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실히 사람에게는 재능이랄지, 적성이랄지, 자꾸만 마음을 설레게하고 눈길을 붙잡는 그런 영역이 하나쯤은 있는 모양이다. 거기에 물길을 열어주면 빠른 속도로 휘감아 돌며 넉넉히 흐르는 강물이 될테다. 그럼 가느다랗게 나 있는 물길을 아예 막아버린다면, 다른 길을 찾아 힘차게 흐를 것인가, 하면 답은 ‘아니다’ 에 가깝다는 생각이다. 유전자에 적혀있는 적성 DNA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걸 못움직이게 틀어막는다면 그대로 소멸하는가. 아니다. 몸 안에 흐르던 물은 언제고 제 갈길을 찾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 내면의 소리, 내 마음이 하는 얘기에 내가 귀를 기울이고 있다면.
‘어떤 방법으로 네가 너를 가여워하고 보살피겠느냐’
이사를 오고 우울감이 심해지면서, 아무도 내 마음을 나처럼 이해하는 이는 없다는 사실을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이해하게 되었다. 너는 지금 자기연민에 빠져있는거라고, 내가 도와줄테니 힘을 내보라던 남편에게는 더 할 말이 없었다. 누구보다 나를 걱정하는 사람이었고, 내가 내리는 나의 진단을 잘못된 거라 여기던 그의 마음과 안타까움은 진심이라는 게 느껴졌으니 내가 나서 보탤 말이 없었다. 절대적 내 편이라 믿던 엄마도, 내가 그렇게 매일을 전화해서 울고 불고 악을 써서 괴롭히고, 어떤 날은 아예 침묵으로 일관하면서 오는 연락도 일절 받지 않아 괴롭혔던 우리 엄마도, 내 머릿속과 마음속을 이해하지 못했다. 불안과 우울, 무기력과 자괴감, 분노인지 슬픔인지 분간이 안되고 설명도 하지 못할 여러 마음들이 어디서부터 비롯되어서 나를 장악하고, 거기에 압도된 내 마음이 내 몸을 무기력하게 만들 때, 그걸 하릴없이 바라보고만 있는 무너지고 부서진 내 마음들에 대해 내 편이라 믿었던 이들에게는 소상히 털어놓았지만 그들이 그걸 대신 느낄 수는 없을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나를 구제해줄 수 없었다. 그건 누구의 잘못이 아니고 다만 나만 할 수 있는 거였다. 세상에서 나를 가장 가엽게 여기고, 사랑해줄 수 있는 사람, 보살펴주고 낫게해줄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너에게 지금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나를 보살피고 돌보기위해, 나를 구해내기 위해, 스스로에게 물었다. 웅크리고 하루종일 침대에 누워있자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더 나빠질 건 없었지만 그래서 전혀 좋아지지도 않았다. 영혼없이 육신만을 이끌고 출퇴근을 반복하는 삶은 나를 갉아먹고 닳게만 만들었다. 한편, 시발비용으로 지출을 하고 소비를 해서 나의 우울과 불안을 다스리는 건 한계가 있었다. 고백하건대, 비용상의 한계가 먼저 찾아왔다. 당연하게도, 돈은 어디에서도 화수분처럼 나오는 게 아녔다. 백화점에서 수십만원을 지출해도 약효는 하루를 못넘겼고, 당연히 소비로 인한 행복의 역치는 자꾸만 높아져갔다. 기분과 바꾸는 금액이 점점 더 커졌다. 가방이든 옷이든 지출을 하기 전에나 잠깐 설레고 행복할까, 사고나면 더 큰 죄책감과 자괴감이 몰려와 나를 괴롭혔다. 스스로를 지배하는 윤리의식과 도덕관념이 그래도 버텨주어서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 이상의 소비는 막을 수 있었음에 감사한다. 더 큰 한계는 강남 한복판, 이동네에서는 내가 무리를 하고 큰 마음을 몇 번을 먹어야 살 수 있는 그 금액의 가방, 신발, 시계가 그저 일상품이었다는 거였다. 놀이터에서도 아무렇지않게 롤00 시계를 찰 수 있는 사람들, 에르00 가방에 대파와 무를 욱여넣을 수 있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은 동네였다, 여긴. 무기력과 우울, 소비와 죄책감이 반복되었다. 필요하지 않은 것들로부터 멀어져 자유로워질 수 있는 시간들이 필요했다. 평소에 책읽는 것을 좋아했지만, 책을 읽지 않는 대부분의 시간에는 스마트폰으로 국내외 여러 브랜드들의 신상품이나 해외 명품 브랜드들의 핫딜소식, 면세점 세일 등을 보면서 숨쉬듯 쇼핑을 하던 나는, 쇼핑에서 멀어져야 했다. 불필요한 것들에서 자유로워져서 내 시간과 내 하루에 새로이 쏟아부을 수 있는 새 부대에 담는 새 술이 필요했다.
