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 '가벼움'에 숨겨진 무거움

참을 수 없는 가벼움에 대하여

by 은서

그는 늘 가벼웠다.
정확히 말하면, 가벼움으로 자신을 지탱하는 사람이었다.

즉흥적인 여행, 오늘만 존재하는 시간표, 흘러가는 순간에 몸을 맡기는 태도. 처음엔 부러웠다. 저렇게 자유로울 수 있다니. 그의 웃음 속에서 나도 잠시 무게를 내려놓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보이기 시작했다.
그 가벼움 아래, 오래 가라앉아 있던 짙고 무거운 그림자가.

회피형 인간은 순간을 산다. 새로운 사람, 예상 밖의 이벤트, 계획 없는 자유. 그 안에서 살아 있음을 확인한다. 끊임없이 움직이고, 끊임없이 새것을 찾는다.
멈추는 순간, 자신이 무엇을 피하고 있는지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알 수 있다. 그들이 찾는 건 순간의 즐거움이 아니라, 책임과 연결로부터의 거리라는 것을. 감정적 헌신이 요구되는 순간, 그들은 이미 다른 방향을 향한다. 떠난다기보다, 스스로 빠져나간다.

그와 함께 있을 때 느낀 것들이 있다.

가벼운 농담으로 공기를 채우던 그는, 진지한 대화 앞에서는 시선을 피했다. 미래를 묻는 말에는 자연스럽게 화제를 바꿨다. 나는 그때마다 무력해졌다. 왜 이 사람은 깊은 이야기를 피할까. 왜 나는 그의 진심에 다가갈 기회조차 없는 걸까.

알고 보니 그의 즉흥성은 두려움의 다른 이름이었다.
계획하지 않는 삶은 자유로워 보이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방식이기도 하다.

“지금 이 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잖아. 지금이 가장 중요한 게 아닐까?”
그가 자주 했던 말이다. 그 문장 속에는 내일을 상상할 때 밀려오는 불안, 관계가 요구하는 책임에 대한 거부가 숨어 있었다. 미래를 그리지 않으면 상처받을 일도, 잃을 것도 없다는 믿음. 그렇게 그는 더 가벼워졌고, 동시에 더 고립됐다.

나는 자주 혼란스러웠다.

한순간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처럼 느껴졌다가, 다음 순간엔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멀어졌다. 그의 가벼움은 나를 자유롭게 했지만, 그 자유는 언제나 나를 혼자 남겨두는 방식으로 작동했다.
함께 날아오르되, 함께 착지하지는 않는 자유였다.

그래도 배운 게 있다.

사람은 누구나 가벼움을 원한다는 것. 무게를 내려놓고, 순간에 머물고, 복잡한 감정에서 잠시 벗어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진짜 관계는 그 무게를 함께 견디는 데서 시작된다. 서로의 그림자와 상처, 불안까지 외면하지 않을 때 비로소 연결된다.

나는 이제 그를 비난하지 않는다.

그의 가벼움은 그가 선택한 생존 방식이었다. 그 방식으로 그는 자신을 지켜왔다. 다만 나는 그 가벼움을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는다. 그의 자유를 이해하면서도, 내가 필요로 하는 무게와 진정성을 분명히 구분한다.

그와 함께한 가벼운 순간들은 여전히 내 안에 남아 있다. 그 시간 덕분에 나는 더 넓은 세상을 보았고, 스스로의 경계를 넘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순간에만 머물지 않는다. 나의 길을, 나의 속도로, 나의 무게를 인식하며 걷는다.

그의 가벼움에 담긴 무거움을 이해하고 나서야 알게 됐다.
사랑은 즐거운 순간의 나열이 아니라는 것을. 때로는 무겁고, 복잡하고, 쉽게 풀리지 않는 감정들로 얽혀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함께 통과할 때, 우리는 비로소 연결된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더 자유로워졌다.

진짜 자유는 가벼움에 있지 않다.
무게를 감당하겠다고 선택하는 용기 속에 있다.

그렇게 나는, 한 사람으로서 조금 더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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