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이 지난달에 이사를 했다. 부모님께서 이사를 결정했을 때 가장 기뻐한 건, 당연히 외국에 있는 남동생은 아니었고, 그렇다면 엄마나 아빠였어야 하는데 그게 아니라 수년 전 결혼을 해 가정을 꾸리고 다른곳에 살고 있는 나였다. 친정 가까이에서 아기를 낳아 키우고 매일같이 친정과 왕래를 하는 나로서는 친정동네 어르신들의 관심일지 참견일지 모를 안부인사가 부담스러웠다.남편의 직업과 연봉, 딸의 나이는 물론 성격과 취향까지 알고 계신 어른들이 건네는 인사들은 내가 그들의 눈에 어떻게 비쳐야 하는가를 의식하게 했고 그럴때마다 부자연스러워졌다. 거기다가 사소한 이유이기는 하나 나는 sns에 꾸준히 육아일기를 올리고 있는데 친정에서 찍은 아기 사진들은 창피해서 차마 올리기가 힘들었다. 무슨 얘기냐면, 20년이 넘게 쌓여온 살림과 세월의 더께가 두텁게 내려앉은 그 집의 모습은 음산을 넘어 을씨년스럽기까지한, 어쩔때보면 남사당같았다. 포인트랍시고 엄마의 취향을 반영해 몇 겹이고 덧바른 조악한 무늬의 벽지들, 당시에는 최신 유행이었을 촌스러운 가구들, 90년대쯤의 교과서에서나 볼법한 기법으로 찍은 커다란 가족사진은 조화없이 각기 자기자리를 떡하니 지키고 있었다. 그런 가족사진 안에서 웃고있는 우리가족의 얼굴은 화목이나 단란을 강요받은, 하나같이 어색한 표정이었다. 틈만나면 이사좀 하시는게 어떠냐고 닦달하는 나와, 이제는 이사갈 때도 된 것 같다며 입버릇처럼 대답하시던 부모님이었기에 그건 정말로, 어떠한 목적과 지향이 없는 대화였고 부모님은 지금껏 그래왔듯 평생을 그 집에서 보내실 줄 알았다. 그런데 이사를 가신다니, 손가락에서 오래도 묵었던 티눈이 하루아침에 쏙 빠진것 마냥 속이 다 후련했다.
엄마는 이번에도 포장이사를 부르지 않으셨다. 당신의 손때가 묻은 살림들을 남의 손에 맡길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포장이사라는게 없던 시절에야 하루 일과를 끝내고 밖에서 하나 둘 돌아온 가족들이 밤늦은 시간까지 짐을 정리하고, 포장하고 이고 지고 옮기고 하는 게 당연한 풍경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비용을 지불하면 손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알아서 다 해주는 그 편한 포장이사가 있는데 왜 이 고생을 하냐며 엄마를 타박하고 설득했지만 그런 얘기를 하면서도 엄마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걸 당신 손으로 시작하고 마무리지어야 속시끄러울 일 없다고 생각하는 게 본래 엄마의 성미였다. 아빠나 남편은 어차피 직장에 메여있는 몸이라 도울 이는 나뿐이라는 데서 나온 지청구였을지도 모르겠다.
엄마와 나는 이사 한 달 여를 앞둔 시점부터 차근차근 짐정리를 시작했다. 정리란 일단 ‘버리는 것’ 이라고 생각하는 나와, ‘분류하는 것’ 이라고 생각하는 엄마 사이에는 끊임없이 마찰이 생겼다. 엄마는 수명이 다했거나 쓸데가 도무지 없어보이는 물건들을 ‘언젠가’는 쓰일 곳이 분명히 있고 세상에 나온 물건 가운데 쓸모없이 만들어진 물건은 없다며 한사코 버리는 걸 만류하셨다. 그렇게 다 갖다버려서 언제 살림을 늘리고 언제 부자될거냐, 그렇게 막 버릴거면 처음부터 뭐하러 샀냐는 엄마 몰래 가져다버린 낡은 반짇고리나 양념통같은 것들도 어느 틈엔가 엄마는 귀신같이 알아채고 다시 주워오기도 하셨다. 기어코 버려야한다는 나와 버릴 수 없다는 엄마가 팽팽하게 맞서는 가운데 우리 모녀가 생각을 같이 한 것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집 구석구석 또아리를 틀고 20여년 세월을 함께 해온 짐들은 실로 엄청나다는 것이었다. 진공포장해둔 이불 끝을 잘라내면 무서운 속도로 부풀듯, 속속들이 빼곡하게 들어찬 살림살이들은 꺼낼수록 왜 자기를 이제야 불렀냐는 듯 무섭게 팽창했다. 제일 처음 정리한 곳이 외국생활중이라 깨끗이 정리돼있던 남동생 방이었는데도 그랬으니, 앞으로 한 달 간 이 짐들을 다 꺼내볼 수나 있을지 두렵기까지 했다.
