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굴로 들어가 버렸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
그와의 관계에서 가장 어렵고도 깊었던 순간은 갈등이 다가왔을 때였다. 작은 오해가 생길 때마다 그는 조용히 물러섰고, 나는 그 침묵 속에서 수많은 생각과 감정을 홀로 감당해야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됐다. 그가 물러선 것은 나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두려움과 마주할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회피형 인간에게 갈등은 곧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라는 초대장과 같다. 하지만 그 초대장은 그들에게 너무 벅차고 위험한 것처럼 느껴진다. 어린 시절 반복된 상처, 혼자 견뎌야 했던 외로움 속에서 그들은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배웠다. 그래서 그들은 갈등을 피하고, 대신 침묵과 회피로 자신을 보호한다.
그와의 갈등이 언제나 '이별'로 귀결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과정을 통해 나는 그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법을 배우기도 했다. 갈등 속에서 그의 불안과 두려움을 자극하는 요소가 무엇인지 곱씹고 또 곱씹었다. 방어적으로 내뱉는 말들을 분해하고 재조립하며 그 안에 숨겨진 그의 진심과 마주했다. 그의 진짜 모습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그를 감싸안아 주기로 마음먹었다. 내 안의 불안은 잠시 내려놓고, 자신의 진심을 끝내 돌아보지 못하는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며 대신 안아주었다.
그 과정 속에서 나는 더욱 성숙한 어른이 되어갔고, 스스로도 놀랄 만큼 넓은 아량을 갖게 되었다.
내가 그를 향해 내밀었던 손은, 사실은 나 자신에게 내민 손이기도 했다. 나 또한 불안과 두려움을 안고 있는 사람이기에, 그 사람을 안아주면서 내 안에 작은 아이도 함께 안아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아이와 함께 조금 더 건강해져 그 사람의 마음을 다독여 줘야겠다, 다짐한 날도 있었다.
건강한 사람이라면 자신의 두려움에 빠지기 전에 전체 상황을 보는 눈이 있었으리라. 자신의 회피가 이기심이라는 것을 알고 일말의 미안함과 양심의 가책을 느낄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그는, 그와 같은 회피형 인간인 사람들은 그러지 못한다. 나는 그를 환자라는 마음으로 돌보았다. 그에게 어떤 행동을 강요하기 보다는 진짜 당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지며 조금씩 그사람이 스스로를 찾을 수 있도록 돕기로 했다.
생각보다 놀라운 성취도 있었다.
“살면서 이렇게 정신적으로 친밀감을 느낀 사람은 처음이야. 내 삶의 의미가 생긴 것 같아.”
정신적인 친밀감.
그의 그 말이 나에겐 그간의 수많은 포옹에 대한 감사인사처럼 느껴졌다.
꼭 회피형이 아니라도, 누구나 흔히 갈등을 피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힐 수 있다. 하지만 갈등은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하고, 서로의 경계를 확인하며, 더 나은 방식으로 연결될 기회를 주기도 한다. 그는 그 기회를 자주 놓쳤지만, 나는 그가 거부한 그 길을 내 안에서 이어갔다. 그를 통해 배운 것은, 누군가에겐 부질없는 짓이라 할지라도, 끝없는 고통이 이어지는 길이라도, 그 모든 것이 나를 성장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그가 나에게 건넨 감사 인사는 성장에 따른 아주 작은 보상일뿐이었다.
그런던 어느날, 그와 또다른 갈등을 마주하게 됐다. 시간이 아주 많이 흘러, 그사람이 나에게 프로포즈를 한 이후의 일이었다.
사소한 갈등이었는데 그는 나의 불만 토로에 대뜸 ‘이러면 너랑 살기 싫어져’라고 대답했다.
아, 맞다 이사람은 원래 이런사람이었지. 순간 나의 지난 시간들이 허탈했다. 나는 모든 것을 멈출 각오를 했다. 그리고 그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메시지를 전달했다.
“집에 불이 나면 당연히 불을 끄려는 게 상식이야. 그런데 너는 사이렌 소리가 싫다고 집을 버리고 도망치는 거야. 그리고는 “아, 여기도 아니었나보다”, “나는 역시 되는 게 없네.”라며 다른 집을 찾아 기웃거리겠지. 정말 평생 살 집이라면, 불이 났을 때 마음 아파하며 어떻게든 다시 꾸려가려 하는 게 상식이야. 하지만 너는 그저 잠시 머물다 떠날 쉼터처럼 나를 대하고 있어. 그런 노숙자같은 태도로는 절대, 평생 니가 안식을 취할 집따윈 찾지 못할 거야.”
그에게선 아직 아무런 대답을 듣지 못했다.
회피형과의 관계는 결코 쉽지 않다. 관계의 기본이 되는 신뢰, 함께 상황을 헤쳐나가야 하는 파트너로서의 협력이 흔들리기 때문이다. 당연히 누군가에게 추천하고 싶은 관계는 아니다. 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하필이면, 재수없게도 회피형일 때가 있다. 도망치는 것이 가장 현명하겠지만 그러지 못하겠다면 최선을 다해보는 것도 나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아직 아무런 대답을 듣지 못했고 나는 이렇게 이 관계가 끝날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나는 최선을 다했으니까.
뜨거운 태양이 모든 것을 비춘다. 많은 사람들은 밝고 활기찬 가면을 쓰고 생활을 이어간다. 하지만 누구나 태양의 반대편에 감출 수 없는 그림자를 달고 다닌다. 내가 만난 사람이 하필이면 그 그림자를 바라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이었을 뿐이다. 회피형을 만나든 안정형을 만나든 나는 그 자리에 머물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이라고 믿어보려 한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나의 성장과 실패가 반복되는 관계의 발자국이다. 여전히 진행되는 중이고, 언제 포기하게 될지 모르는 과정 속에서 가장 솔직한 나의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