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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rden Jun 15. 2024

화해의 기술

지는게 이기는거라는 역설

뜬금없는 고백이지만, 나는 미성년자 시절에 부모님이 언성을 높여 싸우시는 모습을 단 한번도 본 적이 없다. 이건 전적으로 엄마의 노고와 공이지만 어쨌든 눈앞에서 두 분이 싸우시는 걸 본 적이 없다. 자랑이냐, 결코 아니다. 많은 전문가들이 간과하는 점이 있다는 걸 내 관점에서 말하고자 함이다. 나는 엄마, 아빠가 다투는 걸 보지 못했지만 둘 사이에 한랭하고 건조한 기류가 흐르고 식탁위에 웃음이 적어지면 두 분이 다투셨다는 걸 알았다. 그러다가 식탁위에 온난하고 다습한 전선이 형성되고 대화가 살아나면 두 분이 이제 화해를 했구나, 라고 어렴풋이 느꼈을 뿐이었다. 그 때 나에겐 다툼과 갈등이란 그저 ‘무마시키는 것’ 이라는 의미였던 것 같다. 시간이 지나고 화가 누그러들면 해결되는 것, 싸움이나 갈등이란 그렇게 간단하고 단순명료한 문제였다.


그런데, 성인이 되고 타인들과 관계를 맺게 되고 연애를 하고 배우자와 부부생활에서 갈등을 맞닥뜨리면서 내 생각이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사람간의 갈등, 그 중에서도 애인이나 배우자와의 갈등은 덮으면 덮을수록 마치 통풍이 안돼 덧나는 종기처럼 나중에는 손쓸 새도 없이 악화일로는 걷는 경우가 많다. 단순히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했거나 약속을 어겼거나 하는 문제들은 사과를 하면 그만이지만, 그보다는 근원적인 갈등의 씨앗이 되었던 문제는 결국 문제의 해결로만 끝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움의 기술(이전글참조)로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관계임을 확인했다면, 이제는 어떻게 화해해야하는가를 생각해봐야한다.

https://brunch.co.kr/@inthegarden/64


싸움을 '안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화해를 '보여주는' 것이 핵심

중요한 것은 싸우는 모습을 ‘안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화해하는 모습을 꼭 ‘보여주는’ 것이 핵심이라는 점이다. 전문가들은 보통 부모의 싸우는 모습이 아이들에게는 전쟁처럼 느껴지고, 존재의 공포이고, 집을잃는 불안이라는 점에 포커스를 맞춘다. 물건을 부수고, 던지고, 폭력적인 그런 싸움만이 싸움이라면 맞는 말일 수 있다. 하지만 싸우지 않는 부부생활이 가능한가. 전쟁같은 싸움만 싸움은 아니다. 이미 아이들도 다 안다. 부모사이에 이상한 기류가 흐른다는 것, 싸움전선이 형성되어 있다는 것 다 느낀다. 그걸 안보여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안싸우고 늘 화목하고 단란하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다면 나는 갈등을 드러내놓고 직시하고 둘이 함께 봉합하는 법, 그렇게 화해에 이르르는 법,을 반드시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덧나지 않는다. 나중에 손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지 않는다. 그게 바로 화해이고, 그런걸 보고 자란 적 없는 나는 결혼 15년 동안에 걸쳐 실제 내경험속에서, 지인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그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됐다. 어렵지는 않으나, 반드시 필요는 한 화해의 기술말이다.



