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틀 동안 악몽에 시달렸다.
6개월이면 끝날 것 같았던 영국의 역이민 생활은 끝날조짐이 보이기는커녕, 날마다 새로운 일이 터진다.
너무 힘들어서 한국의 지인께 전화를 드렸더니, 본인이 생각하기에는 아무래도 1년은 걸릴 것 같다고 하셨다.
나 역시 동의한다. 제기랄 ㅠㅠ심지어 딸의 컴퓨터까지 고장이 나버렸다. 요즈음은 입만 열면 씨씨 거린다.
역시, 나는 욕을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욕을 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영국사람들은 크리스마스 때 1~2주 정도의 휴가를 낸다.
이때는 멀리 떠나 있던 가족들을 만나고, 먹고 쉬면서 삶을 축하한다. 또한 한 해를 마무리하는 동시에 새롭게 시작하는 새해를 준비한다.
영국사람들에게 크리스마스는 한국의 추석 또는 설날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11월 17일부터 도시 전체는 크리스마스트리와 조명을 밝히며, 연말의 분위기를 한껏 돋우기 시작했다.
그 불빛아래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은 잔뜩 상기되어 있고, 양손에는 각양각색의 선물용 쇼핑백들이 들려져 있다.
다들 행복해 보인다.
누군가는 한껏 행복에 취해 있을 때,
나의 지인은 차가운 대학병원 문턱을 넘을 것이다.
Continued
그녀는 멋쩍어하며, 거실 한구석에 놓인 작은 탁자 앞으로 안내했다.
탁자 위에는 나와 만날 때, 구입해 온 과일들이 있었다.
아들이 아직 학교에서 돌아오지 않아서인지, 시장을 본 후, 정리를 미룬 채(그녀의 성격상 그러지 않는데..)
Hot Woter Bottle을 끌어안고 있었는가 보다.
커피를 달라는 나에게 디카페인밖에 없다며 괜찮다고 하면서, 키친으로 향했고,
그동안 나는 그녀의 거실에 걸려있는 그녀의 아들사진을 둘러보았다.
잘 컸네! 듬직한 청년의 모습으로 자란 그의 얼굴에는 아기 때 모습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녀는 나를 위한 커피를 그리고 그녀를 위한 따듯한 홍차를 큰 머그잔에 담아 양손에 들고 들어왔다.
그녀: "거실이 춥지?"
나: "우리 집도 추워. 그나마 저번주보다는 덜 춥다"
그녀: "아들이 학교에서 오면, 그때 난방을 틀어. 난방비 때문에 우리 집은 하루에 1번만 틀어. 2시간~3시간 정도로. 난방비가 너무 비싸어. 너네는 어때?"
나: "우리 집은 아침 3시간 저녁에 3시간 틀어. 한국에서 너무 따듯하게 살아서. 이곳에 적응하는데 시간이 필요해. 그런데, 저기 있는 디지털피아노는 누가 쳐?"
그녀: "아들이 쳐. 6살부터 가르쳤는데, 피아노 치는 것을 좋아해"
나: "아들과 많이 닮았네"
그렇게 가볍게 시작된 대화는 조금 무거운 대화로 이어져 나갔다.
나:"너의 병에 관해서 조금 더 이야기해 줄래?"
그녀:"굳이 이야기할 것도 없어"
나:"너는 괜찮니? 많이 울었어?"
그녀:"응. 그런데, 운다고 해결될 것도 아니고... 처음에는 너무 황당했어. 그냥 몽우리가 생겨서, GP 찾아간 거거든. 그런데, 갑자기 이상하다며, 바로 병원으로 연결해 주었고, 내가 유방암에 걸렸다고 했고... 너무 놀랬어. 그리고 내가 설마 암환자가 될 줄은 몰랐어. 우리 집안에는 암환자가 아예 없어"
나:"많이 힘들었겠다"
그녀:"응, 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제발 전이가 되지 않았기를... 1월에 대수술을 한다는데, 무섭고..."
나: "마음이 많이 힘들 때에는 어떻게 하니?"
그녀:"그냥 혼자서 울기도 하고, 왜 내가 암에 걸려야 하는지 억울해하기도 하고..."
나: "뭐가 가장 걱정이니?"
그녀: "12월 27일은 1시간밖에 안 되는 간단한 시술이라서 크게 걱정하지 않는데, 1월에 하는 수술이 많이 아플까 봐 걱정이 돼. 아픈 것은 싫거든"
나: "1월 수술하고, 3일 동안 병원에 있잖아. 그동안 너의 아들이 저녁을 우리 집에 와서 우리랑 함께 하는 것은 어떠니? 나야 우리 집 저녁 만들 때, 1 사람분만 더 하면 되니까"
그녀: "아니야, 괜찮아, 아들은 이제 만 18세가 되어서 성인이야. 그래서 자신이 먹을 저녁거리는 해결할 수 있을 거야. 만들어 먹는 것은 안 되더라도, 인스턴트식품 사다가 전자레인지에 돌려 먹으면 되니까. 아침은 간단한 시리얼을 먹고, 점심은 학교에서 점심으로 사 먹고 오니까, 괜찮아"
나: " 다행이네, 아들이 이제 성인이 되어서"
그녀: "어,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왜냐하면, 수술 후에 병원에서 퇴원한 후, 집에 돌아왔을 때, 집안에 성인이 없다면, 수술 후의 상황을 관찰해야 하는 성인을 따로 두어야 하거든. 아들이 이번에 성인이 되어서 굳이 그럴 필요가 없거든. 다행이야"
나:"1월 수술 후 어떻게 할 거래?"
