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 밤, 무슨 얘길 할까 생각했다. 내가 생각하는 아이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정리해 봤다. 칭찬을 해주시면 그저 감사하다고 웃으면 그만인데, 안 좋은 얘길 들으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생각해 봤다. 여쭤볼 것들을 몇 가지 정리해 두었다.
'선생님이 잘 이끌어가 주시겠지.'라는 생각만 하고 갔다가 말 없는 선생님을 만나면 서로 난처하니 선생님께 기대지 말고 내가 여쭤볼 걸 잘 얘기하고 듣고 오자 생각했다.
어린이집, 유치원 학부모 상담은 심각한 문제아가 아닌 이상 거의 칭찬 일색이라 아주 긴장되지는 않았다. 어린이집, 유치원 선생님들의 상냥한 말투가 긴장을 풀어주시는 데 한몫한다.
초등학교 상담은 유아기 때와 조금 달라서 조금 개선할 필요가 있는 부분을 미취학 때보다 더 솔직하게 얘길 해주신다. 담임선생님 성격 따라 말투도 천차만별이다. 그래도 대개는 부모님이 오시면 매너 있게 공손한 말투시지만 간혹 중간중간 짜증 섞인 말투나 무미건조한 말투인 선생님도 계신다. 그래서 초등학교 학부모 상담은 무척 긴장된다.
전화로 할까도 했지만 어린이집, 유치원과 다르게 초등학교는 지금이 아니면 아이 담임선생님을 눈앞에서 대면할 일이 거의 없다. 공개수업 때 교실 뒤편에 서서 보기는 했지만 눈도 안 좋고 멀리 계시니 선생님 얼굴이 자세히 기억도 안 난다. 어떤 선생님이신지 궁금한 마음도 있어 방문 상담을 신청했다. 그런데 올해는 왜 이렇게 유난히 떨리는 건지......
공개수업 때, 엄청 차분한 말투가 인상적이었던 선생님이셨다. 괜찮은 담임선생님을 만난 듯하여 안심이 되었다. 그런데 막상 1대 1로 대면 상담을 하려니 과연 어떤 말씀을 해주실지 걱정이 됐다. 무조건 칭찬만 해주실 스타일이 아니어 보여서 더 긴장된 것도 있고, 작년 담임선생님이 지금껏 보지 못했던 스타일이라 속으로 당황했던 기억도 있기에 더 그랬다.
교실로 올라가기 전에 너무 목이 타서 화장실에서 입을 헹궜다. 하교하는 한 아이가 건물을 나가기 전에 화장실 앞에 있는 음수대에 입을 갖다 대고 물을 마시길래 그 아이가 가고 나서 거기서 나도 물을 살짝 마셨다. 회사 면접을 봤을 때도 이 정도로 떨린 적은 없었다. 내 얘기를 해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 자식에 대한 평가를 들으러 가는 길은 더 두근대는 것 같다. 3층 건물까지 계단을 걸어 올라가다 중간에 멈추고 잠시 서니 심장 뛰는 느낌이 온몸에 전해질 정도로 크게 느껴졌다. 심호흡을 몇 번 하고 교실 앞에 도착했다. 옆반 선생님이 상담하고 계시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 반은 고요했다. 창문에 뭐가 발려져 있어 교실 안이 보이지 않았다. 5분 일찍 도착한 나는 약속 시간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앞문을 노크했다.
"네."
라는 소리가 들려서 문을 열었다.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드렸다. 선생님도 일어나셔서 인사를 하셨다. 나를 선생님 앞에 있는 학생 자리로 안내해 주셨다. 자리에 앉으면서 다시 인사를 드렸다.
"○○ 어머니 되시죠?"
선생님이 물으셨다. 인사하면서 누구 엄마라고 얘기해야지 생각했었는데 긴장해서 또 깜빡했다. 맞다고 말씀드리고 상담이 시작됐다.
"혹시 상담을 신청하신 이유가 있을까요?"
선생님께서 여쭤보셨다. '잘 지내고 있어서 상담을 굳이 할 필요가 없는데.'라는 뉘앙스로 느껴졌다.
