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초중등 교육의 이슈 중에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고교학점제이다. 고등학생도 이제 대학생처럼 자신이 원하는 과목을 수강 신청하고 일정한 학점을 채우면 졸업하게 된다고 하니 언뜻 생각해도 학교 교육에 불러올 변화가 클 듯하다. 고교학점제는 2018년부터 일부 연구·시범학교와 특성화고를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고 2025년부터 전체 고교에 적용된다. 또 고교학점제에 부합하는 2022 개정교육과정과 2028 대입제도가 차례로 발표될 예정이다.
하지만 입시 경쟁이 치열한 상황에서 고교학점제가 과연 제대로 효과를 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일부에서는 고교학점제는 시기상조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그렇다면 고교학점제는 왜 추진되었고 제대로 운영되려면 어떤 문제가 해결되어야 할까?
고교학점제가 도입된 취지를 가장 잘 설명한 문장은 ‘잠자는 교실을 깨우겠다’일 것이다. 이 내용은 교육부가 개설한 고교학점제 공식 웹사이트에서 고교학점제 필요성의 첫 번째 요소로 제시되고 있다(그림3-2).(각주1)
그림3-2 고교학점제 도입 취지
자료: 교육부 고교학점제 홈페이지(https://www.hscredit.kr).
고교학점제는 고등학교 교육의 획기적인 대전환을 추구한다. 예전에는 그저 대학 가기 위한 공부를 하고 학생의 진로나 흥미에 맞지 않는 수업도 억지로 들어야 했다면, 이제 학생의 선택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개개인의 다양성에 맞는 학교 교육을 지원하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교육부가 내놓은 고교학점제 추진 계획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표3-3).(각주2)
표3-3 고교학점제 도입을 통한 학교의 변화
자료: 교육부 보도자료(2021). 2025년, 포용과 성장의 고교 교육 구현.
교육부의 기대대로 실현된다면 참 좋을 것이다. 고등학교 과정은 학습 난이도도 상당히 높고 학생들의 흥미나 진로도 다양해져서 획일적인 교육과정으로는 학습 욕구를 만족시키기 어렵다. 그런데 고교학점제를 통해 학생들이 자신의 학습 수준과 진로 희망에 적합한 과목을 공부할 수 있다면 말 그대로 고등학교 교육의 패러다임 전환이 일어날 만하다.
그런데 학생들의 과목 선택이 기대만큼 확대되기는 어렵다고 예상되는 이유가 있다. 사실 학생의 과목 선택권을 늘리는 것은 2007 개정 교육과정부터 시작된 것이고, 현재 운영되는 교육과정인 2015 개정 교육과정도 내용상으로만 보면 충분히 학생들의 과목 선택을 보장하고 있다.
표3-4 2015개정 교육과정 일반고 단위 배당 기준
자료: 교육부(2015). 2015개정 교육과정 총론.
<표3-4>는 2015 개정 교육과정의 고등학교 필수 이수학점을 나타낸 표(각주3)이다. 이 표에 의하면 고교 3년간 학생들은 204단위를 이수해야 하는데 그중 교과는 180단위이다. 그런데 교과 180단위 중 필수 이수 단위는 94단위밖에 되지 않는다. 나머지 86단위는 ‘학생의 적성과 진로를 고려하여 편성’하도록 되어 있다. 다시 말해 정부 공식 문서상으로 우리나라 고등학생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전체 교과의 절반 정도를 자신의 적성과 진로에 맞게 선택하게끔 되어 있었던 것이다.
교과별로 자세히 보면 국어, 수학, 영어는 고교 3년간 필수 이수 단위가 각각 10단위이다. 1단위는 1주일에 1차시 수업을 의미하기 때문에, 법정 문서상으로 우리나라 고등학생들은 국영수를 일주일에 1~2시간씩만 들어도 6학기 동안 10단위의 필수 이수 단위를 충분히 채울 수 있다. 그런데 왜 현실에서는 고교 3년 동안 매일같이 국영수를 듣는 학교생활을 해 왔던 것일까. 국영수 공부가 불필요하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모든 학생이 날마다 국영수를 들어야 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예를 들어 예체능이나 인문사회 계열 전공 희망자라면 수학 교과 단위가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이공계열 전공이라도 진학 희망 학과에 따라 수학이 많이 필요할 수도 있고 적게 필요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전국 대다수의 고교에서 천편일률적인 교육과정이 운영되어왔다.
