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월 2일
날이 좋을 때면 내가 살던 서스위스 보Vaud 칸톤의 작은 마을 버티니에서는 몽 블랑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해가 질 녘, 푸르른 하늘과 붉은 태양의 빛깔이 서로 섞일 때면 그 아름다운 광경이 절정에 다다른다. 우아하고도 웅장한 몽 블랑은 그렇게 잊지 못할 모습으로 내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다. 스위스는 정말이지 축복받은 곳이다. 우리나라의 절반도 안 되는 면적을 가졌지만 스위스에서는 어디를 가든지 어렵지 않게 그림 같은 아름다운 풍경과 마주하게 되니 말이다.
스위스는 다양한 민족들이 모여 동맹을 맺고 공동체를 만들었다. 이름하여 헬베티아 연방. 이를 라틴어로 하면 콘페더라치오 헬베티카Confoederatio Helvetica, 바로 스위스의 공식 국가 명칭이다. 이 라틴어 표기의 앞 자를 따서 스위스의 고유 기호, ‘CH’가 나온 것이다. 여러 민족이 모인 만큼 공식 언어 역시 여러 개다 —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그리고 로망슈Romansh어. 스위스의 모든 공문서는 이 네 가지 언어로 표기되어 있다. 물론 불편함은 있겠지만 오랫동안 다양한 민족들이 함께 지내서인지, 서로 다름을 이해하고 소통하며 어렵지 않게 연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들은 이렇게 이뤄낸 연합으로 영구중립을 지키며 세계 평화에 이바지했다.
이제 제네바로 가보려 한다.
버티니에서 호수가 보이는 방향으로 들판을 지나 쭉 내려가다 보면 인구 1천 6백여 명이 사는 벤닝Begnins이라는 작은 마을이 나온다. 학교와 우체국, 약국과 정육점 그리고 빵 가게 등 조그마한 상점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그 마을을 지나 계속 내려가면 1만 3천여 명이 사는, 호수와 맞닿은 소도시 글랑Gland이 나온다. 중심가는 호수와는 조금 거리가 있는데, 글랑은 기차역과 스위스 동서를 잇는 고속도로 그리고 은행과 큰 상점들이 즐비해 있는 꾀나 규모가 있는 곳이다.
글랑에는 세계자연기금WWF: World Wide Fund for Nature 본부가 있는데 그들은 1960년대부터 멸종 위기의 야생동물을 보호하기 위한 일에 앞장서 온 단체이다. 자이언트 판다 모양의 로고로 유명한 단체이기도 하다. 그리고 세계자연기금 보다 일찍 유엔의 지원을 받아 동식물 및 자연보호에 앞장선 국제자연보호연맹IUCN: International Union for Conservation of Nature and Natural Resources의 본부 역시 글랑에 위치한다.
글랑에서 호수를 끼고 남서쪽으로 1번 국도를 따라 6분 정도 달리면 글랑 보다 규모가 큰 도시인 니옹Nyon이 나온다. 니옹은 2만여 명의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조금은 활기찬 곳이다. 우리에게는 챔피언스리그를 주관하는 단체로 알려진 유럽축구연맹UEFA: Union of European Football Associations의 본부가 위치한 곳이기도 하다.
니옹은 로마 시대 정치가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 (100 BC - 44 BC)에 의해 세워진 — 당시 노비오두눔Noviodunum으로 알려진 — 도시란다. 1996년이 돼서야 로마 시대 원형극장의 유적을 발견했다는데, 언덕 위로 보이는 로마 시대 기둥의 모습은 과거에 이곳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인상을 준다.