짐으로써 이김을 얻는 역설

사람은 안바뀐다.  옛말 틀린거 하나없다고 사람 고쳐쓰는거 아니라했다. 절대 안바뀌는게 사람인데 특히 나와 서열이 비슷한 이를 내가 바꾸고자 몰아부치고 쏘아붙이면 사람은 본능적으로 필사적이 되기때문에 더 바뀌지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바뀌어야, 상대방도 바꿀 수 있다. 나는 그걸 남편을 통해 봤다. 남편은 공무원이 된 나에게 둘째가 생기고부터 직장을 그만두고 가정을 전적으로 돌보는게 어떻겠냐고 계속해서 회유와 설득을 해왔다. 그때 나는 그게 종용처럼 느껴졌다. 비슷한 서열인 남편의 설득이 본능적으로 나에대한 도전으로 느껴졌을거라 변명해본다. 객관적으로도 내가 출퇴근을 하면서 느낀점은, 나의 직장생활로 인해 행복한 사람은 단 한명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방치된 아이들,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우와좌왕하는 우리 부부, 그때마다 동원되는 친정부모님까지, 나하나 포기하고 내가 가정을 돌보면 되는 일이었다. 얼핏 들으면 왜 부인만 포기하냐, 할 수 있는데 남편은 늘 경제적인 부분과 가정의 미래까지 논리적으로 설득해왔고 그래서 나는 역설적으로 그게 너무 맞는 말이라 더 외면했는지도 모르겠다. 왕복 출퇴근만 3시간, 둘째까지 데리고 출퇴근을 하며 직장 어린이집에 보내야 하는 상황이었고, 그에 반해 남편의 5분의 1도 안되는 지나친 박봉과 조직내 좁은 나의 입지, 앞으로 받을 연금과 내가 직장에서 성취할 자아의 실현까지 조목조목 아무리 따져보아도 나의 직장생활은 수지타산이 안맞는게 확실하긴 했다. 그렇지만 2년여를 넘게 하루도 거르지않고 둘째를 데리고 다니며 나름의 방법으로 생존하고 오기 비슷한 감정으로 버티는 나를 보더니 남편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으며 인정이 아니라 체념을 하게된 것 같았다. 묵묵히 나를 지지해주는 건 결코 아니었지만, 얘기해봐야 안된다는 걸 깨달았달까.  남편이 한발 물러난 시점에 나는 문득 우리가족의 삶의 질과 아이들의 어린시절에 곁에 있어주지 못해 내가 잃는 것들의 기회비용, 우리엄마의 굽은허리 같은 것들이 한꺼번에 물밀듯 밀려들기 시작했다. 마침내 휴직을 하게 된 지금 나는 돈많은 전업주부를 꿈꾸는 솔직한 심정이 되었다. 남편은 짐으로써, 이김을 쟁취했다. 가 태도를 먼저 바꾸고 내가 변한다는 제스처를 취해야 상대방도 경계태세를 풀고 본인에 대해 제3자의 입장으로 바라볼 여유를 갖게 된다.



좋은 사람이 되기보다는 나쁜 사람이 되지 않는 것

또한, 화해를 할 때에는 서로 본인이 어떤 사람이 된다든가, 뭘 더 잘하겠다든가를 약속하기보다는 '절대' 하지말아야 할 것 들에 대한 선을 먼저 정하는 것이 좋다. 좋은 배우자가 되겠다기보다 나쁜 배우자가 되지 않는걸 목표로 넘지 말아야 할 한계를 정하는 것이 훨씬 실현 가능하다. 그게 나한테도 편하다. 잘하려고 노력하기보다, 상대방이 싫어하는 걸 하지말자. 행복은 보통 기분으로 저장되지만 불행은 사건으로 기록되는 탓에 분단위, 초단위로 기억이 기록된다. 분명 그것만은 하지 말아달라고 얘기했는데, 그 약속만은 지켜달라고 했는데 그 선을 넘어놓고는 이벤트로 어물적 넘어가려는 사람, 애교로 적당히 넘어가려는 사람, 앞으로 내가 '잘할게' 로 무마시키려는 사람은 최악이다. 그런 이벤튼는 순간이고, 일상의 불행은 오래간다.


싸움과 화해는 금기가 아니다

화해라는 게 사실 별게 아니다. 우리가 싸운 이유와 원인이 된 문제들을 풀어헤쳐놓고 짚어가며 잘잘못을 가리고, 사과와 반성을 하고 앞으로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를 차근차근 짚으면 된다. 그렇지만, 어린시절부터 우리는 알게모르게 어른들의 다툼 자체가 금기시 되는 환경과 분위기 속에서 자라왔고 그래서 화해 역시 딱히 배워본 적이 없다. 안나 카레니나에 면 이런 대사가 나온다. "행복한 집은 모두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를 갖고 있다" 불행이 훨씬 구체적인 감정이라 그렇고, 사람이 행복을 추구하기 전에 불행을 제거하려는 기제를 강하게 작동하기때문에 그렇다. 행복은 불행 다음의 감정이다. 불행하지 않기위한 임계점을 정하는 것, 그리고 나부터 노력하는 것, 이 두가지가 가장 간단한 화해의 기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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