"아... 매일 학교생활 어떤지 물어보고 듣고는 있는데, 그게 다가 아닐 수도 있으니까 선생님 말씀도 들어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음... (미소). ○○는 이해력도 좋고, 해야 할 것들을 또 빨리 잘 끝내는 편이에요. 그런데 빨리 끝내다 보니 끝마무리가 꼼꼼하지 못할 때가 좀 있습니다. 그리고 빨리 끝낸 친구들은 책을 읽으라고 하는데, 가끔 주위 친구랑 쳐다보고 장난을 친다든지 지우개 가루를 모아서 뭉치고 있다든지 그런 모습이 있습니다. 그 점만 잘 얘기해 주시면 될 것 같아요."
저 이야기를 하시는데 계속 미소를 보이시며 얘기하셨다. 고쳐야 할 점을 마지막에 여쭤보려고 했는데, 첨부터 얘길 해주셔서 속으로 조금 당황했지만 내가 아는 아이 모습과 어느 정도 매치가 돼서 집에서 많이 얘기하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더 이야길 하실 생각이 없어 보이셨다. 그래서 친구 관계나 규칙을 잘 지키는지 등을 여쭤봤다. 성격이 좋아서 트러블 없이 두루두루 잘 지내는 편이고, 발표도 잘하고 얼마 전에 연극을 했는데 대사를 실감 나게 잘 표현하더라며 칭찬도 해주셨다.
한 가지 몰랐던 사실은 집에서는 책을 끼고 사는 아이인데, 학교에서는 책을 거의 읽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책을 좋아하는 것 같지는 않다고 하시면서 책보다는 뭔가 만드는 걸 더 좋아하는 것 같다고 하셨다. 1, 2학년 때 생활 통지표에는 늘 책을 가까이한다고 쓰여있어서 더 의아했다. 그래서 집에서는 책을 많이 보는 편이긴 한데, 학습 만화책이 재밌으니 작년 중반부터 집에서는 거의 그런 책만 계속 보고 있고, 글책은 엄마가 앞부분을 읽어주면 뒷부분이 궁금하니 보는 편이라 학교에서만이라도 글책을 읽으라 했다고 말씀드렸다.
"학교에서도 책을 잘 읽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네요..."
라고 얘길 했다. 담임선생님께서 글책이 더 좋지만 학습 만화면 만화책도 학교에서 읽어도 된다고 하셨다는 이야기를 아이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그걸 말씀드리니 만화책과 글책을 번갈아서 가지고 오게 해주시면 될 것 같다고 하셨다.
그리고 이동 수업을 할 때, 뛰는 건 아닌데 스탭을 뛰듯이 걷기도 하고 어쩔 땐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는 얘길 들었다. 걷다가 노래를 부른다는 말에 내 눈이 절로 크게 떠지며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그건 예상치 못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흥이 많은 아이지만 걷다가 노래 부르는 건 나도 거의 못 봐서 무슨 노래를 부른 건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 상황에서 무슨 노래를 불렀는지 물어보기도 그렇고 집에서 잘 얘기하겠다고 말씀드렸다.
집에 와서 아이에게 물어보니 본인은 노래 부른 기억이 없다고 했다. 자기도 모르게 흥얼거렸을 수도 있고, 어찌 된 일인지 모르겠다.
그 후 뭔가 선생님께서 길게 더 얘기하시기를 꺼려하시는 눈치셨다. 나도 달리 더 할 말이 없어지자
"여기까지 얘기하면 될 것 같아요."
하시면서 먼저 상담을 종료하셨다.
"그래도 ○○가 학교 생활을 재밌게 생각하고 잘 다니고 있어요. 선생님 덕분입니다."
라는 인사말을 건네고 나왔다.
보통 상담 시간이 15~20분인데, 10분 만에 상담을 끝내고 나왔다. 막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기분이었다. 사족을 달지 않으시고 딱 할 말만 전하고 끝내시는 스타일 같으셨다. 그리고 가까이서 뵈니 인상이 더 좋으셨다. 감정적으로 아이들을 차별하시거나 폭발하실 분은 아닌 것 같아서 안심이 되기도 했다. 부모가 선생님께 도움을 청하는 입장에서 아이 단점을 말씀드리면 그걸 듣고 더 색안경을 끼고 나쁘게 보실까 봐 걱정되는 선생님도 있는데, 내가 본 올해 담임 선생님은 그러실 분은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걸어 나오는데 드디어 1년 중 제일 긴장되는 학부모 상담이 끝났다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그리고 나는 그 긴장이 풀림과 동시에 그날 저녁부터 감기를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