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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rden Jul 28. 2024

내가 비롯된 곳 1

엄마-첫번째 이야기

엄마, 하고 입으로 소리를 내어 부르면 나는 하교후 등을 둥그렇게 말고 거실을 등지고 베란다를 향해 앉아 신문을 보고 있는 엄마, 그 장면으로 어김없이 돌아가곤 한다. 엄마는 등을 말고 곧추세운 두 종아리 사이로 얼굴을 밀어넣고는 손으로 짚어가며 신문의 정치면이나 주식동향을 봤다. 그게 아니면 김에 들기름을 바르고 굽고 있거나 베란다에 즐비한 화분들의 웃자란 잎들을 다듬고 분갈이를 하고 있었다. 그것도 아니라면 아이들을 가르치는 데 쓸 자료를 갈무리하고 있었다. 모두 같은 자세를 하고서였다. 엄마는 그런 자세로 하루종일 무언가를 했다. 나는 집에 들어서며 엄마의 굽을 등을 보고 안전과 평화, 하루의 안도감 같은 것들을 느껴왔던 것 같다.


‘옷’ 이 입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는 걸 엄마한테 배웠다. 엄마역시 옷순이였으므로, 오랜 시간에 걸쳐 집요하게 당신도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 나에게 그걸 가르쳐왔다. 나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처음만나는 자리나 돋보이고 싶은 자리에서 돈냄새나고 가진 것 있는 사람으로 보이는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이 옷이란 걸 엄마가 옷을 입는 방식으로 알게 되었고, 거기에 허영이나 사치가 없다고는 못하겠어서 지금도 우리 네 가족이 사시사철 옷더미 속에서 지내는 건지도 모르겠다.


옷으로 허영심을 채우려던 나와 나의 내면, 그러니까 목소리도 크고 욱하는 한편, 웃음도 헤프고 눈물또한 많은 내 성정은 모조리라고 말해도 무리가 없을만큼 전부 엄마로부터 왔다. 예금 이자가 20%에 이르르던 시기, 200만원을 떼먹은 놈을 찾아가 기어이 돈대신 삼익피아노라도 받아올만큼 악착같았지만, 옆집 앞집 뒷집 사람들과는 상추 한 장이라도 나눠먹어야 했던 사람, 하루종일 육아, 가사, 노동에 시달려 짙은 피로가 드리운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해가 깔딱깔딱 넘어가는 저녁, 가족들에게  먹일 수제비 반죽으로 내게 곰돌이며 토끼같은 걸 만들어줄만큼 다정하던 사람. 10원 한장까지 가계부와 빚에 적어 넣을만큼 돈과 계산에 밝았지만 가을에는 이유도 없이 울적해지고 눈물이 잦던 사람, 그게 엄마였다. 나는 거기에서 정확히 ‘돈과 계산에 밝은’ 부분만을 빼고 엄마를 쏙 빼닮았다.


그 점때문에 나는 나를 '엄마와는 다르게' 낙천적이고 천하태평하며 긍정적인 사람이라고 착각하며 살아왔다. 결혼을 하고, 출산을 하며 여느 아줌마들처럼 나이들어가면서 알게되었다. 내가 태생이 그랬던게 아니라 우리엄마가 있는 힘을 다해, 온몸으로 세상의 풍파와 굴곡, 삶의 모나고 뾰족한 부분들을 막아주었기때문에 인생의 쓴맛이 뭔지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 말이다. 나는 안온하고 뽀송한 요가 깔린 자리를 세상으로 알고 자라났다. 대출이 안나올까 걱정을 하면서, 회사에서 나이와 직급으로 무시를 당해보면서, 아이들이 크면서 크고 작게 아팠을 때, 남편회사가 위기에 놓였을 때 비로소 나는 이제는 내가 내 온몸으로 내 가정과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우리엄마가 그러했던 것처럼 삶의 모나고 뾰족한 부분과 세상의 풍파와 굴곡에 맞서야 하고 그럴때 낙천이나 태평은 힘이 없다는 사실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게 되었다.  


