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까지가 존중일 수 있을까
그는 언제나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다가오지 않는 것이 아니라, 누구도 쉽게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거리였다. 함께 있을 때도 그의 마음 한구석엔 늘 자신만의 공간이 있었다. 겉으로는 다정했고 충분히 친밀해 보였지만, 내면에는 누구도 초대받지 못하는 방이 하나 있었다. 처음엔 그 모습이 신비로웠다. 쉽게 닿지 않는 사람이라는 점이 오히려 거부할 수 없는 매력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나는 점점 그 방 앞에 홀자 서 있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중요한 고민이 생겨도, 감정이 요동치는 순간이 찾아와도 그는 끝까지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괜찮아. 별일 아니야.”
그 말로 대화는 닫혔다. 나는 늘 그 문턱에서 멈춰야 했다. 그는 나와 깊은 이야기를 나누기보다, 혼자만의 시간 속에서 감정을 정리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서운함이 밀려왔다. 신뢰받지 못하고 있다는 해소되지 않는 갈증 때문이었다.
하지만 결국 알게 됐다. 그것은 나를 밀어내는 거절의 태도가 아니라, 자신을 지키는 그만의 방식이라는 것을. 정신분석학자 존 볼비(John Bowlby)는 애착 이론을 통해, 아이가 돌봄을 필요로 할 때 양육자가 일관되게 반응하지 않거나 감정적 교류를 회피하면 아이는 타인에게 의존하는 것을 '위험'으로 학습한다고 설명했다.
‘필요로 해도 응답받지 못한다’는 경험이 반복되면, 아이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생존 전략을 선택한다. 그렇게 자란 어른에게 친밀함은 때로 위협이 된다. 가까워질수록 불안해지고, 의존은 곧 상처로 이어질 것이라 믿기에 스스로 거리를 만드는 것이다. 그것이 그들이 아는 최선의 사랑 방식이다. 정신분석전문의 김혜남은 저서를 통해 이렇게 진단한다.
“회피형 인간에게 친밀감은 자유의 상실이다. 그들은 관계 속에서 질식할 것 같은 두려움을 느낀다.”
그의 ‘나만의 방’은 단순한 상징이 아니었다. 내면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꼭 필요한 심리적 피난처였다. 그 안에서만 그는 안전했고, 자신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그 문을 쉽게 열지 못하는 이유도 분명했다. 그 방 안에는 아직 정리되지 않은 과거의 상처와 두려움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이전의 나는 연인과의 관계에서 늘 투명한 감정 공유를 바랐다. 하지만 그는 갈등을 피했고, 감정을 최소한으로만 드러냈다. 문제는 늘 혼자 해결했다. 난 자신이 거절당했다고 느꼈다.
“왜 나한테는 마음을 열지 않는 거야?”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난 이해하게 됐다. 그에게는 자신의 방을 지키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다는 것을. 방을 닫아야만 그는 무너지지 않았고, 역설적이게도 그렇게 해서라도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관계 심리학자 에스더 페렐(Esther Perel)은 “친밀감과 자율성은 관계에서 끊임없이 긴장 관계에 있다”고 말한다. 회피형 인간은 이 저울에서 자율성 쪽으로 무게중심이 크게 기운 사람들일 뿐이다.
나는 그 방을 억지로 열려고 애쓰는 대신, 문 앞에 머무는 연습을 하기로 했다. 기다림은 쉽지 않았다. 외로웠고, 때로는 이유 없이 화가 났다. ‘왜 나는 늘 여기서 기다려야 할까’라는 질문은 결국 나 자신에게로 돌아왔다.
그 과정에서 나는 깨달았다. 그의 침묵은 무관심이 아니라 보호 본능이었다는 것을. 그렇게 이해하고 나니, 조금 덜 외로워졌다. 사랑은 상대의 모든 문을 열어젖히는 정복의 과정이 아니었다. 때로는 닫힌 문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문 앞에서도 상대를 존중하며 머무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나는 이제 안다. 그의 방을 존중하면서, 동시에 내 안의 방도 소중히 지켜야 한다는 것을. 분석심리학자 칼 융(Carl Jung)은 “타인과의 만남은 곧 자기 자신과의 만남”이라고 했다. 그의 방 앞에 서서, 나는 비로소 나 자신의 방을 발견했다.
두 개의 독립된 방이 공존하며 서로의 거리를 긍정하는 관계.
그것이 내가 고통스러운 기다림 끝에 이해하게 된, 사랑의 형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