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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rden Oct 06. 2024

전생을 건너온 아이

-아니 하루아침에 그렇게 끊어버리면 어떡해? 적응할 시간은 줘야지. 서서히 줄여가다가 끊으면 되잖아!!


-원래 결심이 섰으면 단칼에 끊어내야 돼. 엄마가 서서히 줄여가다가 끊은 사람은 본 적이 없어.


-엄마 매일 맥주 끊는다고 결심하던데 왜 하루만에 단칼에 못끊는거야?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거잖아.


-.......


13세, 6학년인 첫째는 요즘 사춘기가 마치 벼슬이라도 되는 양 아무데서나 날을 세우고 가자미눈을 뜨는데 내가 아무리 사춘기는 특권이 아니라 핸디캡이라고 얘길해도 그 말을 알아들을 리 없다. 머리가 굵어지고 나에게 맞서면서 들이대는 이유 또한 논리적이라 딱히 반박할 말이 없다는 게 문제다. 너도 어른되면 니 맘대로 하라는 꼰대전용 멘트는 안하고 싶다는 것 또한 문제라면 문제. 틈만 나면 핸드폰만 들여다보는 10대 딸은 주위의 많은 것들을 놓칠 것이다. 그래서 너를 둘러싼 주변의 아름다운 것들, 소중한 것들, 평범한 것들을 둘러보라는 의미로 내린 '평일 핸드폰 금지' 라는 조치를 첫째가 수긍할 리 만무하다.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당연하고, 이것만은 제발 건드리지 말아라, 하던 나의 유일한 낙인 맥주를 들먹이며 맞서는 이 상황. 아이의 가장 큰 즐거움을 제지하기 위해 나의 가장 큰 즐거움 역시 내려놔야 한다면 육아난이도 최상급이 아닐 수가 없다.


“엄마, 내가 앞장설테니까 엄마는 뒷장서!” 라는 말로 귀여움의 정점을 찍으며 두돌 전에 이미 평생할 효도를 다 끝낸 첫째는, 귀여움만이 아니더라도 정말 그 시절에 모든 효도를 끝냈다. 인생을 살다보면 누구에게나 전환점이라 해야할지, 변곡점이라 해야할지, 전과 후를 명확하게 가르는 사건이나 계기가 있게 마련이다. 나에겐 그게 바로 첫째와의 만남이었다. 만남이라고 하니, 무언가 다른 경로를 이야기해야할 것 같지만, 아니다. 출산 그거 얘기다.


그녀를 낳고나서 나는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너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인간이 살면서 남긴 행적이나 자취는 대체로 되돌리거나 바꿀 수가 있었다. 없던 일로 만들거나 취소하는 것이 가능했다. 무효, 변경, 취소, 삭제와 같은 단어나 행위들이 그 증거다. 자퇴, 사직, 이혼, 개명 과 같은 절차들이 그걸 가능케 했다. 하지만 출생은 절대 그럴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세상에 내놓았지만 이제 그렇게 나온 이상, 이 아이의 실체가 내 출산의 증명이었으므로 법과 행정의 테두리가 이 아이의 실존을 입증할 것이었다. 그 무게가 버겁고 무서웠던건지, 이제 죽을때까지 내 뇌리를 떠나지 않고 머무를 숙명에 대한 무게감때문인건지 산후조리원에서 나는 2주 내내 매일을 울었다. 돌이켜보면 그 때의 눈물이 그런 존재론적인 거창한 문제 때문은 아니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몇차례씩 젖소처럼 모유수유를 하는 내 모습이, 10월 말, 조리원 바깥 창문으로 은행잎이 뒤덮어가는 노란 거리에 노을이 내리며 한올의 찬바람이 휘-잉 불 때, 테라스가 있는 주점에서 소주 한 잔을 기울일 수 없게된 내 처지가 슬픈거였다.


