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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rden May 08. 2024

이런 이별도 있다.

어머님과 나의 이별에 대하여

우리 어머님은 제작년 12월, 그러니까 내 생일이 있던 달에 돌아가셨다. 어머님과 나의 서사야 여느 고부간처럼 12년여의 결혼생활만큼이나 굽이굽이 흐르고 넘치는 것이겠으나 이상하게 나는 모든 이야기를 생략한 채, 자꾸만 어머님을 처음 만났던 그날로 돌아갔다. 첫 만남부터 그저 할머니 같아서 이 얘기 저 얘기 내 얘기는 다 들어주셨던 그런 어머님의 모습만 기억에 남기려 하는데, 그건 내 의도가 아니라 정말로 그 모습만이 기억에 남아서였다.


내 생일에 어머님의 발인이 있었던 탓에 주변 지인들은 조의와 축하의 중간에 애매하게 발을 걸친 채 우왕좌왕했었다고 한다. 나는 생애최초로 여러 사람들에게서 다양한 방식으로 위로와 축하를 동시에 받는 기이한 경험을 했고 덕분에 나는 평생을 우리 어머님의 기일과 발인을 절대로 잊을 수 없는 며느리가 되었다.

주변에서는 어머님이 떠나시면서 나에게 큰 선물을 주고 가셨다거나, 태어나서 받는 가장 큰 선물 아니냐는 말들을 주로 '며느리'의 입장에 있거나 있었던 사람들이 해왔다.  그 말에 어떠한 악의가 있지 않다는 것을 누구보다 나는 잘 안다. 긴 병 앞에 효자 없다고 당뇨를 오래 앓고 계셨던 어머님이 서울 큰 병원에 오시고 싶다고 하셨을 때 나는 병상에서 어머님이 오랜 시간을 보내게 될까 봐, 그래서 내 얕은 효심과 작은 그릇이 시험에 들게 될까 봐 자못 두려웠었다. 그렇지만 어머님은 서울에 올라오신 지 한 달여 만에, 당뇨로 인한 혈관협착 수술은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상치 못한 폐렴으로 돌아가셨다. 그런 일련의 과정들과, 그 과정에서 내가 어떻게 했는지 잘 아는 지인들이 나 고생할까 봐 어머님이 좋은 날 받아서 가셨다며 건네온 얘기들이었을 것이었다. 시험에 들지 못한 그 효심은 그러나 내 마음속에서만큼은 갚을 수도 없고 해소할 수도 없는 죄책감으로 남았다. 영영 어찌해 볼 수 없는 마음이 되었다.


한편, 남편은 그게 정확히 언제지는 몰라도 어머님이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사실과, 우리와 어머님이 지낼 날이 얼마 안 남았다는 사실을 자꾸만 인식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평생을 귀찮아서 아들 집에도 잘 놀러 오지 않았던 당신이 부여에 있는 고란사엘 뜬금없이 가보고 싶다고 했던 이야기, 낡은 어머님 장롱 위에 아무렇게나 보관된 2천만 원가량을 연락이 끊긴 지 오래돼 나는 결혼생활 12년 동안 한 번도 보지 못한 당신의 딸에게 주고 싶다고 했던 이야기들 속에서 남편은 평소와 달라도 많이 달라진 어머님을 느꼈고, 그렇게 조금씩 마음의 준비를 했던 것 같다. 그가 어머님을 보내드리는 길에 크게 운 건, 목포로 내려갈 준비를 하던 새벽 샤워실에서 들려오던 꺼억 꺼억 소리가 마지막이었다.


남편의 배려로 어머님의 삶과 인생을 정리하는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 나는 라한호텔에서 지낼 수 있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장례식장보다 호텔에서 나는 더 많이 울었고, 조용히 울고 나면 신기하리만치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 때문 일지, 장지가 멀어 대부분의 내 친구들은 못 왔지만 그래도 그 먼 길을 오로지 나 하나 때문에 와준 몇몇의 친구들에게 나는 목포의 상징 중에 하나인 평화광장에서 커피를 대접해서 보낼 마음의 여유가 있었다. 애도의 기간 동안 나는 다른 세계에 속한 사람이었지만 실은 누구보다 현실에 발을 디디고 있는 사람이라는 걸 친구들과의 짧은 만남으로도 느낄 수 있을 만큼 내 마음은 차분하고 정갈했다.