결국 학생의 과목 선택권 확대는 고교학점제를 하고 안하고의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바로 입시의 문제라는 것이다. 교육과정에서 아무리 선택의 기회를 많이 제공해도, 실제로는 수능을 대비하기 위한 국영수 중심의 수업을 듣고 내신 준비에 유리한 과목 선택을 하며 학교 수업은 입시 준비 수업이 될 수밖에 없다.
고교학점제가 되면 고교 졸업 요건이 204단위에서 192학점으로 바뀐다. 또 <표3-5>(각주4)에서 보듯 고1 때만 공통과목을 듣고 고2~3의 모든 과목을 선택으로 돌린다. 하지만 그것이 2015개정 교육과정과 크게 다른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학점을 인정받으려면 40%의 학업성취율을 충족해야 한다고 하지만, 어차피 유급 제도가 없는 우리나라에서 학업성취율에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보충학습 등으로 이수를 인정하게 된다고 볼 때 학점이든 단위든 실제적인 차이는 크지 않다. 또한 고2~3의 모든 과목을 선택과목으로 돌린다고 하지만, 앞서 살펴봤듯이 이미 2015개정 교육과정 때도 사실상 고2~3의 모든 과목을 선택과목으로 운영할 수 있는 여건이었다. 그런데도 입시의 영향력 때문에 운영하지 못했던 것이다.
표3-5 고교학점제에서의 과목 이수 시기 및 과목 예시(보통교과)
자료: 교육부(2021). 고교학점제 종합 추진계획.
고교학점제에서의 과목 개설에 대해 학교로서도 대학 입시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고교 입학생 중 기초 학력이 미진한 학생들을 위해 고1 수준의 국영수보다 쉬운 기초 과목을 개설하면 자는 학생들을 깨우는 데 도움이 되겠지만 현실적으로는 입시 실적에 도움이 안 되어 개설을 꺼리게 된다. 아래의 글은 교육과정 편성에 관한 어느 교사의 이야기이다.
“학교에서는 대학에 한 명이라도 더 보내기 위해서 학교 교육과정을 편성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육과정을 따라오지 못하는 기초·기본 학력 미달 학생을 위한 교육과정을 편성하다 보면 중위권 학생들이 대학에 가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학교는 어쩔 수 없이 기본영어, 기본수학과 같은 과목을 편성할 수 없어요. ‘실용국어’, ‘실용영어’, ‘실용수학’도 마찬가지죠.” -Y고 교사(각주5)
대학서열해소를 통한 입시 경쟁 완화를 하지 않은 채 운영되는 고교학점제의 모습은 어떻게 될까. 아무리 2022개정 교육과정을 그럴듯하게 만들어놔도 학교는 크게 변하기 어려울 것임을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고교학점제가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니다. 그리고 일선 학교에서 고교학점제 운영을 위해 애쓰는 교사들의 노력이 무의미하다는 것도 아니다. 실제로 고교학점제 연구학교들을 보니 평균적으로 선택 과목 수가 30개에서 41개로 34% 증가했고(각주6), 인근 학교와 지역사회 인프라를 활용하기 위한 많은 시도들이 있었다. 고교학점제가 아니었더라면 개설되지 않았을 선택 과목으로 인해 일부 학생들에게는 숨통을 틔여 주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현재 상황에서 고교학점제가 ‘자는 학생을 깨운다’, ‘학생의 진로에 따라 자유롭게 과목을 선택한다’는 것은 이루기 어려운 목표이다. 고교학점제가 진정으로 도입 취지를 살리려면 대학서열 해소를 통해 학생들이 입시 부담 없이 진짜 원하는 공부를 할 수 있어야 한다.
각주
1) 교육부 고교학점제 홈페이지(고교학점제>고교학점제 소개>고교학점제란).
2) 교육부 보도자료(2021). 2025년, 포용과 성장의 고교 교육 구현.
3) 교육부(2015). 2015개정 교육과정 총론.
4) 교육부(2021). 고교학점제 종합 추진계획. p.15.
5) 정미라 외(2022). 고교학점제, 교육과정을 다시 디자인하다. 맘에 드림. p.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