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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rden May 25. 2024

'최선' 이라는 어불성설

나를 나일 수 있게 만들어주는, 그런 사람

다른 사람들에게 본인의 결혼생활이 행복하다고 떠벌리는 것 만큼 그 결혼생활의 허점과 내 배우자의 불행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건 없다. 그 행복이라는 게 거짓말일 경우에는 거짓말이라서 그렇고, 진짜로 믿고 있다고 해도 결과는 다르지 않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자랑을 전시하는 크기와 회수만큼 그이는 잘못된 결혼생활을 하고 있을 가능성 역시 크고 많다, 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내가 타인의 행복을 시기 질투한다거나, 아니면 속부터 베베 꼬인 사람이라 그럴 가능성도 있을거라는 생각은 늘 하고있다.



결혼해서 살다보면 느끼는 게 결혼은 기본적으로 '최선' 과는 태생적으로 대척점에 있다는 점이다. 서로 다른 둘이 만나서 하나의 결정을 내리는 데 최선이라니, 어불성설이다. 우연히 수많은 경우의 수가 맞아떨어졌을 때, 드물게 최선의 선택이 나오고 웬만해선 차선일 뿐이며 최악만 피해도 선방한 거다. 단순히 생각해봐도 답은 쉽다. 나는 지금 배가 부르다. 배우자는 배가 고프다. 나는 간단히 요기정도만 하고싶다. 배우자는 밖에서 거나하게 차려주는 식사를 하고싶어 한다. 배우자는 지금 뉴스를 시청하고 싶다. 나는 드라마 재방을 보고싶다. 하룻동안에도 사실 알게 모르게 배우자와 수많은 결정과 선택을 하고 있다. 그게 끝이 아니다. 나는 서울에 살고 싶다. 배우자는 본가가 있는 지방에 내려가고 싶다고 한다. 나는 주택살이를 해보고 싶다. 배우자는 곧죽어도 아파트여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나는 자녀를 둘 갖고 싶다. 배우자는 하나만 원하거나 혹은 자녀를 낳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큰 틀을 놓고 봤을 때 반드시 결정을 내려야만 하는 일들도 수두룩 빽빽하게 산재해있다. 혼자였다면 하지 않아도 될 선택에 기혼자는 매순간 소환되어 기로에 서야하고 그 와중에 상대의 취향, 기분, 가치관, 세계관까지 고려해줘야하는 것이다. 악의가 있어서 상대를 괴롭히는게 아니다. 그저 둘이라는, 그 자체가 효율성과 가성비, 기동력까지 현저히 떨어지는 구조인 것이다. 의사결정 과정에서 이미 갈등의 씨앗이 내포되어 있어서 그렇다. 이런 흐름에서 보았을 때, 결혼생활이 행복하다고 말하는 이들은 그러니까 상대방이 얼마나 본인에게 맞춰주고 있는지, 그러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얘기가 된다.



보통은 갈등을 피하고 싶어하는 이들이 상대와 부딪치기보다 포기를 택하면서 맞춰주게 되어있는데 중요한 건,  이 결핍과 불만을 어디까지 참을 수 있는지, 나를 얼마만큼 지우고 감당할 수 있는가이다. 보통의 무난하고 그럭저럭 살아가는 부부들은 의좋은 형제들처럼 묵시적 룰을 체득한 이들이다. 지난번엔 네가 원하는대로 했으니 이번에는 내차례. 이런식으로 주거니받거니 하다보면 부부간의 사랑이 남녀간의 에로스적 사랑보다는 전우애에 가까운 동지라는 느낌으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이런 부부들은 대체로 오래간다. 최선은 어차피 어불성설이므로 너도 적당히 좋고 나도 적당히 만족하는 ‘차선’ 으로 타협하는 셈이다.



