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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rden Jun 09. 2024

아빠의 환생

아빠에게 첫손녀란,

아빠가 극진히도 나를 사랑했다는 사실을 나는 한결같은 타인의 증언들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남동생은 아빠가 지독하게 누나만 편했다며 틈만나면 차별받은 자신의 처지를 사건별로 차근차근 기억하고 털어놓고는 했다. 엄마는 눈이오나 비가오나, 멀든 가깝든, 일러도 늦어도 나를 데려다줘야하는 일이라면 언제든 어디든 달려가는 아빠를 보며 저게 딸에 눈먼 딸바보가 아니면 무엇일까에 대해 생각했었다고 한다. 아빠없이 자란 남편은 우리아빠가 무관심과 집착 사이의 어디쯤에서 하는 나에 대한 심드렁해 보이면서도 집요한 구석이 있는 간섭과 참견을 보면서 아빠의 사랑이란 저런 것이구나, 를 느꼈었다고 했다. 그러니까 나만 아빠가 나를 사랑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또 나는 이제와서, 우리 첫째를 통해서 아빠가 나를 얼마나 사랑했을지, 에 대해 본다. 그리니까 첫째가 태어나기 전까지 나는 아빠가 나를 사랑한다고 직접적으로 느낀 적은 없었다. 그런게 바로 아빠와 나의 사이였다. 그리고 그 시절에는 대부분의 아빠들이 그러했다.


우리아빠는 예순넷의 나이에 첫 손녀를 갖게 되었다. 이 얘긴 예순넷에 아빠가 다시 태어났다는 얘기도 된다. 우리 첫째는 아무런 행위도 하지 않은 채로 할아버지의 환생을 이끌었으니 이정도면 우리 첫째와 둘째는 보물이라고 말하지않을 수가 없다(이전글 둘예찬 참고) 언젠가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자녀보다 손자 손녀를 더 예뻐하는 이유는 당신들이 자녀들을 키우면서 얼마나 힘들었는가를 손주 손녀들이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라는 얘길 들은 적이 있다. 손자손녀들이 자식들에게 본인의 복수(?)를 대신해주는걸 보면서 안쓰러움과 쾌감 사이의 어디에 위치한 간지러운 곳을 은근한 듯 긁어주어서일 것이다. 나도 첨엔 첫째에 대한 우리아빠의 사랑이 그런 감정일 거라 지레짐작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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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틈틈이 아빠가 첫째의 통장에 용돈을 넣어주고 계시단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액수는 적게는 3만원부터 많게는 10만원정도까지, 날짜를 확인하니 어린이날 전날, 크리스마스 즈음, 첫째의 생일 등등 특별한 날 넣으신 것 같았다. 매번은 아니라도 아이들의 기념일이면 주말이나 휴일에 분명 만났었는데도 그랬다. 인터넷뱅킹이든 모바일뱅킹이든 전혀 하시지않는(할줄모르는) 아빠는 분명 은행 창구에 가서 돋보기를 쓰고 첫째의 계좌번호를 적고 직원을 통해서 송금을 하고 통장에 찍힌 금액과 받는 사람의 이름을 직원을 통해 재차 삼차 확인하고서야 안심하고 집으로 돌아오셨을 것이었다.

평생 교직에 계셨던 보수적인 꼰대 선생님, 지독한 가난을 짊어진 6남매중 장남. 돈을 버는 액수는 정해져 있어 더 벌 수 없지만 나가는 액수는 본인이 컨트롤할 수 있다며 버는 수완은 없지만 아끼는 수완 하나만큼은 기가 막혔던 우리아빠. 나는 그래서 아빠한테 필요한 것 이외의 용돈을 받아본 적이 없다. 술취한 아빠들의 특권인 좋은 기분에 귀가해 자식들에게 용돈 흩뿌리기같은 것도 물론 없었고, 퇴근길에 손에 간식이나 통닭같은 게 들려있는 것도 몇 번 본 적이 없다. 내가 아빠에게 크게 받은 거의 유일한 용돈이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고나서 받은 백만원이었다. 엄마한테 드린 생일선물이라고도 평생 30만원을 넘겨본 적이 없는 사람. 우리아빠는 평생 스케일이 그정도인 사람이다. 하지만 그 모든게 다 아무렇지도 않은 이유는 아빠는 누구보다도 본인에게 인색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한달 용돈이 20만원을 넘겨본 적이 없는 분, 왕복 1시간 이내의 거리는 걸어다니시는 분, 집에서 드시는 웬만한 채소는 직접 농사짓고 수확해서 드시는 분, 뭐든 한 번 사면 수명을 다하고도 제발 보내달라고 물건이 아우성칠 때까지 쓰는 분. 절약봇, 절약기계,절약AI. 그게 바로 우리 아빠였기에 나는 아빠가 용돈을 주시지 않는 걸 원망한 적도, 그걸로 아빠에게 섭섭해본 적도 없다.

