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산율 0.78 의 나라>
새로 태어난 아기 울음이 이웃의 아침을 깨웠다. 연실 어머니가 먼저 얼굴을 보인다. 마당에 나온 시어머니에게 꼬마 색시가 아기 낳느라 고생을 했네 하며 인사를 한다. 손에 들고 온 종이 봉지에 담긴 미역을 담너머로 시어머니에게 건넨다.
"고마워."
받아 든 시어머니가 부엌으로 향한다. 밤잠을 설친 신랑은 지친 눈으로 엄마의 품에 안긴 딸을 신기한 듯 바라본다. 피곤하여 잠든 아내의 얼굴을 대견스럽게 여긴다. 이제 가족이 하나 더 늘었으니 책임도 더 늘어난 셈이다. 가을철이라 할 일이 많은 오늘이지만 쉬어야 하겠지. 눈이 자꾸만 감기려 한다.
첫째 이름은 상선이다. 가운데는 돌림자이므로 끝에 한 자만 붙이면 된다. 첫 번째로 귀여움을 받으며 건강하게 자라 첫돌이 되었다. 떡을 하여 서 너 집 되는 이웃과 나누는 것으로 잔치를 대신했다.
첫돌이 지난 선이가 걸음마를 배우기 시작할 즈음 두 번째 생명이 꿈틀대기를 시작했다. 쉴 틈도 주지 않는다. 게다가 가을걷이로 바쁜 와중에 남편에게서 이사 얘기가 나온다. 하기야 작년 친정이 강경으로 이사한 지난 해부터였지만. 아버지의 고향은 충청남도 대덕군 기성면 봉곡리 산골이었다. 처가에서 먼저 현재의 논산시 강경읍 채운동으로 이사를 했다. 이사한 후 딸과 사위에게 이사하기를 권하여 마침내 합의가 이루어져 가을걷이를 마치고 이사하기로 했다. 겨울이 오기 전에 서둘러 이사를 했다. 살던 곳에 비하면 300여 세대가 모여 사는 제법 큰 동네이다. 이사한 집도 친정에서 몇 집 떨어진 가까운 곳이다. 바로 밑 남동생 가족은 보이는 축백나무 울타리 사이의 이웃이기도 하다. 내가 '외삼촌' 하고 부르면 들리는 거리다. 좋은 면도 있으나 서로 조심스러운 면도 있음이다. 이 외삼촌 집은 논과 밭이 꽤나 넓은데 외아들이라 경제적으로 여유 있게 산다. 아들 하나뿐이니 대학교까지 공부시켜 고등학교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중이다. 여유가 있어서 문제라면 문제다. 외삼촌이 막걸리를 좋아해 거의 매일 주막집에 출근 도장을 찍는다. 오고 가는 이들을 불러 술을 권하며 술집 매출을 올려주기도 한다. 하다 보니 과부 술집 주인집에 본의 아니게 비 오는 날 낮잠을 자는 때도 더러 있었다. 몇 년이 지나서 씨앗이 하나 자라서 외사촌 형에게 이복동생이 나타나 외숙모의 속을 태웠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이사한 후 살림은 조금씩 나아졌다. 물을 퍼 올리는 작은 논을 사서 이모작을 하여 양식을 늘리기에 힘을 기울이기도 했다. 남의 집 일도 부지런히 다니는 것은 당연하다. 입덧도 모른 채 선이가 두 돌이 되기 전에 엄마의 몸에서 두 번째 생명이 태어났다. 이번에는 아들이다. 누구보다 시어머니께서 기뻐하신다. 물론 아버지도 독신이셨기에 아주 좋아하셨다. 아들의 이름은 상훈이다. 훈이의 나이 세 살 되는 해 여름 둘째 아들 상하가 태어났고 2년 후에 둘째 딸 상순이가 태어났다. 그동안 2년 차이로 사 남매를 낳았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계속 이어져 셋째 아들 상배가 태어났고 3년이 지나서 셋째 딸인 상덕이가 빛을 보았다. 2년이 지난 후 일곱 번째로 넷째 아들인 상수 바로 내가 태어났고 쉬었다가 4년 뒤 딸인 상희, 다시 아들로 다섯 번째 상국이가 태어났다. 다섯째 딸은 마흔둘에 낳아 젖이 모자라 2년 전에 먼저 출산한 올케의 젖을 조카와 함께 먹으며 자라기도 했다. 열남매가 성장하기까지는 꼭 한 분이 계셔야만 했다. 바로 할머니다. 서른 초입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홀로 아들 하나만 의지하고 사시면서 손자와 손녀 등에 업어 키우셨으니 그 은혜를 잊을 수가 없다. 82년 사시는 동안 엄마는 출산하고 논과 밭으로 바쁘게 움직이면 할머니께서 돌봐주셔야만 했다. 자식을 많이 낳아 아들 다섯 군대 입대하여 전역하게 한 공로로 할머니를 대신하여 어머니가 경찰서장 표창장을 받기도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부지런히 일을 하는 한편 국가로부터 농지를 분배받아 대가를 상환하고 일부는 구입하였다. 논과 밭 40,000m 2의 땅을 일구며 흙과 더불어 행복한 삶을 이어가는 중이다.
첫째 아들 훈이는 법원 근무 퇴임 후 법무사로 일했다. 둘째 하는 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임을 했으며 셋째는 대학교 서무과에서 행정직으로 근무하고 정년을 맞았다. 다섯째는 교정직 공무원으로 정년퇴임을 했다. 막내딸은 목회자로 근무 중이며 넷째인 나는 목회자로 일을 하다가 정년퇴임을 한 후 사이버 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 등록하고 배움에 도전하고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위로 세 딸들에게 빚진 마음을 안고 사셨다. 원하는 만큼 공부를 하도록 지원하지 못한 일에 대한 미안함이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