남편은 로또도 샀다. 가족의 죽음과 로또, 어쩌면 불경해 보일 수 있는 이 조합이 나는  가장 근거리에서 남편을 지켜봐 온 사람으로 감히 '할 만큼 한 자의' 이별 방법일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됐다. 부모는 생을 마감할 때 가장 자신에게 잘했던 자식의 꿈에 찾아간다고 하던데 우리 어머님은 돌아가시기 1시간 전 남편의 꿈에 찾아왔고 밑도끝도없이  몇몇 번호를 불러주셨다고 한다. 그 얘길 듣고 내가 조금도 놀라지 않았던 건 정말 그럴만해서였다. 고등학교 시절까지 학원 한번 다니지 않고 일류대에 입학한 아들, 첫 직장을 잡자마자 마이너스 통장으로 어머님 전셋집을 마련해 드리고 총각 시절부터 어머님에게 매달 생활비를 드린 유일한 자식, 그게 그였다. 조금더 크거나 조금더 좋은 집으로  이사를 갈 때마다 손사래를 치며 마다하는 어머님을 억지로라도 모시고 와서 성공한 아들을 둔 부모역할에 흠뻑 취할 수 있게 해 준 이도 남편이었다. 마지막으로 서울의 큰 병원에서 수술을 받게 해 드리고 곁을 지켰으며 목포로 내려보내드린 것도 포함이다. 물론 로또 번호는 하나도 들어맞질 않았지만 우리는, 아니 남편은 어쨌든 '할 만큼 한' 효자였다.


어머님이 비로소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허락을 맡는 그 절차, 서류 한 장으로 어머님이 저 너머의 세상으로 가셨다고 현실에 흔적을 남기기까지, 우리는 때론 슬픔에 잠기고 엄숙했으며, 때로는 웃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무너질 듯 슬프지도, 날아갈 듯 가볍지도 않았고 그저 하루하루 충실히 따랐을 뿐이었다.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흘러가는 그대로의 이별이었다. 어머님을 그곳에 남겨둔 채 서울로 올라와서 지금까지, 어머님과 남편의 도시 목포가 나에게 따뜻하고 노곤한 곳으로 남은 것도 그때문일까. 지금끔은 무방비상태인 채로 불현듯 어머님이 보고 싶어 때로는 당황스럽고 또 때로는 황당한 마음이 되기도 한다.


그때의 내 마음과는 전혀 별개로 올라오는 길에 남편은 뜻밖의 이야기를 했다.

"나 이제 더 이상 목포에 안 가도 돼!"

그곳에서 태어났고 자란, 유년을 비롯한 한 시절이 고스란히 들어있는 애틋한 고향의 어떤 것들이 그의 발목을 이리도 옭아매고 있었던 걸까, 효자노릇을 묵묵히 하는 동안 그의 마음 안에는 어떠한 생각들이 똬리를 틀고 있었을까. 애증이라는 말로 갈음할 수 있을까. 지긋지긋한 동네라는 간단한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감정일까. 그와는 다른 테두리 안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부모를 아직 여의어본 적 없는 내가 감히 짐작할 수 없는 마음일 것이다. 설령 그 마음들이 내가 죽을 때까지 이해할 수 없는 것들 이래도 나는 받아들이기로 한다.  그에게는 이것이, 어머님을 보내드리고 온전한 어른으로 혼자서는 이별의 방식일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렇게 어머님과 헤어졌다. 많이 봐도 1년에 2번이었던 어머님이어서인지 아직도 실감이 잘 나지않아 우리는 여전히 헤어지는 중이지만 이대로 담담하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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