왜 나에게 다들 출산의 경이로움만을 얘기해준건지, 왜 아무도 나에게 출산을 하고나면 회음부 방석을 한달도 넘게 깔고 앉아 있어야하는걸, 이물질과 노폐물이 한달도 넘게 몸에서 빠져나오느라 커다란 기저귀를 차고 있어야 하는걸, 모유수유를 하면 젖이 돌아서 짜내지 않으면 가슴부분이 젖는 것도 환장할 노릇인데 가슴이 돌덩이처럼 굳어와 닿기만 해도 아파서 울고 싶어지는걸, 그 무엇보다도 모유수유를  안해도 된다는얘기해주지 않은걸까. 왜 어른들은 부모가 되는 것의 경건한 마음만 기해준건지, 왜 똥도 마음대로 쌀 수가 없어진다는 걸, 애가 남긴 아무런 간 없이 밍밍한 밥이 내 주식이 된다는 걸, 그마저도 제 시간에 맞춰 먹을 수는 없다는 걸, 내가 하고싶고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이 아이의 일상 뒷전으로 밀려나야 한다는 걸 아무도 얘기해주지 않았는지, 누구한테 화를 내야할지 몰라서 누구라도 붙잡으면 곧장이라도 블같이 화를 내다가 엉엉 울 수 있을 것 같은 심정이었다. 모든 일들은 막을 수 없이 동시에 일어났고, 터진 둑에서 한꺼번에 밀러나온 물줄기처럼 내 생활에 들어와 모든 걸 전방위적으로 바꿔놓았다. 내가 상황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다. 생활을 바꾼 것이 아니다. 이를 키운 것이 아니다. 그건 어떻게든 받아들진 것이고 바꾸어진 것이고 키워진 것이었다. 자의로 한 것이 아니라 어쩔 수가 없이 그렇게 되어야 하니까 그렇게 되고있는 거였다. 거기에 내 의지란 없었다. 그 땐 시간을 되돌리고싶어서 매일 울었지만, 그 때 내가 눈물과 함께 흘려보낸 기억들은 홍수를 이루어 '전생' 이 되었다. 첫째가 태어나기 전의 내 인생은 전생과도 같았다. 그리고 첫째는 그렇게 아무런 의도없이 무해하게 나의 전생을 거슬러 나에게로 왔다. 그때 비로소 나는 현생, 그러니까 후반전의 삶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


어린시절, 엄마 다리에 머리를 대고 누워 올려다보는 엄마의 콧구멍은 강낭콩처럼 길죽했고 검고 깊은 우물처럼 유려한 곡선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검정 서리태처럼 동글동글한 내 콧구멍과 사뭇 다른엄마의 콧구멍을 보면서 나는 어른이 되면 내 콧구멍도 저런 모양이 되나보다, 생각했었다. 키가 나보다 10cm나 큰 엄마를 보면서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까지도 어른이 되면 나도 저 키를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고, 어른이 되면 엄마처럼 군것질을 끊게되는 것인줄 알았다. 미친년, 나쁜년같은 친구들에게 애칭으로 사용하던 욕마저 안하게 되고, 가뿐히 아침에 일어나서 식사를 준비하는 삶. '어른이 되면' 그렇게 살게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어른이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나의 어떤 기대나 바람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나는 줄곧 내가 어른이 되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 채 나이만 먹었고, 결혼을 했고 엉겁결에 아이엄마가 되었다.

 