그런  우리아빠가 첫째에게 애정공세를 퍼붓는 방식에 통장에 꾸준히 소액을 입금하시는 것 말고도 한가지가 더 있었는데 그건 여행지에서  특산품를 사오는 것이었다. 우리식으로 따지면 속초에서 만석닭강정을, 대전에서 성심당 빵을, 제주에서는 제주신라에 팝업스토어를 연 샤넬을 사오는것(여기가 웨이팅도 짧고 물건도 많다고 한다.)과 같다고 할까. 아빠의 공식대로 아빠는 공주에서 금동대향로 미니어처를, 백두산에서 광개토대왕릉비 모형을, 미국에선 네이티브 인디언들이 수작업으로 만든 가죽가방을 사오셨다. 그런걸 첫째가 좋아할 리가.

아빠에게 돈을 쓴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아는 나는 그래서 아빠가 첫째를 생각하고, 은행에 직접 가서 송금을 하는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일지 감히 짐작이 안간다. 얼마나 큰 마음을 먹어야 할지, 낯선 여행지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손녀의 얼굴이 어떤 의미일지, 그걸 선뜻 사고 손녀에게 내줄때 그 안에 얼마나 큰 사랑이 들어있을지를 아빠가 살아온 시절 속에서 본다.    

아빠는 나에게 입버릇처럼 "내가 만약 너처럼 이렇게 부모의 든든한 지원을 받았으면 나는 더 크고 훌륭한 사람이 되었을 거다. 복에 겨워서는 쯧쯧" 라고 말씀하셨었다. 크는 내내 나는 이얘길 아빠에게 듣고 자랐다. 그런데 이렇다저렇다 말씀도 없이 손녀에게 그저 마음을 보내온 걸 보니, 자식에 대한 사랑은 조건이랄지, 보상이랄지, 생색이랄지 그런 불순물이 조금은 섞여있지만 손녀에 대한 사랑은 아예 조건이 없는, 그저 무조건적이기만한 순도 100%의 그런 사랑인가보았다. 그 돈이 이제 제법 액수가 쌓여있지만 태어나서 딱히 부족한 것이 없는 물질의 풍년속에 사는 요즘 아이들답게 첫째는 딱히 관심도 욕심도 없다.

몇년 전 언젠가는 첫째가 친구들과 하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첫째는 본인의 친구들에게 할아버지를 농부라고 소개하고 있었다. 순간 저항없이 박장대소한 나를 빤히 쳐다보던 첫째. 할아버지가 정년퇴임한 뒤에 태어난 첫째에게 할아버지는 그저,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밭에 가는 농부였을 것이다. 첫째는 그 농사란 것에도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무관심으로 일관했는데, 할아버지는 방울토마토며, 오디, 옥수수 , 감자 등 첫째가 그걸 맛있게 먹는게 마치 본인의 일방적인 구애에 대한 대답이라도 되듯 신이나서 더 심어 제꼈고, 본격적이고도 전문적으로 농사에 임하셨다. 엄마가 징글징글하다고 농사파업 선언을 하기 전까지 아빠는 정말 유사농부였다.