그래도 내가 아침마다 딸을 어린이집에 보내고 짐정리를 위해 꾸역꾸역 친정집으로 갈 수 있었던 건, 그 집 안에서 알게 모르게 어떤 식으로든 우리 가족들을 스쳐갔을 무수한 이야기들을 다시 만나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침대밑과 서랍장, 장롱 위와 틈새까지 방을 하나씩 훑어갈수록 옛날 우리가족들의 흔적들은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누구에게도 발견되지 않았기에 오롯이 원형을 간직할 수 있었던 고대 유적지처럼, 그 집은 새롭게 인사를 건넸다. 엄마는 나와 동생의 병설유치원 추첨서류부터 졸업장과 개근상장, 우리남매가 인생 처음으로 만들었을 카네이션, 배냇저고리는 물론, 떨어진 배꼽까지 ‘처음’ 이라고 부를 수 있을만한 모든 것을 간직하고 계셨다. 뭐하나 함부로 버리지 못했던 엄마의 수집벽이 아니고서야 그렇게 보관될 수 없었겠다 싶은, 사소하지만 소중한 기록들이었다.
엄마는 종종 결혼생활의 무료함일지, 갑갑함일지 모를 얘기들을 늘어놓았고 아빠의 흉도 보고 칭찬도 하며 속얘기들을 조근조근 털어놓으셨더랬다. 날때부터 엄마와 아빠였을 것만 같은 당신들의 연애편지들은 몰래 엿본 달콤한 비밀같았다. 엄마에게도 당연히 있었을 가슴뛰는 시절들을 나는 정리를 잠깐 미룬 채 뒤적였다. 엄마역시 무심한 듯 짐을 싸면서도 당신의 역사위에 얹힌 뽀얀 먼지들을 조심히 걷어내고 작은 상자에 따로 담아두셨다. 그렇게 꼬박 한 달을 정리한 부모님의 짐은 큰 가구들을 제외하고도 우체국 택배 상자중 가장 큰 사이즈로 정확히 쉰 두 상자가 되었다. 친정에서 보낸 나의 이십 오년여의 세월과 우리 가족의 이야기는 쉰 두 상자로 압축되었다.
이사를 하던 날, 마지막으로 빠진 물건이 없는지 알맹이가 빠져나가 텅 빈 집을 보면서 이내 처음으로 그집으로 이사하던 날 펑펑 우셨던 엄마와, 그런 엄마의 어깨를 아무말없이 다둑이던 알 수 없는 표정을 한 아빠의 얼굴이 떠올랐다. 1990년에 완공된 그 아파트는 당시 기술로는 최신식이라 할만큼 25층의 높이에 지하주차장까지 완비된 단연 우리동네의 랜드마크였다. 아무것도 없이 신혼을 시작한 엄마와 아빠가 마침내 마련한, 누구도 부럽지 않은 대궐같은 집이었다. 이사하기 한참 전부터 몇 번이고 들러 밤낮으로 쓸고 닦고 바닥에 입맞췄더 집이었다. 열아홉번의 이사에 질린 우리가족의 심신이 정착한 첫 집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 집은 엄마와 아빠의 자긍심, 노력, 미래라는, 보이지 않게 엄마와 아빠를 묶어준 끈의 다른 이름이었다. 우리가족은 든든하고 단단히 버텨주었던 우리의 집에 길게, 작별 인사를 했다.
@@아파트 109동 1804호. 이제는 친정이 아닌 옛날에 살았던 어떠한 집의 주소다. 단 몇 글자로 압축되는 성냥갑처럼 작은 그 집이 우리가족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자 가장 큰 우주였는지 모르겠다. 그 곳에서 나와 동생은 무엇으로 자랄지 미처 몰랐던 씨앗처럼 많은 가능성을 품고 안전하고 따뜻하게 자라났고, 엄마와 아빠는 안락하고 무사한 미래를 꿈꿨을테고, 얼마전까지는 세살배기 딸의 포근하고 다정한 외갓집이기도 했다. 홈, 스위트홈. 이제 다시 발디딜 일 없는 그 집은 우리 가족에게 집 이상이었다. 먹고, 살고, 사랑하고 그렇게 행복했던 우리가족의 역사였다.
부모님의 새 집은 참 좋다. 사는 곳이 우리를 말해준다던 tv 광고처럼 부모님은 물론 나의 자아까지 한껏 품격이 올라간 것 같았고 동일한 색으로 통일감있게 마무리된 인테리어는 집을 더 쾌적하고 넓어보이게 만들어주었다. 딸의 사진을 찍었을때 결코 인물보다 더 적극적으로 나대는 법 없는 깔끔하게 그자리에 있어주는 배경이라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하지만 이런 것들은 새로움이 주는 잠깐동안의 착시일 것이다. 새로움은 찰나고, 생활은 지속되는 법이다.
이 공간에서 우리가족은 또다른기록을 남길 것이고, 새로운 시간들이 우리 옆에 머물다가 갈 것이다. 그 시간과 공간을 어떻게 엮어나가는가가 현재진행형인 이 집의 역사에 의미를 입혀주는 열쇠일 것이다. 이 집에는 지금도 먼 훗날 우리에게 들려줄 이야기들이 켜켜이 쌓여가고 있다. (2016.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