니옹에는 성이 하나 있다. 13세기에 지어진 이 성은 사보이 백작Counts of Savoy에 의해 로마 시대 유적지 위에 지어졌고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성곽 위에 서면 저 멀리 알프스산맥과 몽 블랑의 우아한 자태 그리고 레만호의 아름다움을 한눈에 느껴 볼 수 있다. 이 도시의 진가는 해가 긴 여름이 되면 확실하게 볼 수 있다. 많은 이들이 호숫가에 나와 여름의 따사로운 햇살을 즐기고 여유를 찾는다. 유람선을 타고 호수 반대편의 프랑스 마을인 이브아Yvoire에 다녀올 수도 있다. 한쪽에는 야외 수영장도 있어 무더운 여름의 더위를 피하고 싶어 하는 많은 이들을 니옹으로 끌어들인다. 니옹은 스위스 시골 마을에서 지내는 내게 조금이나마 도심의 느낌을 주는 곳이다. 큰 쇼핑몰과 거리의 사람들 그리고 주말마다 열리는 시장의 분주한 모습은 도심에 대한 나의 그리움을 조금이나마 달래주었다.
성에서 내려와 오래된 건물들 사이의 좁은 골목을 따라 내려오면 호수와 맞닿은 거리가 나온다. 길가에는 낮은 플라타너스가 줄지어 심겨 있고, 작은 배들이 정박해 있다. 그리고 성 위에서 바라본 모습과는 다른 호수의 모습이 나타난다. 특히 호수 북쪽 커다란 나무가 보이는 둑 끝에 있는 등대 아래 서면 호수와 그 뒤의 쥐라Jura산맥 그리고 니옹 도심의 고즈넉한 모습까지, 마음을 편안하게 만드는 광경을 즐길 수 있다. 이는 다시 한번 스위스가 얼마나 축복받은 곳인지, 또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었던 곳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니옹에서 다시 레만호를 따라 달린다. 호수의 모습은 사라지고 들판이 나온다. 그리고 들판을 지나면 다시 호수가 나타나고 작은 호수마을 하나가 나타난다. 보 칸톤을 지나 제네바 칸톤에 들어서면 도시 코페Coppet가 우리를 맞이한다. 나지막한 집들 사이에 오래된 종탑 하나가 우뚝 솟아있다. 차를 타고 종탑을 통과할 수 있는데 그냥 지나치기에는 너무나 아쉬워지는 그런 곳이다. 이 길을 나설 때면 그냥 지나칠 수 없기에 여유가 있는 날이면 나는 도롯가 작은 빵 가게에 앉아 크로와상과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고는 했다.
거의 다 왔다. 코페에서 15여 분만 더 가면 레만호 끝자락에 있는 스위스 제2의 도시, 제네바에 들어서게 된다. 제네바 외곽의 도시인 베르수아Versoix에서 마지막 로터리를 지나면 1번 국도의 도로명은 스위스 길Route de Suisse에서 로잔 길Route de Lausanne로 바뀐다. 곧 고속도로에서 나오는 차량까지 밀려들어 정체가 시작된다. 교통체증은 도심의 기분을 연출하지만 나는 이에 줄곧 싫증이 나버린다. 제네바에는 20만여 명이 살고 있고 프랑스 지역까지 포함한 제네바 도심지역에는 90만여 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 제네바로 출퇴근하는 인구까지 더하면 그 수는 120만 명이 넘는다. 그 가운데 40퍼센트가 외국인이며 제네바에는 170여 개 나라를 대표하는 이들이 살고 있으니 진정한 국제도시의 면모를 보여준다.
로잔 길을 따라가다가 제네바 시가지로 들어서기 전에 1919년 세계노동기구ILO: International Labour Organization의 초대 사무총장이었던 앨버트 토마스Albert Thomas (1878-1932) 기념비가 나온다. 기념비 맞은편에는 세계무역기구WTO: World Trade Organization가 자리하고 있고, 그 삼거리에서 오른편 페이 거리Avenue de la Paix로 향하면 제일 먼저 세계기상기구WMO: World Meteorological Organization가 나온다. 그리고 네이션스 광장Palais des Nations으로 가까이 갈수록 다른 유엔 산하기관들이 하나둘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