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번 달 나는 손절당했다.
교생 때 알게 됐지만 교생이 끝남과 동시에 연락이 자연스럽게 끊어졌다가
6년 전 질병발병으로 주위 사람관계가 자연스럽게 정리가 되고 있을 때 다시 연락이 된 소중한 인연이었다.
하지만 인생이 멈출 정도로 기력이 쇠약해지고 약해져서
멀리 나가지도 못하고
오래 앉아있지도 못하고
사람들이 많은 곳에도 가지 못하고
스트레스받을 대화는 애초에 피하고
날씨영향도 많이 받아 덥거나 추우면 외출을 못하고
음식도 기름진 건 삼 년 동안 끊은
이런 상황에서 잘 만나거나 얘기나 투정을 잘 받아주지도 못했었다.
그래도 전화로는 이 친구가 힘들 때마다 도움이 되고 싶어서 전화를 못하면 톡으로라도 남겨달라고 부탁을 했었다.
실제 전화를 하면서 서로 격려와 조언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올해 들어서부터 저번 달까지 이 친구가 정말 힘들어 보였었다.
그래서 6년 동안 상태가 많이 나아진 나는 일 년에 한두 번 이 친구를 만나는 패턴이었다가 너무 안 되겠어서 더운데도 불구하고 만나려고 다짐을 했다.
사람이 힘들면 얼굴을 보고 얘기를 해야 위로가 된다는 생각에 마음을 먹었는데,
이 친구는 이미 마음을 접은 모양인지 만날 약속을 잊거나 연락을 준다고 하면서 아얘 잠수를 타기 시작했다.
차라리 이유를 알려주면 그러려니 할 텐데
아무 말 없이 톡도 보지도 않으니
그 힘듦이 끝나고 언젠가 연락이 올 거라는 나의 무제한 기다림이 시작된 것만 같았다.
보통은 자연스럽게 멀어지기 마련인데,
이렇게 상대방의 톡을 보지 않고 차단당한 경우는 처음이라 놀랐다.
내 바닥인 상황에서 남아준 고마운 친구들에게는 어떻게든 위로가 되고 싶어서 최대한 노력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이 보기에 한창 부족할 수 있고 답답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나이에는 어딜 가거나 뭘 먹거나 뭘 하든 제약이 없는 나이라
집과 산책, 교회 외에 부모님의 동행 없이는 멀리 나가지 못하고 가려 먹어야 하고 몸을 사리는 나를 이해하지 못할 게 당연했다.
그도 그럴 것이 경제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마음이 어려우니 더더욱 자유롭게 만날 수도 없고, 선물을 받으면 고맙지만 한편으로는 갚아야 하니까 부담도 생기기도 한다.
하지만 그나마 곁에 있어주는 친구들에게 고마움이 커서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보답하려고 한다.
여하튼 나를 손절한 친구는 항상 입버릇처럼 말이 있었다.
'상황을 다 이해해!'라고.
물론 다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는 뜻이니 이 자체로도 너무 위로가 되고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이렇게 되니 그때 그 말이 거짓말이었었나 싶었지만,
그때는 진심이었다고 생각하기로 마음을 고쳐 먹었다.
거짓말이라고 하면 내가 그 친구에게 가졌던 고마운 마음이 사라지는 것 같아서 진심은 진심으로 나누련다.
나는 요양 6년 동안 톡이 하나도 안 오고 폰이 울리지 않는 나날들이 많아서 이전 삶의 습관에서 벗어나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건강할 때는 심심하거나 보고 싶으면 내가 먼저 하면 됐는데
이제는 내가 감당하지 못하니까 먼저 하질 못했다.
다행히 가족과의 관계가 회복이 되어서 마음이 평안한 이유로 신경을 덜 쓸 수 있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조금은 그 결핍이 남아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누군가의 톡이라도 오면
그 하나의 톡에 감사하고 고마운 마음이 든다.
이런 상황에서 또 사람관계에 대해 한번 더 좌절되는 마음을 느낀 일이 생겼었다.
내 행동반경 중 유일하게 사람을 만나는 곳 교회에서 있는 일이었다.
우리 교회는 동네 중형교회다. 그래서 청년부에는 내 나이또래는 거의 없고 거의 다 20 대거나 30대 초반이 있다.
교회를 계속 다니셨거나 성격이 활발하거나 어린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은 40대 미혼분들은 (대부분이 남자들) 청년부예배와 모임을 거리낌 없이 나오시지만,
거의 대다수의 나이가 있는 여자분들은 그렇지 않은 추세다.
거기에 나도 포함이 된다.
