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첫눈 오는 날, 치매에 걸린 릴리와 나눈 긴 대화

"청소하는 일 할래?"

by 해피걸

타이틀: 첫눈 오는 날, 치매 걸린 릴리와 나눈 긴 대화

부재: "청소하는 일 할래?"


아침 일찍 Co-op 슈퍼마켓으로 향했다.
이틀 전부터 기온이 영하로 떨어졌고, 영국 전역은 폭풍우 경고가 내려졌다.
오늘 아침부터는 초속 45m 이상의 바람이 불며 소형 태풍 수준에 이르렀다.
결국, 나는 앞마당에 있는 쓰레기통들을 전부 눕혀야 했다.

오늘눈이올지도모른다고해서급히슈퍼에가는길.jpg 오늘 눈이 올지도 모른다고 해서 급히 슈퍼에 가는 길


그래서 햇살이 있을 때, 근처 슈퍼인 Co-op에 갔다.
간단히 몇 가지를 사고 나오려고 했는데, 슈퍼 안에서 릴리를 만났다.

릴리의 손에는 Sun 신문과 Walkers Prawn Cocktail Crisps, 그리고 영국식 컵라면이 들려 있었다.

릴리와내가좋아하는WakesPrawnCocktail.jpg 릴리와 내가 좋아하는 WakesPrawnCocktail


나는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엇, 나도 오늘 컵라면이 생각났는데!"

대신 나는 다른 Co-op에서 파는 컵라면(신라면, 수출용이라서 덜 맵다.)을 먹는다.

늘 그렇듯이 릴리는 나에게 물었다.
"너 어디 살아?"

예쁜 치매에 걸린 릴리는 자주 같은 질문을 반복한다.

날씨 이야기를 하며 계산대 앞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던 중, 내 눈길이 Mini Flapjack Bites에 멈췄다.
날씨가 추워서인지, 오트밀 바가 눈에 들어왔다.
보통 단 것을 잘 안 먹으려고 노력하는데(당뇨 전단계로 인하여 한번 놀란 후로 되도록이면 단것을 피하고 있음), 추운 날씨에 자연스럽게 눈길이 갔다.


릴리는 내 모습을 보더니 "사서 먹어"라고 말했다.
나는 "그런데, 너무 많아서 그것이 고민 중이야"라고 했더니,
릴리는 "나, 이거 좋아하거든. 그래서 내가 살게. 그리고 내가 너에게 몇 개 줄게"라고 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그녀의 말에, 나는 조금 의아했다.
'뭐지? 오늘은?' 평소와 다른 모습이었다.

보통 릴리는 신문을 포함해 3개 정도의 물건을 손에 들고 계산대에 가서 복권을 구입하신다.


나는 릴리에게 먼저 계산을 하라고 했다.

'어랏, 오늘은 릴리가 복권을 사지 않으시네'

릴리는 대답하셨다. "나는 이미 샀어. 그러니까 이번에는 네가 복권을 사"라고 말했다.

"나는 복권이 잘 안 맞아서 그래서 안 사"라며 거절했다.

그런데, 릴리는 "사, 그냥 사, 안 맞아도 사, 그렇게 사다 보면 당첨될 거야. 당첨되면, 우리 함께 싱가포르로 놀러 가자"라고 말씀하셨다.

오늘은 평소와 많이 다르시다.

결국 나는 1파운드짜리 스크래치 복권 한 장을 구입했다.

릴리는 늘 나에게 이야기하신다.

복권에 당첨되면, 꼭 싱가포르로 휴가 가자고 …….

릴리가권해서구매한스크라치복권.jpg 릴리가 권해서 구매한 스크래치복권


릴리는 영국에 60년 이상 살았지만, 여전히 싱가포르로 돌아가고 싶어 하신다.

부모님은 돌아가셨고, 이제 남은 건 형제자매들뿐인데도, 그곳에 가고 싶어 하신다.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싱가포르로 가는 것과 돌아가신 후에는 다르다"라고 말씀하실 때,

그 말은 치매에 걸린 분의 말 같지 않게 들린다.


그렇게 슈퍼밖으로 나온 릴리는 의자에 앉기를 원하셨다.

'엇 뭐지?' 보통은 신호등까지 걸어가서 우리는 헤어진다.

아마도 오늘은 조금은 긴 대화를 나누시고 싶으신 거구나.


그래서 나는 릴리와 함께 춥긴 했지만 햇살이 비추는 의자에 앉았다. 릴리가 방금 전에 슈퍼에서 Mini Flapjack bites를 주겠다고 했던 것을 잊으셔서, 내가 그 말을 다시 꺼내자 릴리는 과자를 주셨다.

