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 제네바 사무국UNOG: United Nations Office at Geneva으로 들어가려면 광장을 지나 길을 따라 더 올라가야 한다. 올라가다 보면 왼편 언덕에 위치한 국제 적십자 위원회ICRC 본부가 보이고 오른편에 유엔 제네바 사무국의 입구가 나온다. 입구를 통과해 방문증을 발급받고 본부 안으로 들어간다. 일단 안으로 들어서면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해진다. 대지가 워낙 커야 말이지.
아름다운 알프스와 레만호가 내다보이는 이 넓은 명당자리는 레빌리오드 드 리벳Revilliod de Rive 가문의 구스타브 레빌리오드Gustave Revilliod (1817-1890)가 제네바에 기부한 땅이다. 이곳은 아리아나 공원Ariana Park이라 불리는데 그의 어머니의 이름을 따온 것이다. 대지는 무려 46만 제곱미터 규모이다. 지금 이곳에 무수히 많은 나무와 함께 세계 평화를 위한 사무실들이 자리하고 있다.
중앙출입구에서 보안 검사를 마치고 나오면 정면에 대회의장Assembly Hall의 파사드가 보이고 주변으로 여러 건물이 보인다. 사실은 건물 대부분이 이어져 있다. 팔레 데 나시옹은 600미터 길이로 30개가 넘는 동시통역이 가능한 회의실들과, 사무실들로 이뤄져 있다. 필요에 따라 증축되어 지금의 모습을 하고 있다. 내 앞에 대회의장의 모습이 보이지만 건물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통로는 아니었다. 나는 언제나 우왕좌왕하다가 대회의실Council Chamber 쪽 누군가 열어주는 문으로 들어가고는 했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기증받은 예술품들과 벽화들로 가득한 복도를 걷다 보면 마치 미술관에 온 듯하다. 하지만 하이라이트는 따로 있다. 바로 스페인 작가 미켈 바르셀로Miquel Barceló가 꾸민 국제회의실이다. 로마 표기로 스물을 뜻하는 XX로 불리던 이곳은 2008년 새롭게 꾸며지면서 인권과 문명 연대의 방The Human Rights and Alliance of Civilizations Room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이 국제회의실은 제네바 사무국에서 가장 큰 회의실이다.
다양함diversity 그리고 다문화를 상징하는 이 작품은 웅장한 회의실의 둥근 천장에 화려함을 더했다. 사실 유엔 사무실의 내부는 조금은 칙칙하고 오래된 듯한 느낌이다. 그런 건조한 공간에 있다가 문을 열고 들어가면 나오는 웅장하고 화려한 색채의 회의실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칙칙함과 화려함, 그리고 낮은 천장과 높고 둥근 천장 — 이 극과 극의 대조되는 분위기 때문에 이 공간에 들어서면 압도당하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마치 바닷속에 있는 듯, 아니면 환상 속의 동굴 안에 있는 느낌도 든다. 물론 그 규모와 화려한 모습만큼 어마어마한 돈이 들었다. 이 돈을 예술이 아닌 구호 활동에 썼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비판의 목소리 역시 컸다.
제네바 사무국에 방문할 때 내가 언제나 제일 먼저 가는 곳은 남쪽 동 2층에 위치한 대표자 라운지Delegates’ Lounge라고도 불리는 스위스 라운지Swiss Lounge이다. 내가 좋아하는 프레스코 스타일의 벽화들로 가득한 곳인데, 은은한 색채의 그림들은 분주한 마음을 평안하게 한다. 작은 매점도 하나가 있는데 커피와 빵 또는 가벼운 간식거리를 사서 먹기 좋다. 간단한 만남을 갖기에 더 나은 곳이 없다. 그리고 혼자 기다림을 갖는 곳으로도 딱 맞다.
높은 층고의 라운지 사방을 매운 벽화는 카를 오토 휘긴Karl Otto Hügin (1887-1963)의 그림들이다. 한 벽면에는 성 조지St. George와 용, 선과 악의 싸움, 성 마틴St. Martin 그리고 착한 사마리아인의 좋은 목자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다른 벽면에는 스위스의 역사적인 장면 3개가 그려져 있다 — 스위스 연방을 처음 이룬 세 개의 칸톤, 우리Uri와 슈비츠Schwyz 그리고 운터발트Unterwalden가 1291년 8월 1일에 작성한 뤼틀리 선서Rütli Oath; 용기와 담대함의 상징인 윌리엄 텔William Tell; 지혜와 신중함의 상징인 니콜라 드 플뤼Nicolas de Flüe (1417-1487)의 모습이다. 그리고 호수 쪽 벽면에는 전쟁 희생자의 모습이 담겨 있다.
라운지에서 약속 시간을 기다리며 벽화들을 둘러보고 있다 보면 엘리자베스가 나를 맞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