엇갈린 죽음
비가 그치고 도시는 오랜만에 맑은 하늘을 드러냈다. 따스한 햇살이 거리의 풍경을 부드럽게 감싸고, 내 마음에도 따뜻한 기운이 스며들었다. 나는 기분 좋게 시내 서점을 찾았다. 어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의 소년이 온다 (Human Acts)를 구입하기 위해 워터스톤 서점에 들렀다. 혹시 책을 살 수 있을까 했지만, 서점 직원은 어제 노벨문학상 발표 직후에 있던 단 한 권마저 이미 팔렸다며, 예약을 하면 일주일 정도 걸릴 것이라고 했다.
영문판이라 잘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한국에서 언니가 보내주는 책이 늦어질 것 같아 그냥 사기로 했다. 혹 읽지 못하더라도 딸에게 꼭 읽히고 싶었다. 노벨문학상 수상작이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더 큰 이유는 이 책을 통해 민주화 항쟁을 알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니 두 권을 사서 하나는 딸에게 주고, 하나는 내가 가지고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손에 쥐지는 못했지만, 초봄 같은 따스한 햇살과 파란 하늘을 즐기며 활기찬 시내를 거닐었다. 10월 초부터 영국의 날씨는 매일 춥고 을씨년스럽다. 특히 이번 주는 최고 기온이 11도, 최저 기온이 2도까지 떨어져 난방을 틀기 시작했다. 전기장판을 하나 사려고 알아보던 중, 아이샤에게서 WhatsApp으로 전화가 와 있었다.
TMI: 영국에서는 한국의 카카오톡처럼 무료로 이용하는 WhatsApp으로 문자와 통화를 한다. 가끔 아이샤는 도움이 필요하거나 안부를 전할 때 주로 이 앱을 이용한다.
그녀가 급한 일이 있었다면 문자를 남겼을 텐데, 그냥 전화만 왔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었을 것 같았다. 저번 주에도 전화가 와서 무슨 일인가 싶어 받았더니, 번호를 잘못 눌렀다고 했다. 아이샤는 나보다 성격이 훨씬 급해 가끔 급하지 않은 일도 급하다고 할 때가 있다.
그로부터 30분쯤 지났을까? 아이샤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이번에는 WhatsApp이 아닌 스마트폰으로 전화를 걸어왔다.
'뭐지?'
그녀의 목소리는 떨렸고, 울먹였다. "코니, 죽었대… 이웃이…" 아이샤의 강한 방글라데시 악센트와 빠른 영어, 두서없는 말투 탓에 무슨 말인지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이웃이 죽었다는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는 워, 워, 워 하며 그녀가 말을 천천히 할 수 있도록 가라앉히고 다시 물었다. "뭐라고? 누가 죽었다고?"
불안감에 목소리가 높아졌다. 요즘 론의 심장 상태가 나빠지고 있었기 때문에, 불안한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짧은 침묵 끝에 아이샤는 겨우 말을 이었다. "내 이웃 00가 죽었어. 나, 너무 슬퍼서 두 시간째 울고 있어…" 그녀의 목소리는 떨렸고, 감정이 북받쳐 울먹거렸다. 나는 일단 그녀를 안심시킨 후, 집에 가서 보자고 한 후, 전화를 끊었다.
그녀와의 대화를 끝낸 후, 나는 Greggs 베이커리로 들렸다.
보통 시티에 나오면 나는 론을 위해 그가 좋아하는 Greggs 베이커리 숍에 들러 소시지 롤이나 비프 코니쉬 파스티를 구입해 가져다 드린다.
오늘은 둘 중 어떤 것을 사야 할까 고민하다가 비프 코니쉬 파스티로 결정했다. 론의 최애 음식은 소시지 롤이지만, 건강을 생각하면 비프가 들어간 파스티가 더 적당할 것 같기도 했다.
'그래, 오늘은 비프 코니쉬 파스티다. 다음번에는 소시지 롤을 사다 드려야겠다.'라며 기쁜 마음으로 나는 걷기 시작했다. 나는 따뜻한 햇살과 파란 하늘을 조금 더 만끽하고 싶어서 걸어가기로 결정했고, 걸었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론이 아니라는 안도감이 밀려왔지만, 동시에 복잡한 감정이 스쳤다. 아이샤는 왜 이렇게 슬픔에 잠긴 걸까? 나에게는 그저 성가신 이웃이었지만, 아이샤에게는 어떤 존재였을까? 아마도 많은 도움을 준 소중한 이웃이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성가시다고 여긴 그가 말이다.
'그가 이렇게 갑자기 떠날 줄 알았다면, 조금 더 이해해 줄 걸 그랬나?' 죽음 앞에서 그에 대한 내 감정은 복잡해졌다. 이게 인간에 대한 연민일까? 그와 내가 같은 심장 질환을 앓고 있어서일까? 아니면 사회복지사라는 직업병일까? 혹은 그저 내 자만심일까?
혼자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하며 집으로 돌아온 나는 비프 코니쉬 파스티를 들고 론의 집으로 향했다.
론의 집 앞 게이트를 열려던 찰나, 앞집 여자 어르신이 나에게 달려왔다.
"론이 돌아가셨어. 오늘 오후 1시 40분에. 심장마비로. 네가 모를 것 같아서 알려주는 거야."
나는 순간 멍해졌고, 그저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세한 상황을 이어서 설명했지만, 내 머릿속은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찼다.
제기랄…' 속으로 욕이 나왔다. 도대체 뭐가 문제였지?
나는 멍한 채 그녀의 말을 듣고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 괜찮아?"라는 딸의 말에 그제야 울음이 터졌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그에게 줄 파스티를 고르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한쪽 다리에 장애가 있었지만 늘 건강한 마음을 가졌던 론, 정원 일을 좋아하고 환한 미소로 이웃들에게 기쁨을 주었던 그가 이제는 가난한 공공임대주택 단지에서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오랜 시간 사회복지사와 심리상담사로서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는 사람들을 도왔다. 시한부 환자의 마지막을 지켜보았고, 암 투병 중인 이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었으며, 심장마비로 쓰러진 사람에게 인공호흡을 하기도 했다. 나는 죽음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고 믿었다. 더 이상 낯설지 않다고, 이제는 감정이 무뎌졌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나만의 착각이었다.
인간이 어찌 죽음에 익숙해질 수 있단 말인가.
차마 버리지 못하고 냉장고에 넣어 둔 저 비프 파스티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