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삶과 기억을 되새기며
론의 장례식: 론의 마지막 여정
그의 삶과 기억을 되새기며
Continued.
"똑똑똑, 똑똑똑."
아침 9시 45분, 정확한 시간에 옆집 티나가 현관문을 두드렸다. 오늘은 론의 장례식에 가는 날이다. 론은 흉부 감염으로 인한 호흡곤란 끝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고, 그로부터 3주 만에야 장례식을 치르게 되었다.
론이 혼자 사시다가 돌아가셨고, 아침에 전동 스쿠터를 고치러 온 사람에 의해 발견되었다. 이로 인해 경찰 조사가 필요했고, 정확한 사인이 확인되기까지 시간이 걸려 장례식이 지연되었다. 만약 병원에서 돌아가셨다면, 장례식은 훨씬 빨리 진행되었을 것이다.
이틀 전부터 기온이 급격히 떨어졌다. 그래서인지 오늘 아침은 더욱 을씨년스럽고 차가웠다. 하늘은 두꺼운 회색 구름으로 뒤덮여 있었다. ‘이런 날씨는 론이 싫어했는데, 그나마 비가 오지 않아 다행이다.’
24년간 이웃으로 지내왔지만, 오늘 처음으로 옆집 가족의 차를 타고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론의 운구차는 오전 10시에 출발해 장례식장으로 온다고 했다.
차 안의 공기는 서늘했다. 티나, 폴, 그리고 케이티의 옷차림이 조금 얇아 보여 ‘추울 텐데’라는 생각이 잠시 스쳤다. 하지만 ‘어차피 우리는 화장터 옆 예배당에서 간단한 예식만 참석하고 돌아올 테니 괜찮겠지’라며 생각했다.
론의 스텝도터는 2주 전에 애도 모임(Wake) 참석 여부를 물어왔다. 티나네 가족과 나는 이웃으로서 장례식만 참석한다고 전했다. 스텝도터는 애도 모임에도 참석해 주면 좋겠다고 여러 번 권했지만, 우리는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우리와 스텝도터 가족은 특별히 친한 사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영국에서는 애도 모임은 주로 친척 위주로 참석하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론의 장례식은 화장터에 있는 작은 예배당에서 간단한 식을 올린 뒤, 바로 근처 묘지에 매장하는 방식으로 진행될 예정이었다. 5년 전 세상을 떠난 론의 부인이 이곳에 묻혀 있었고, 이번에 론도 그 위에 함께 묻히게 되었다. 영국의 묘지는 한국과 달리 수직 매장 방식이 일반적이라고 들었다. 다만, 묘지에 따라 수평 매장이 가능한 곳도 있다고 한다.
40명 남짓 들어갈 수 있는 어둡고 오래된 예배당은 다소 누추하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이는 시외에 위치한 넓고 현대적인 화장터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어차피 죽은 사람에게는 어디에서 장례식을 치르든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장례식은 장례지도사의 진행으로 시작되었다. 가장 먼저, 오래된 작은 CD플레이어에서 흘러나오는 "You Raise Me Up"이라는 노래에 맞춰, 론의 관이 4명의 장례 도우미들의 어깨에 의해 조심스럽게 운반되었다.
그 후, 생전에 그가 즐겨보았던 TV 드라마의 코미디언들이 부른 오래된 노래가 흘러나왔고, 이어서 그의 출생지와 성장 과정에 대한 간단한 소개가 이어졌다. 그가 남요크 출신임을 나는 물론이고 심지어 티나와 스텝도터까지도 몰랐었다.
그가 자란 곳은 자연경관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Peak District 국립공원이 인접한 South Yorkshire 지역이었다. 아하, 그래서 론이 그토록 정원 가꾸기를 사랑했었구나, 하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스텝그랜드도터가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한 짧은 글을 낭독하며 장례식은 마무리되었다.
짧게 진행된 약 20분의 장례식이 끝난 후, 사람들은 운구차가 떠날 때까지 모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우리와 다른 이웃들이 오지 않았다면, 론의 장례식은 훨씬 더 소박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이어서, 내가 죽으면 과연 내 장례식에는 몇 명이나 참석할까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어쩌면 내 장례식은 론의 것보다 더 소박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운구차가 떠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기온이 더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아직 오전 11시도 채 되지 않았으니, 기온이 더 추워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영국의 날씨는 낮 3시까지 계속 춥다가 그 이후부터 온도가 올라가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지금은 그 온화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티나의 딸은 추운지 몸을 떨고 있었다. 빨리 가야 할 텐데…. 지난주에도 감기에 걸려 일주일 내내 고생했었는데, 또 그러면 어쩌나 싶었다.
