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 생활을 남쪽 후방 안전지역 행정실에서 하고 있었다. 절반쯤 했을 때인 1967년 여름 월남전에 참전한다는 지원서를 인사처에 제출했다. 1965년 초창기 때는 할 수 있는 대로 파병에서 빠지려 하는 장병이 많았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전사자가 많고 전쟁에 낯선 시각이 작용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상황이 나아지고 임무를 마친 장병들이 돌아오고 또 새로운 교체병력들이 현장으로 투입되는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을 보고 불안한 마음이 해소되었으리라. 물론 그럼에도 집안 어르신들의 반대가 여전한 가정도 있었다. 나는 부모님과 군대에 다녀온 세 형들과도 상의하지 않고 그냥 혼자 결단하였다. 심사를 거쳐 파병이 결정되어 떠나기 전 고향에 계신 부모님께 연락을 드렸다. 어머니께서 먼 길을 오셨다. 셋째 누나가 내가 근무하는 남쪽 부대 가까운 지역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로 오셨다. 기차를 몇 차례 갈아타야 하는 번거로움에 거의 하루가 걸렸을 거리이다. 부대로부터 외출을 허락받아 누나 집으로 나와 어머니를 뵐 수 있었다.
초조도 경험하지 못한 열두 살 꼬마가 스무 살 청년에게 시집을 왔다. 키는 혼인 후 조금 더 자랐어도 153cm에 멈췄단다. 열일곱에 첫 딸을 시작으로 아들 딸 각각 다섯 10남매를 어떻게 낳아 기르셨을까? 얼마나 힘이 드셨을까. 생각하면 가슴이 멍해진다. 이마엔 세월의 흔적이 새겨 저 있다. 오랜만에 구수한 엄마표 된장찌개 맛에 고향 샛강 둑을 달리는 내 모습을 본다.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잘 다녀와."
곧바로 돌아서서 부대로 향했다. 내가 생각해도 그냥 싱거운 인사이다. 논산 훈련소에 입대할 때도 논과 밭에서 일하기에 바쁜 부모님. 그래서 혼자 이웃집 가듯 인사하고 출발했었다. 먼 길이라고 다를 게 없다. 어머니는 결코 눈물을 보이지 않는 분이다. 세 형이 논산 훈련소에서 훈련받을 시절에는 주말에 면회제도가 있었다. 허허벌판 황토 운동장에서 훈련으로 그을린 아들의 얼굴을 본 어머니들 대부분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안타까워하고 어떤 이는 소리 내어 울기도 하지만 작은 거인 우리 어머니는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는다. 반가움의 눈물이라도 있으련만. 여덟 살 위인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절대로 '아니요' 소리를 못하신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시집올 때 시댁 살림은 친정과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시댁도 나무 하나 심을만한 땅이 없었다. 어머니는 땅이 있어야 되겠다는 생각에 아버지와 함께 밤낮을 가리지 않고 땀을 흘렸다. 땀을 흘린 결과는 헛되지 않았다. 20,000 제곱미터의 밭과 논에 곡식을 심고 거두는 일을 하게 되었으니 너무나 감사한 일이다. 그런데 모를 심을 때부터 김을 매고 거둘 때까지 일군들을 부르고 일을 시키는 과정이 전부 어머니 몫이다. 심지어 품삯을 주는 일도 당연히 아버지는 개의치 않는다. 그날의 품삯은 그날에 정리하는 게 어머니의 기본 정신이다. 그래서 일군들이 우리 집으로 일하러 오기를 즐거워한다는 소문이 있다. 아버지로부터 용돈은 물론 학비를 한 번도 받아 본 적이 없다. 모두 어머니 주머니에서 해결한다. 아버지는 논과 밭이 삶의 터전이며 전부라고 해야 맞는 표현이다. 오염되지 않은 고지식한 농부이시다. 학교에서 오늘 돌아와 내일까지 급히 필요한 돈이 있다고 요청하면 어떤 방법을 통해서라도 구해오신다. 억지 부리는 나 자신이 송구할 따름이다. 어머니, 어머니 이제 와서 생각하니 그저 "감사합니다." 하며 머리를 숙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