그녀:"방사능치료를 할지, 항암치료를 할지는 1월 수술이 끝난 후, 알게 될 거래"
나: "네가 바라는 것은 뭐니?"
그녀: "다 잘되었으면 좋겠어. 그런데, 만일에 내가 원하는 대로 안되어도, 딱 5년만이라도 살고 싶어. 아들이 대학을 졸업하는 날까지만 이라도..."
나:"1월 수술 후, 네가 집에 왔을 때, 힘든 일이 있거나,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나에게 말을 해. 지금 일하고 있지 않잖아.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말고 말해"
그녀:"고마워"
그녀의 고맙다는 소리에 나는 이야기의 주제를 바꾸었다.
그녀는 그녀의 감정을 주저리주저리 떠드는 편이 아니기도 하고. 현재의 상황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려고 노력하고 있다.
아마도 나라면, 울고 불고 난리도 아니었을 텐데... 가끔씩은 그녀의 삶을 대하는 방식을 닮고 싶을 때가 있다. 삶을 살아가다 보면, 느닷없이 벌어지는 사고와 질병은 어쩔 수가 없다. 단지 받아들일 수밖에...
그녀의 아들은 그녀의 품성과 생활태도를 닮아서 잘 자랐고, 앞으로도 잘 살아갈 것이다.
제발 그녀의 바람처럼, 최소한 5년 동안이라도 살아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를 바라며, 그녀의 집을 나섰다.
그날밤 나는 2008년 10월 악몽으로 휩쓸려 들어갔다.
시아버님께서 한 달 정도 기침이 멈추지 않으셨다.
처음에는 감기인 줄 알았다.
영국에서는 감기는 병도 아닌 것으로 치부된다.
보통 기침이 2주 정도 지나도 멈추지 않으면, 동네의원급인 GP가 만나준다. 그렇게 만난 후, 2주 정도 더 지켜본 후, 그래도 안 좋으면, 그때 항생제를 처방해 준다.
15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영국의 NHS는 무료다 그러나, 기다려야 한다.
그래서 기다리다가 죽는다.
단 좋은 점도 있다. 연명치료는 하지 않아도 된다. 아니 못한다.
항생제가 듣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시아버님은 처음으로 대학병원으로 가서 엑스레이를 찍을 수 있었다.
이곳은 엑스레이기계조차 대학병원에 가서 찍어야 한다. 물론 몇 가지 의료시설이 있는 특수한 의원도 있지만, 대부분은 전부 도시에 1개 있는 대학병원에서 다 처리한다.
그래서, 액스레이 1장 찍는데, 최소 1달 아니 2달이 걸릴 수도 있다. 제기랄ㅠㅠ.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엑스레이를 찍으러 가셨던 날,
우리 가족은 병원으로부터 시아버님의 췌장암 말기 선고를 통보받았다.
그때 시아버님께서는 60살 생일파티를 지낸 지 겨우 3달도 채 지나지 않았었다.
난데없이 죽음이 찾아왔고,
우리 가족은 그저 망연자실하는 것 외에는 달리 할 것이 없었다. 겨우 할 수 있었던 것이 지극히 높으신 그분께 간구드렸다.
딱 5년만 살게 해달라고, 아니 1년만 살게 해달라고, 만일 그것도 안 되면, 딱 크리스마스까지만 살게 해달라고 매달렸다.
그러나, 18개월 된 나의 딸이 이쁘다녀, 눈이 닿도록 쳐다보시던 시아버님은 췌장암 선고를 받은 후, 겨우 3달도 살지 못하시고, 크리스마스 2주 전에 돌아가셨다. 아이러니하게도, 친정엄마도 심장병으로 12월에 돌아가셨다.
그래서 나는 12월 싫다.
을씨년스러운 영국의 날씨와 죽음은 아주 많이 닮아있다.
나는 이틀 동안 악몽에 시달렸다.
그녀의 상황과 과거의 고통이 떠올라서... 차가운 12월의 죽음은 그리 만만치 않았다.
인생을 살다 보면, 갑자기 맞닥트린 사건과 사고는 피할 수 없다. 그러한 축복은 모든 이들에게 주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단지, 그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를 달라고 기도하는 수밖에...
그녀가 조금 덜 아프기를... 46살밖에 되지 않은 그녀에게 조금 더 삶의 시간이 주어지기를 바라며... 그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생각하기 시작했다.
tmi: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소명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죽음을 보고, 죽어가는 이들 옆에서 잠시 있어주는 자원봉사자의 역할을 많이 했다. 나의 나이 30살부터 시작했으니, 벌써 25년이 넘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적응을 했는 줄 알았는데, 역시나 죽음은 여전히 낯설고, 어렵다.
가끔씩, 나는 더 이상 죽음의 소식을 몰랐으면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