‘너는 어떤 불꽃앞에서 춤을 추는 인간이냐’
자연스레, 질문은 여기에 이르렀다. 물길을 찾지 못하던 내 안의 DNA에 관한 이야기다. 우울감이 극에 달했던 그 시기, 한편 이곳에서 명품이 무용함을 깨닫게했던 그 즈음, 내가 글을 쓰고 그림을 배우게 된 건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우리집에는 삼익피아노가 있었다는 충분조건으로 나는 6세부터 초등학교 4학년을 꽉 채울 때까지 피아노를 배웠지만, 체르니 30번도 채 떼지 못했다. 재능이라는 소울의 영역이 없으면, 신체라는 피지컬의 영역이라도 있었어야 했는데 체구도 작고 말라깽이였던 나는 4학년이 넘어가도록 도에서 다음 옥타브의 도 까지 잘 닿지가 않았다. 당연 소곡집에 든 소녀의 기도를 제대로 연주해낼 수가 없었다. 생각해보면 나는 언제든, 그리고, 오리고, 붙일 준비가 되어 있는 아이였는데, 피아노는 내 적성과 취미를 가로막은 최초의 물건이었다. 35년도 이상 전에, 어린 여자아이에게 취미생활이라는 이름으로 음악과 미술을 다 시켜주는 집은, ‘거의’ 라고 봐도 무방할만큼 없었다. 이미 피아노는 배워야만 했던 나에게 또다른 취미생활은 들어설 자리가 없었던 거다. 워낙 어릴때부터 가로막힌 물길은, 내 사전에 그림, 또는 미술이라는 생각 자체를 사라지게 만들었다. 없던 단어였다.
마흔이 넘는 나이에, 처음으로 내가 나에게 너는 무얼하면 행복한지, 무얼 하고싶은지, 물었다. 불필요한 것들에서 자유로워진다면 그 다음 발걸음은 어디일 것이냐고. 답이 돌아왔다. 그림을, 그리고, 싶다, 는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사실 진지하게 물음을 던진 적이 없었을 뿐, 내 일상과 생활의 곳곳에는 이미 미술이라고 불리우는 것들의 영역에서 서성이는 내가 있었다. 어린 딸들과 시간을 보내야 할 때, SNS에서 보게되는 키트나 소품에 늘 마음이 동했다. 의도하지 않았어도 내 마음은 늘 거기에 가 있었다.
첫째와 만든 크리스마스 오너먼트(도안 adorable_nina)
한땀한땀 다 내가 만든 첫째 돌잔치 상차림
첫째랑 손바느질로 완성한 백참(도안 키티버니포니)
아이들이랑 같이 만들었던 크리스마스 장식들
(생각해보니 언제나 나는 이런 것들과 함께였다. 아이들보다 더 적극적으로 집중했고 진심이었던 것 같다.)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생각하니, 생각보다 많은 선택지가 있었지만, 민화를 고르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동경했지만, 발을 들여본 적이 전혀없는 낯선 세계, 소질이라는 것을 확인해볼 틈도 주어지지 않았던 나에게 스킬과 기본기가 있을 리 만무했다. 동양화, 그 중에서도 무명인 서민들이 많이 그렸다는 민화, 뚜렷한 기법도, 정해진 틀도 없는 소박하고 자유로운 그림인 민화, 가 적절할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민화를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