2013년 초겨울, 그렇게 살던 나는 확실하고 뚜렷하게 자각했다. 내가 이제 어른이 되었다는 걸. 나에게 또 한번의 변곡점이 찾아왔다. 돌이 갓 지난 첫째를 재우던 밤 10시경의 일이다. 열이 있었고 칭얼대 해열제를 먹여 재우려는데 갑자기 고개가 뒤로 깔딲갈딱 넘어가며 숨을 못쉬는게 보였다. 눈알에 흰자위가 보이면서 경련을 시작했다. 곧 혀가 안으로 말리 입으로 하얗게 거품이 올라왔다. 팔다리가 심하게 떨리더니 나무토막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그러면서 아이가 정신을 잃는게 보였다. 아기띠로 내품에 안고 있던 작은 아기가 순식간에 변해가는데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고 할 수가 없었다. 119를 부르고 맨발에 슬리퍼, 잠옷바지 차림으로 차에 올라 병원까지 가며 무슨 정신이었는지는 자세히 기억나지 않는다.  이렇게 경기를 하는 아이가 다시 정상이 될 리 없다, 아이는 어딘가가 망가졌거나 아프게 될 것이다, 나는 그런 걸 지켜보며 아무것도 못했다, 그러므로 이 아이가 어떻게 되더라도 아무도 원망하지 않고 잘 키워낼 것이다, 두서없는 부정적인 생각들을 하며 응급실에 도착했다. 의사는 얘기했다. 이런 종류의 열성경련은 생각보다 흔하고, 아이가 혀를 깨물지 않는지만 봐줘도 되며, 걱정이 되면 뇌파검사를 해봐도 좋겠지만 그럴 필요는 없어보인다고 담담함일지 시큰둥함일지 모를 말투로 얘기해 주었다. 아이는 거짓말처럼 깨어나서 수액을 맞았다. 모든 상황이 종료된 뒤 야근중인 편은 뒤늦게 응급실에 도착했는데 아이의 경기보다 그렇게나 추위를 못견디는 내가 한여름 옷차림을 하고도 지나치게 아무렇지도 않아보여 더 놀랐다고 했다. 그 후로도 그녀는 4번의 열경기와 두어번의 입원 또 너댓번의 응급실과 십여차례의 수액을 맞고 크고 작은 병치레를 하며 초딩이 되었다. 아기들은 다들 그렇게 크는 줄 알았던 나에게 한번도 입원하지 않은 둘째를 보니, 다들 그렇게 크는게 아닌건 확실해 보인다. 그때 119를 타고 가면서 나는 어른이 되었다. 어떤 것도 두렵지 않고, 이 아이가 설사 아프게 되더라도 내가 지켜줘야겠다는 마음이 일말의  망설임없이 생겨나는 것, 8월말부터 수족냉증으로 고생을 하면서도 초겨울의 추위를 아무렇지 않게 맞서는 것, 내가 지켜줘야 할 목숨이 하나가 있다는 건 그런 의미였다. 그날 밤 그걸 깨달았다. 어른이 되고나서 나는 공포영화를 봐도 무섭지가 않았다. 진짜 어른이 되었다는 건 귀신보다 사람이 더 무서워지는거란 사실과 사람보다 내 아이가 잘못될 수도 있다는 것이 무서운 거란 걸 알게 는거였다


나는 타고난 술꾼답게 해빙이 시작되며 해가 길어지고 뺨을 스치는 바람을 차지만 한낮의 해가 따수운 계절, 땀비오듯 흘린뒤 샤워를 하고 선풍기 앞에 누 천국 경험 때, 찬바람이 불어오며 빠르게 기우는 해가 노을을 눈앞에 선사할 때, 코끝이 아리고 두뺨이 갈라지도록 추운 밤거리를 헤매다 들어선 노점 노곤 따뜻함이 정겹게 느껴질 때, 그러니까 한마디로 4계절의 정취를 가득 담아 주종을 달리하며 자연스럽게 찾던 술과 많은 밤을 정리했다.


먹고싶을 때 먹고 자고싶을 때 자던 삶, 보상이 주어져야만 몸이 반응하던 삶, 기분껏 남편과 싸우고 화해하고 싶을 때 화해하고 안하고 싶으면 뭐 구태 하지 않던 삶, 생각이 날때만 효도를 하고 하나를 드리면 부모님께 열개를 얻어내던 삶, 가끔은 귀찮아서 엄마의 전화를 외면하던 삶, 그러니까 한마디로.내 한몸을 겨우 건사하며 삶던 모든 삶들과 이별했다.


자기가 앞장설테니까 나보고 뒷장을 서라던 우리 첫째는 뒤에서 언제고 자신을 보아달라는 그 말의 의미답게, 내가 언제나 그녀에게 주의를 기울이도록, 그녀가 있는 곳에 나는 병풍이나 안테나처럼 결코 나대진 않아야하지만 없어져서도 안될 그정도의 존재감으로 나를 세워두었다. 그건, 부모의 삶이었다.

내가 잘났어도 겸손으로 키워야 할,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벼가 한차레 더 고개를 숙여야하는, 그게 자식농사고 육아였다.


지킬 목숨이 있는 삶으로, 어른의 삶으로, 그녀는 나를 키웠다. 맥주를 못끊는 한심한 애미를 가르쳐서 나를 열받게 하는 열세살 내딸은 이미 태어났을 때 나를 키웠고, 119안에서 한 번 더 나를 어른으로 만들며 그녀가 해야할 효도를 모두 끝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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