문제는 자신의 의견만을 반드시 관철하는 사람에게서 생긴다. 어떤 수를 써서라도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는 이들이 있다. 이들이 폭력적이거나 생떼를 쓸 수도 있겠지만 그건 하수나 그렇다. 끊임없이 설득하고 설명하고 이해시켜서 본인의 의견을 수용하도록 만드는 이들이 주변에 여럿 있었다. 본인의 신념에 취해있는 이들이었다. 자칫 그들은 줏대있고 주관도 뚜렷해 현명한 사람으로 보인다. 그래서 본인이 원하는 바를 논리에 근거해 평화적인 방법으로 설득시킨다고 착각하는데, 그게 바로 가스라이팅이다. 궤변이나, 논리적 구멍이 분명 있는데도 어느 순간을 지나면 듣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한다. 왜인가 돌이켜보면 그의 의견을 안들어줬다가 또 얼마나 시달리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이야기 시작부터 포기하고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지쳐서 결국은 상대에 따르게 되고 선택의 기로에서 전방위적으로 그 사람의 의견을 따르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을 때는 늦은 뒤일 수 있다. 이미 존중받아야 할 배우자로서의 나는 사라져있고 그걸 더이상은 견딜 수 없어지는 순간이 되어버렸을 지 모른다. 하지만 원하는 바를 관철시키는 이들은 배우자의 지치고 병든 마음음 모른채 결혼생활에 대한 만족도가 높아져 있을 것이다. 본인이 바른생활과 바른가치를 가지고 있고 그걸 배우자와 함께한다고 여길테니까 말이다.



사실 부부가 내리는 대부분의 결정은 선호와 우선순위에 관한 문제들이지 옳고 그름에 관한 것들이 아니다. 만약 옳고 그름에 관해 논의하도록 만드는 사람이라면 그런자들은 지체없이 여지없이 갈라서야하는 사람일 가늗상이 크다. 이미 텄다.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누가 누구를 설득하고 본인의 생각이 옳음을 피력하고, 설명할 필요가, 사실은, 전혀, 없다. 그저 양보와 배려, 이해와 헌신으로 대부분 채워지는 것이 결혼이다. 내가 나일 수 있고, 너가 너일 수 있는 상태. 그걸 유지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사람과 결혼해야 하는 이유다. 연애시절부터 자신에게 나를 끼워맞추려고 하거나, 내 스타일과는 다른 무언가를 하도록 끊임없이 설득하는 사람, 자신의 취미나 가치관, 신념을 인정하는걸 너머 나도 그렇게 하도록 종용하는 사람,  곧죽어도 그게 옳다고 주장하고 악다구니쓰는 사람, 제발 버리자.



그래서 결국 얘기는, 대화로 귀결된다. 섹스보다 대화의 희열이 훨씬 짜릿하다고 얘기했던 영화감독이 생각난다. 그러니까 같은 한국말을 하고 있다고해서 대화가 통하는 건 또 아니라는 얘기다. 대화란, 기본적으로 내가 잘못했을 수도 있다는 전제가 있는 그곳에 서 출발한다. 니 이야기를 들어보니 내가 잘못했을수도 있겠다. 하는 자세에 대화의 시작점이 있다. 그 지점에서 대화를 하면 가치관이 다르고 추구하는 바가 다르고, 취미생활이 달라도 대화의 희열은 가능하다. 그걸 가능하게 해주는 사람이 있을지 나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 가능성조차 애초에 봉쇄하는 사람과는 절대 만나서는 안된다. 나를 나일 수 있게 만들어주는 상대방, 그거 뭐 그리 거창하고 대단한거 아니다. 그냥 한번쯤은 양보해주는 사람, 내가 먹고싶은 걸 기꺼이 같이 먹어주는 사람, 보고 싶은 영화를 졸면서도 옆에서 함께 봐주는 사람. 그정도면 족하다. 어차피 거창하고 대단한 사람 만나봐야 둘이 된 그 순간부터 최선은 어불성설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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