활발한 성격도 아니고 행동에 제한이 있어서 수련회는 가지도 못하고 사교적인 단체생활도 힘들다.
지난주에 동아리 활동이라고 몇 달에 한 번씩 있는 모임을 했는데,
20대들이 90 퍼를 이루고 있는 모임인 걸 몰랐다.
나는 마치 존재만으로 분위기를 무겁게 하는 부장님처럼, 진행을 맡은 20대 청년이 설명하려고 말을 거는데도 순간 멈칫멈칫하는 게 느껴지고 또 나에게는 모임의 목적인 만들기 외에 누구도 말을 절대 걸어주지 않았다.
마치 유령처럼.
'네가 먼저 말을 걸면 되지 20대 청년들을 탓하냐' 할 수 있겠다.
맞다.
그런데 나는 말을 잃어버린 사람 같았다.
6년 간의 요양 중에 사람이라면 가족이 전부고 그 외에는 다들 일이나 육아로 바쁘다. 각자의 삶이 있다.
대화를 어떻게 잘해야 하는지, 어떻게 시작하는지 예전에는 그다지 어려움은 없었는데 지금은 글을 써도 문장을 잇기가 힘든 것처럼 대화에서 자신이 없어졌다.
그럼 질병 핑계를 대냐 싶겠지만,
질병 전에는 단체 생활은 잘하지 못해도 대학에서 모임과제를 해야 하면 나서서 주도하거나 발표하는 위치에 있었다.
남자도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먼저 말 거는 사람이기도 했다.
하지만 질병 이후에는 180도로 바뀌어 버렸다.
이게 좋지 않는다는 건 아니고 다 장단점이 있는데,
은둔 고수처럼 뒤에서 관망하며 생각하는 장점이 있는가 반면에
너무 동떨어진 사람처럼 느껴지는 소외감이라는 단점이 있다.
요양 1년 차 때는 너무 쇠약해져서 몸이 떨릴 정도라 항상 긴장하며 청년부를 갔어서 누가 봐도 심각한 사람처럼 보였을 것이다.
이렇게 교회 청년부를 나가기 시작했기 때문에 지금도 그런 이미지로 굳혀진 것 같다는 시선들을 느끼고 정착이 된 것 같다.
또 얼굴만 봐도 차이가 느껴진다는 걸 교회 청년들의 반응에 확실히 느껴졌다.
그래서 요즘 20대들의 대화에 꼈다가 찬물을 부은 격이 될까 봐 뭐 따로 공감할 주제도 없고 그냥 주변인으로 있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생애 여자한테 처음으로 손절을 당하고 나니
사람관계에 대해 두려워진 모양이라
이 동아리 활동을 하는데 더더욱 마음이 통째로 내려가는 것 같았다.
그들은 잘못이 없다.
나의 문제다.
현재 서로 개인적인 마음이나 목적 없는 수다나 안부를 속속들이 나누며 지내는 사람들이 없지만,
그래도 나라는 사람을 존중해 주며 가끔씩 연락하고 주일에라도 얼굴을 보는 분들이 있으니 감사하다.
하지만 이건 그분들이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이해해 주고 특히나 나라는 사람과의 인연을 이어가려는 끈기와 노력이 있기 때문에,
완전 띄엄띄엄이나 작은 관심이라도 가능한 거지,
그게 아니었다면 이미 손절당할 나였다.
누구는 중고등학교 때 동창들과 지금까지도 가족같이 지내는 사람들이 있고,
누구는 사회에서 만났지만 서로 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사람들도 있고,
또 누구는 소수지만 찐 친구들이 있는 사람들이 있다.
나처럼 없는 사람도 있을까?
있겠다.
아마 나는 가족이 없었다면 딱 고독사하기 좋은 포지션의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위안은 블로그나 브런치에서 소통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바보 같은 나를, 내가 쓴 글을 궁금해해 주거나 궁금하지 않더라도 읽어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감사하다.
글을 같이 쓰는 한 동생이 말해줬다.
'결이 같은 사람을 만나면 된다'라고.
이 친구는 결이 같은 사람이 '남편'이라고 했다.
그러면 된다.
그리고 성경에도 마음을 지키라고 하셨다.
이기적인 삶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렇게 사는 삶을 이해해 줄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며 살고 싶다.
없으면 어떻게 하냐고?
없으면 지금 곁에 있는 가족들을 여전히 챙기며 내가 믿는 주님께 기도하며 살지 뭐!
이제는 사람관계에 대해 좌절하기 싫다.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는 흔적도 안 남는 강철마음이 되고 싶다.
(올렸었는데 수정하려고 눌렀다가 삭제를 눌러버려서 다시 발행한다... 두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