여기까지도 아빠는 많이 달라졌는데, 이 사람은 정녕 우리 아빠가 아닐수도 있겠다, 정말 누군가가 갑자기 환생을 한 것일수도 있겠다, 생각하게 된 건 아빠가 나한테 전화를 걸어오고 기어코 엄마에게 사랑한다, 고맙다는 말까지 하게 되었을 때다. 보통 아빠와 나는 엄마를 통해 연락하는 사이였다. 엄마가 아니면 딱히 연락을 주고받지않고 궁금해하지도 않는. 그런데 첫째가 태어나서부터는 실시간으로 첫째의 안부가 너무 궁금하고 보고싶은데 그때마다 엄마를 통해서 안부를 확인하려니 여간 걸리적거리는데 아니었테니, '아마도' 용기를 내서 직접 나에게 연락을 시도했을 것이고 원래 처음이 어렵지 두번째 세번째부터는 더 쉬워지는거라 ‘아마도’ 연락을 자연스럽게 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나의 육아에 찌들어있는 모습, 퀭하고 힘들어하는 모습, 남편이 야근에 주말까지 일하자 독박육아에 빠져 시들어가는 모습도 본의아니게 보게되었고, 아마 그게 나를 홀로 키웠을 엄마를 떠올리게 했나보았다. 젊은 시절 자신이 외롭게 만들었을 아내, 잘 자라(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자라긴 자라) 결혼에 이르고 엄마가 된 내가 엄마인생의 마지막 출품작닽다는 생각을 하게되자 비로소 그런 아내에 대한 고마움과 사랑을 말로 소리내어 표현하게 된 우리아빠. 아빤 정말 다시 태어났고, 다른사람이 되었다. 아빠나이 칠십에, 첫째가 이루어낸 쾌거였다.

우리아빠는 첫째를 그렇게 사랑했다.  누군가의 인생을 통틀어 '처음' 이자 '가장'과 같은  방점을 찍은 이들은 본인이 얼마나 복된 존재인지 알까. 첫째는 할아버지 인생에서 유일하게 사랑한다는 표현을 낭비한 존재다. 사랑이란 낭비하고 막 쓸수록 더 많이 고이는 것이지 결코 시들거나 고갈되는 것이 아님을 아빠는 첫째에게 배웠다. 그래서 아빠는 첫째를 통해 나와 엄마에게도 더커진 사랑을 비로소 입으로 소리내고 눈으로 보여주어 나눠줄 수 있었다. 엄마와 나는 첫째를 향한 아빠 사랑의 의외의 수혜자들이었다. 거기에 얼마나 진심을 다한 사랑이 들어있는지 나로서는 감히 작도 할 수 없다.

그럼 여기서 궁금증이 하나 생기는데, 할아버지를 농부로 기억하고 있는 첫째의 할아버지에 대한 마음이란건 어떨까.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첫째는 할아버지에게 별다른 마음이 없다. 어버이날에 전화도 드리고, 할아버지의 어설픈 카톡에 답장도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효도’ 라는 의무감이 섞인 감정이지 무조건적이고 애틋한 사랑은 아닐 것이다. 고마움과 사랑이 엄연히 다른 이유다. 하지만 그어떤 첫째의 심드렁한 리액션에도 개의치않고, 주눅들지않는 할아버지의 지독한 사랑. 끊임없을 짝사랑. 난 그 사랑이 정말 경이롭다.

아마 첫째가 태어난 순간부터 숨쉬듯 봐온게  할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사랑일테니 그게 어떤건지는 사라져보기 전에는 알 수가 없을터. 너무 멀리 살아서 방학때나 명절때에만 잠깐씩 볼 수 있었던 우리 외할아버지는 내가 얼마나 예쁘셨으러나. 방학때 내려가면 매번 무릎앞에서 당신이 밥을 떠먹여주셨던, 나를 경운기 뒤에 태우고 온 마을을 구경시켜주시던, 그런 마음들이 지금의 우리아빠의 마음과 닮았을지 떠올려본다. 언제고 사랑을 받는 데에만 익숙한 첫째를 보면 불현듯 고3때 돌아가셔 마음껏 슬퍼하지도 못했던 나의 외할아버지가 너무 그리워지고 그 그리움에 죄송함이 없다고는 못하겠다. 그렇게 가끔봤는데도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아이러니하게도 할아버지는 당신의 사랑을 나한테 증명해보이셨다. 첫째도 아마 그럴 것이다. 나역시 한번도 잃어본 적 없는 게 또 우리아빠의 사랑과 관심이다. 늘 거기, 등을 돌리지도, 달아나버리지도, 모습을 바꾸지도 않은 채로 붙박여 있는 아빠.

그래서 아빠,

일흔여섯의 생신을 앞두고
앞으로도 물처럼 공기처럼 손녀옆에, 딸옆에 오래 머물러주시길.
받아본 적 없는(솔직히 기대 안되지만) 경주와 안동, 이제는 멀리 독일과 영국의 특산품도 앞으로 계속 사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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