치매로 인해 단기 기억력이 많이 떨어지신 것 같다.


2개만 달라고 했던 나에게 릴리는 5개 이상을 주셨다.
그 후, 본인도 하나를 입에 넣고 드시면서, 요즘처럼 추운 날에는 따뜻한 차와 함께 먹으면 달콤하고 기분이 좋아진다고 하셨다. 이런 말씀을 하실 때면, 나는 릴리가 치매에 걸렸다는 게 잘 믿기지 않는다.


릴리가나와함께먹으려고구입한MiniFlapjackBites.jpg 릴리가나와 함께 먹으려고 구입한 MiniFlapjackBites

2개를 드신 후, 릴리는 물으셨다.

"너 차 있니?"

어? 오늘은 평소와 다르게 물으셨다.
"왜?"

"네가 차가 있으면, 우리 함께 어디든 갈 수 있잖아."
"그런데, 왜 차가 없어?"
"직업이 없으니까. 직업이 있어야 차도 살 수 있지. 돈을 안 벌잖아. 그래서 차가 없어."
"그럼 직업을 찾으면 되잖아."
"나는 이곳에서 외국인이잖아. 게다가 나이가 60이 다 되어 가고, 요즘은 많은 일이 기계로 대체됐잖아. 그래서 내가 일자리를 찾는 것이 어려워."


가만히 듣고 계시던 릴리는 말씀하셨다.

"그래? 그럼 너 청소하는 일 할래? 인디언이 저가게를 샀대. 레스토랑을 만들고, 거기서 청소하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하던데?"

그녀가 가리키는 쪽에 있는 피자가계는 저녁부터 운영하는 곳이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는 그 집은 여전히 영업 중인데? 의아스러웠다.


"릴리, 저 집은 피자집인데? 영업을 하고 있는 곳인데, 저 집이 팔렸다는 거야?"

"그래 팔렸데"

나는 속으로" 그래 그럴 수도 있지. 요즈음에는 경기가 좋지 않아서 폐업하는 곳도 많고, 심지어 많은 상가가 임대한다는 안내문이 붙어있으니까, '그럴 수도 있지'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말했다.


"나 청소 잘 못하는데?"

"왜 못해? 그냥 쓸고 닦으면 되잖아."

"여자는 돈을 벌어야 돼. 돈이 있어야 돼"


그녀는 아마 젊었을 때부터 경제적으로 독립적인 성격이었을 거라고 짐작된다.

시티의 대형 보험회사에서 오랫동안 일하셨던 그녀는 똑똑하고, 깔끔한 성격이었을 것이다.

늘 함께 사는 아들내외가 정리정돈이나 청소를 하지 않아서 본인이 해야 한다며 손이 부르트신다고 자주 말씀하셨다.

그 말을 들으면서, 갑자기 돈을 벌지 못하는 나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잠시 후, 릴리는 길건너편을 가리키시며 말씀하셨다.

"저 파란색쓰레기통이 있는 집 보이지?"

"저 집이 인디언이 사는 집인데, 그 사람들이 끝에 있는 이쪽 집도 샀데, 진짜 부자지?"

"인디언들은 엄청 부자야"

"그러게, 다른 나라에서는 중국인들이 부동산을 많이 사는데, 영국은 다르네, 그런데 왜 그럴까?"

릴리는"나도 모르지"라며 나를 쳐다보셨다.


그리고 다시 릴리는 다시 길건너편을 가리키시며 말씀하셨다.

"저 파란색쓰레기통이 있는 집 보이지?"로 시작된 이야기는 다시 시작되었다.

조금 전에 말한 내용을 잊으시고, 똑같은 말을 하시는 모습의 릴리를 보며 나는 '정말로 피자가계가 없어지는 것은 맞는 건가? 혹시라도 과거의 일을 말씀하시나?'라는 의구심이 들었다.

순식간에바뀐하늘빛.jpg 순식간에 바뀐 하늘빛

릴리와 처음으로 긴 대화를 나눈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 어느새 파란 하늘은 자취를 감추고,

하늘에서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때 이른 11월 중순, 첫눈이 펄펄 내리기 시작했다.

첫눈이쌓인풍경영국공공임대주택단지에11월에처음으로 영국에 첫눈이 온날.jpg 첫눈이 쌓인 풍경영국공공임대주택단지에 11월에 처음으로 영국에 첫눈이 온날




keyword
이전 15화안될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