도는 매일 바뀌고 나는 자매를 키우는 데 그어떤 확신도 계획도 없다. 다만 나에게 믿는 구석이 하나 있다면, 그시절 칼을 들고 옥상으로 올라갔던 연년생 자매 둘은 머쓱한 얼굴로 나란히 앉아서 엄마의 화가 식기만을 기다렸다가 같이 내려왔고, 지금은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는 점이다. 둘은 몇 달 차이로 결혼을 했고, 조카가 생겼으며, 서로의 옆동네로 이사를 했다. 내가 지켜본 그 둘은, 저들에게 둘 이상의 인간관계가 더 필요하겠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거의 대부분의 일들과 생활들이 둘로 가능하다. 밥먹고, 영화보고, 육아하고, 쇼핑하고, 장을 보는 일상적인 일들에서 자매끼리만 가능한 남편 욕에, 동기간만 가능한 효도와 자식노릇의 분배까지, 그들에게 넘나들지 못할 부분이나, 성역없는 대화는 없었다. 누가 봐도 요상할 정도로 사이가 가깝고 친한 남동생과 나이지만 성이 다르다는 건, 명확한 한계가 있는 법이다. 자매가 부럽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부모는 자신의 육아관을 자식에게 투영한다. 자신의 어린시절에 싫었던 점은 죽어라 피하려 하고, 갈구했던 점은 자식에게 어떻게든 해주려고 한다. 남편을 보면 딱히 아이들을 세심하게 챙기는 성격이 아닌데, 용돈만은 떨어지기 전에, 아이가 말하지 않아도 챙겨주려 한다. 밤늦은 귀가를 하거나 술을 한 잔 마셨을 때는 양손에 가득 간식거리를 사들고 돌아온다. 그는 어린시절, 누구보다 용돈이 필요했고, 간식보따리를 선물해주는 아빠를 둔 아이들을 부러워했었다고 한다. 나의 경우엔, 어린시절부터 엄마에게 자매와, 실제로는 없는 이모의 존재에 대해  끊임없이 들었었다. 엄마에게 여자형제가 없어서 엄마는 외로워했고, 나에게 이모를 만들어주지 못해서 외할머니는 안타까워했다. 엄마는 나와 남동생, 우리남매를 끔찍이도 사랑하고 아꼈지만, 그와 별개로 나한테 언니나 여동생이라도 하나 더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지에 관해 자주 얘기했다. 외할머니는 우리엄마를 볼때마다 내가 너 안낳았으면 어쩔뻔 했을지에 관해 얘기했고 그럴때마다 엄마를 제외한 나머지 외삼촌들의 쓸모란 무엇일까에 대해 어린 나는 자주 생각했었다. 정작 이모를 가진 적이없던 나는, 이모의 정체를 모르고, 자매대신 남매로 나는 행복했었는데도 그랬다.  


우리엄마는 요즘에도 우리집에 놀러오시거나 우리를 만나면 십분이 멀다하고 서로를 미워하는 자매를 보면서도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니는 을매나 좋노, 딸이 둘이라서. 내는 하나라서 이거라도 없었으면 우쨌을꼬 싶은데도 쪼매 부족하네. 이쁘게 키우모 난주 여행도 같이 다니고 쇼핑도 다니고 좋을끼다.” 오늘이 당장 괴로운데, 그 난주란 언제일 것이며, 오기는 오는 것이냐고 엄마한테 지청구를 하지만 나도 알고 있다. 그녀들은 이미 자매인 것으로 나에게 일평생의 효도를 다했다는 것을 말이다. 우리 외할머니가 못 이루고도, 엄마에 걸쳐 못이룬 그 로망, 본인들는 자매이며 나를 자매엄마로 살게 해준 내 첫째와 둘째에게 무한히 감사한다. 첫째는 첫째대로 나에게 밖에서 자식에 대해 생각할 때 먼저 떠오르는 내 첫 내새끼다. 늘 대견하고 기특하고 미안한 내 첫아기. 둘째는 살아남느라 안쓰럽고, 짠하고, 귀여운 내 마지막 아기라서 그 모습대로 사랑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대체 이 보잘것없는 내가 뭐라고, 조건없이 나를 사랑해주고 내 사랑을 매일같이 원하는 이 두 아이중에 하나라도 억울한 아이가 생기지 않게 하는 것, 완전하지 않을지라도, 내가 가진 모든 사랑을 빚어 내어주는 것, 그게 아무런 의도와 계획없이 이 세상에 찾아온 두 아이에 대한 내 할일이다. 자매로서의 생태계를 가꾸는 건, 애써 내가 정의내리지 않아도, 역할붙여주지 않아도 될, 그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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