그때 갑자기 티나가 말했다. “혹시 매장을 마친 후 애도 모임에 잠시라도 들러서 차 한 잔만 하고 오는 게 어떨까?”나는 왜 그러냐고 물었다. 그러자 티 나는 스텝도터가 다시 한번 부탁했다고 말했다.
원래 애도 모임에 참석하기로 했던 10명 정도가 갑자기 올 수 없게 되었다고 했다. 집에서 준비한 음식도 남을 것 같고, 무엇보다 애도 모임이 너무 초라해질 것 같아 걱정된다고 했다. 결국, 마음 약한 티나는 나를 설득하며 함께 가자고 했다.
솔직히 나 혼자 시티에 가겠다고 하고 떠날 수도 있었다. 이곳은 시내와 가까워 버스를 타거나 걸어서도 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숨이 나왔다. “하아... 어떡하지...” 만약 장례식에 오래 머물게 된다면 기분이 더 우울해질 것 같았다. 그래도, 어차피 여기까지 왔으니 끝까지 함께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결국, 티나의 가족과 나는 화장터 근처에 있는 묘지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고인의 시신을 매장하는 과정을 함께하며 론을 마지막으로 보내는 시간을 가졌다.
론의 애도 모임은 근처에 있는 작은 펍에서 이루어졌다. 규모는 작았지만, 내부는 리모델링을 한 듯 깔끔하고 단정했다.
펍의 한 모퉁이에 놓인 탁자 위에는 론과 그의 아내의 결혼식 사진이 하나 세워져 있었다. 사진 속 론은 깨끗한 정장을 차려입고 가슴에 작은 꽃을 달고, 공무원 앞에서 간단히 진행된 결혼식을 기념하는 모습이었다.
그때 론은 총각이었고, 그의 아내는 세(열한 살, 7살, 5살) 아이를 둔 싱글맘이었다.
두 사람은 어떤 모임에서 몇 번 만났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론이 살고 있는 지금의 집 공공임대주택으로 아이들을 모두 데리고 들어왔다고 했다. 그때 아내는 마땅히 살집도 없었고 혼자서 키울 자신도 없었던 것 같다고 했다.
결국 그렇게 시작된 조금은 황당한 인연은 결혼으로 이어졌고, 론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아내의 세 아이들을 함께 키우게 되었다고 했었다.
그 옆에는 론이 신문에 실린 자신의 정원 관련 기사를 오려 액자에 넣은 것이 세워져 있었다. 또, 고인을 추모하며 메시지를 남길 수 있는 작은 메모리얼 노트도 놓여 있었다.
그 후, 스텝도터가 집에서 만든 음식들이 넓은 테이블에 진열되었고, 펍에서 준비한 주문 음식들도 함께 놓여 있었다. 사실 우리는 따뜻한 차를 마신 후 곧 자리를 떠날 생각이었지만, 스텝도터의 설득에 의해 점심까지 함께 하게 되었다. 결국 우리는 그곳에서 그들과 점심을 먹었다.
그 후, 그를 기리는 메모리얼 노트에는 폴, 티나, 케이티 가족은 “Go for it, and make most of it”이라고 남겼고(론은 평상시에 20살짜리인 케이티에게 해준 말이었다고 함), 나는 “I will remember your strength, your positive mindset, and your always smiling face”라고 적은 후 애도 모임을 떠났다.
장례식이 시작될 때, 마음이 무겁고 슬펐다.
그러나 애도모임을 마치며, 티나 가족과 나는 론이 더 이상 아프지 않고 평화로운 쉼을 얻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였고, 그의 유언대로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묻히게 되어 안도감을 느꼈다.
생전에 농담처럼 자주 하던 말이 떠올랐다. '내가 죽으면 말이야, 아내보다 위에 누울 거야. 알지? 이걸 벙커 베드(bunk bed)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 내가 항상 그녀 위에 있을 거라고!^^' 그 말이 현실이 된 것 같아 묘하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비록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고, 그들의 엄마가 돌아가신 후 몇 년 동안 스텝도터와 가족들이 그를 찾지 않았다고 들었지만, 론이 세상을 떠난 후, 그들은 론의 집을 정리하고 장례식을 준비하며 그의 뜻을 존중하여 아내와 함께 묻히게 해 주었다.
추운 12월이 아닌, 다행히도 따뜻한 10월에 론은 고통 속에서 떠나지 않고 평화롭게 생을 마감할 수 있었다. 이제는 론이 남긴 시간과 흔적들이, 티나 가족과 나에게 아픈 기억이 아닌 따뜻한 기억으로 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