평생 교사의 아내로 살아온 엄마의 스케일은, 실제의 경제적 여력과의 괴리가 실로 컸고 엄마는 그 간극을 ‘교양’ 으로 메우며 살았다. 한때 본인도 교사였고, 그 시절 드물었던 여자 교장선생님을 꿈꾸던 엄마가 뱃속의 나를 지키기 위해 많은 걸 포기하면서도  자존심을 지키는 길이었을 것이다. 지독한 마산 사투리로 “슨배님” 이나 “스앵님(선생님)” 하고 말할 때와 “이 양바이(양반이) 웃기는 양바이네” 라고 말할 때 나는 엄마가 이 사람을 존중하는지, 얕보고 있는지를 알았고,  나의 방식 또한 엄마랑 비슷해서 나는 사람과 때를 지나치게 가리는 교양은 실은 하수의 방법임을 어른이 되고나서 알았다. 곳간에서 인심나고,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법이라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교양넘치기란, 실은 엄마의 삶에서 쉽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그렇다고 엄마가 교양만으로 모든 걸 커버하며 공무원 아내로서의 삶에 안주하면서 주어진대로 살았다는 뜻은 아니다. 엄마는 나와 동생이 초등학교에 다니고나서부터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동네의 많은 초등학생들은 우리집에 무시로 드나들었다. 그래서 한때는 아빠보다 훨씬 많은 돈을 벌었으며 나와 내 동생은 사립 기숙 고등학교엘 다닐 수 있었다. 우리집은 엄마의 총괄 아래 총 열여덟 번의 이사를 감행(?)했고 비로소 새로 지어진 그동네에서 제일 좋다던 마지막 아파트에 이르렀을때 이사를 며칠 앞두고 밤마다 엄마는 그 집을 찾았다. 나는 엄마가 좋아하는 모습이 그저 좋아서 밤마다 같이 엄마를 따라나섰는데 그 집에서 가서 하는 일이랄건 딱히 없었고 쓴데 또 쓸고 닦은 데 또 닦고 "와이리 좋노" 라며 바닥에 드러눕는게 전부였다. 어깨춤이라도 출듯 흥청거리던  엄마의 기쁜 목소리와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때 엄마의 나이가 지금 딱 내 나이와 같다.


엄마는 나를 가지고 낳기위해 많은 걸 포기했던만큼 나에게 거는 기대도 남달랐고, 나는 그 기대를 먹고 무럭무럭 자랐다. 그 기대안에는 끝간 데없는 칭찬과 맹신도 같이 있었는데 그래서 나는 '쥐뿔도 가진게 없으면서 당당한' 태도로 삶에 임할 수 있었다. 그 근거없는 자신감은 때로는 독이었지만, 대부분은 나를 적절히 격려하고 응원하는 방식으로 사용됐고 나는 학창시절이든 사회생활이든 남에게 밀리지않고 두다리로 야무지게 버티고 서있을 수 있었다. 두 다리로 버티면서 알게된 건, 80년대에 태어난 여자아이들 대부분이 부모님에게 얼마간은 남자형제들과 차별을 당하면서 성장했다는 사실이었다. 학용품이나 문구처럼 사소한 것부터 학원, 과외에 이르기까지 많은 걸 남동생에게 배려받고 누린 첫째였던 나로서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만큼 나는 남녀가 차별을 노골적으로 받던 시기에도 그런 분위기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채 엄마가 포기한 것들에 대한 기대를 모두 한데 담아 빚은 존재였으니, 우리엄마에게는 미안하지만 엄마가 빚어낸 건 졸작이었다고 밖에 말할 길이 없다.  엄마의 기대를 먹고 무럭무럭 자란 나는 그렇고 그런 어른이 되었다.



PS) 나를 둘러싼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일기처럼 써보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은 당연히 엄마였는데도 쉽게 쓸 수가 없었던 건 마치, 내가 세계나 우주에 관해 한마디로 정의내릴 수 없는 이유와 같다. 또 한편, 언제고 내가 읽었던 수많은 엄마에 관련된 글들처럼 괜한 눈물을 강요하거나, 되도않을 감동을 주입하지 않길 바라고 보니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해 도돌이표만을 찍고 있었다. 해서, 몇번에 걸쳐도 다 하지 못할 이야기와 담지못할 마음이니까 오히려 떠오르는 대로 흐르는대로 ’아무렇게나‘ 써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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