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냥꾼과의 대화/영화 한공주
어느덧 따뜻한 영국의 7월의 여름이 찾아왔다.
나에게 있어서 영국의 여름은 뜨겁지 않고, 따스하다.
이곳은 평균 기온이 25도 이내면 여름으로 여긴다.
내가 까불이와 5월에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누었었는데,
여전히 불편함과 두려움이 혼재되어 있었다.
마치 끝내야 한을 끝내지 못한 뭐 그런 느낌이라고 할까?
그와의 대화가 여전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나 고심하고 또 고심했다.
그러다가 2018년 (사)제주 YWCA의 성폭력 전문 상담원 양성 교육이 떠올랐다.
나는 아침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점심시간 1시간을 제외하고 2주 동안 고강도의 교육을 받았다.
출석 체크가 얼마나 엄격했던지 일명, 도망가거나^^. 또는 속이지 못하도록 출석체크를 아침, 점심, 저녁으로 총 3번을 했다. 20대의 교육생들도 힘들어 죽겠다고 할 지경이었다.
그 대신, 교육이 끝나면 상담원으로 현장에 투입될 수 있는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
나는 위기방암아동청소년 가정을 사례관리하는 사회복지사로서 그들을 더욱 효율적으로 지원하기 위하여 사비로 교육을 받았었다.
그때 배부된 자료와 강의 내용을 적은 노트를 훑었다.
혹시라도 영국에서 복지현장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 먼 곳 영국까지 끌고 왔다.
그 교육에서 가장 인상 깊게 남았던 것은 교육의 마지막날에 보았던 영화 “한공주”였다.
17살의 가정환경이 좋지 못한 여고생이 당한 비극적인 실제 사건을 기반으로 한 영화를 보면서 나는 몇 번이나 눈을 돌리고 싶었다. 열악한 환경아래 17살 여고생이 겪게 되는 성폭력과 그 이후에 벌어지는 세상의 질타를 보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영화를 보고 토론을 하는 과정에서 강사가 물었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나는 말했다.
“ 한공주에게 단 한 명이라도 비극적인 사건이 너의 잘못이 아니라고 제대로 응원해 주고 지지해 주었다면, 자살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물론 요즘은 법적 지원과 사회적 인식이 점차 나아지고 있지만, 여전히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혹은 가까운 이웃 사이에서도 가정폭력과 성폭력이 발생할 수 있다.
나는 교육자료를 다 본 후, 그 교육에 근거해 만일, 또다시 까불이? 아니 사냥꾼과 대면하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할지에 관하여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교육에서 배웠던 기술중에 한가지를 실천해보기로 결정했다.
나는 더 이상 그와 마주칠 때를 두려워하며 불안함에 떨거나, 혹시라도 위협적인 언어와 행동으로 나를 공격할때를 숨죽여 기다리고만 있지 않겠다고, 그대신 그의 공격에 적극적으로 대처를 할것이라고 다짐했다.
근처 슈퍼마켓에서 장을 본 후, 나는 무거운 장바구니를 끌고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제주도에서 언제나 마주했던 그 파란 하늘과 따뜻한 햇살이 오랜만에 반겨주는 것 같아, 발걸음은 어느새 가벼워졌다. 마치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다. ‘그래, 고진감래라더니 마침내 영국에도 이런 여름이 오는구나. 아이고, 행복해라~ 이젠 조금 살만하네~’라는 달콤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떠다니며, 나도 모르게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런데, 그 순간.
느닷없이, 그가 내 눈앞에 서 있었다.
순간 당황했다.
마치 그는 나와 이야기를 하려고 작정하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그래! 오늘이군!
오늘은 두려움과 직면해야 하는 날이군!
그래 정식으로 대면하고 일을 끝내야겠다 다짐하며 그의 두 눈을 쳐다보았다.
그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 :“너, 나를 피하는 것 같아”
나 :" 그래 너 말이 맞아"
그: “내가 뭐 잘못했니?”
나: “네가 나와 이야기를 할 때, 개인적인 공간을 무시하거나 내 몸에 손을 얹으려는 행동들이 나를 굉장히 불편하게 해!"
“그래서 안 그랬으면 좋겠어”
라며 나는 그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는 순간 당황했는지, 아무 말이 없었다.
아마도 기대한 행동과 답변이 아니었는가 보다.
그래서 나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나: “나는 네가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의 소유자인 것은 알고 있어. 그런데 그것도 사람에 따라서 다르게 행동해야 하지 않을까? 어떤 이에게는 친근하게 다가올 수 있지만, 나 같은 사람에게는 굉장히 불편한 일이거든.”
그가 대답했다.
그: “나는 네가 그렇게 느끼는 줄 몰랐어.”
나: “나는 아주 불편해.”
그: “조심할게.”
나: “알겠어.”
그렇게 아주 짧은 시간에 나는 그에게 나의 불편함을 단호하게 언급했고, 그는 조심할 것이라고 답했다.
물론 그 후로 딱 한 번 내가 외출해서 집으로 돌아올 때, 멀리서 다른 이웃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를 발견하고는 “Hello”를 외쳤지만, 눈이 나쁜 나는 도대체 소리가 어디서 나는 것인가? 라며 고개를 들어 멀리 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보았었다. 물론 다초점 안경을 쓰지 않아서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고 형채만 대충 보였다.
나는 집에 돌아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사실 두려움과 직면하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겨우 몇 마디 나누었으니까. 그러나 그것을 직면하기 위해 여러 날을 고민했고, 전략을 세웠다. 그리고 나는 마침내, 미처 끝내지 못한 일을 끝냈다.
생각의 생각이 꼬리를 물고 과거로 돌아갔다.
40대 말의 그녀는 20년 전, 남편의 가정폭력을 피하기 위해 3살짜리 딸을 데리고 무작정 육지에서 제주도로 도망쳐 왔다.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제주도로 피신했다. 아마 육지에 있었다면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에게 도망갈 수 없었기 때문이리라. 그렇게 갑작스럽게 도망쳐 오다 보니 남편과의 이혼이 성립되지 않은 상태로 20년 동안 살게 된 것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이혼에 필요한 모든 법적 정보 및 정신적 지지를 했지만, 결국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20년이란 시간이 흘러도 가정폭력의 상처는 깊고, 직면하기 두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내가 직장을 그만둔 후, 다른 복지사로부터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녀가 마침내 용기를 내어 두려움을 직면했고, 끝내지 못한 일을 끝냈다는 소식이었다. 또한 그녀는 내가 근무할 당시 그 일을 하지 못해서 복지사인 나를 너무 속상하게 했다면서 나를 만나면 반드시 자신이 너무 미안했다고 전해달라고 하셨다고 했다. 그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나는 속으로 외친다. “그래~ 이 맛에 사회복지를 하는 거야~~~”
나는 영국으로 역이민 온 후 1년이 지난 후, 진심으로 깨닫게 되었다. 왜 그녀가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두려움을 직면하지 못했고, 일을 끝내지 못했는지를 알게 되었다. 가정폭력을 당한 피해자가 가해자를 직면한다는 것은 아주 큰 용기가 필요함을 머리가 아닌 비슷한 경험으로 아주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