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건강하지 못하다!
자랑도 아니고 너무 자신 있게 썼다~
하하하~
나는 처음부터 건강하지 못했다.
생각해 보면 생후 6개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엄마가 나를 안고 외가에 가셨을 때 외할아버지께서 내 입술을 보더니 '입술이 파랗네. 병원 가서 검사받아봐.'라고 말씀하셨단다.
세브란스 병원에서 생후 6개월에 선천성 심장병을 진단받았다.
당시 엄마의 나이는 서른 살이셨던 걸로 기억한다.
158센티의 작고 귀여운 엄마는 나 때문에 아기를 살리기 위해 고생에 고생을 하셨다.
뭐 엄마뿐일까!
아부지도 오빠도 그랬다.
돈이 없어 가난했던 우리 가족은 내 심장을 수술할 돈이 없었다.
그래서 포기하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엄마는 내가 그렇게 잘생겨 보이셨다고 하셨다.
여자아기인데 말이지~ 하하하~
엄마는 나를 살리기 위해 친척들과 주위 이웃들에게도 도움을 요청했고 지인을 따라 교회에 나가게 되셨다.
그때는 사랑의 리퀘스트나 동행 같은 방송프로그램이 있지 않았다.
80년대니까~
(아! 아래 나오지만 심장재단을 취재하러 온 기자들에 의해 방송인가 신문인가는 모르겠지만 심장병 아기들이 나왔어서 지인들은 매체를 통해봤다고 한다)
정말 감사한 건
이웃 중에 어떤 대학생이 엄마와 나의 이야기를 건너 건너 듣고
대학가 근처에 걸려있는 현수막에 써진 심장재단을 적어와서 엄마께 알려드렸다는 사실.
엄마는 희망을 품고 나를 안아 양천구에서 지하철을 타고 강동구 쪽에 있는 심장재단을 찾아가셨다고 했다.
서울 서쪽 끝에서 동쪽 끝이라 내비게이션이 없으니 마주치는 사람마다 물어물어 찾으셨다고 했다.
그곳에 가서 접수를 하고 강당에 모이는 일이 있으셨다고 했다.
그날 엄마가 가보니, 나같이 심장병에 걸린 아기들이 많았었는데
설명을 맡은 의사 선생님께서 '부모님의 잘못이 아니에요'라고 하신 말씀이 기억에 남는다고 하셨다.
맞다. 우리 부모님 잘못이 아니다.
그냥 조상들의 DNA가 내려내려와서 나에게 당첨된 것뿐이지.
질병당첨이라는 말이 웃기긴 하지만 사람으로선 어쩔 수 없는 영역이다.
엄마는 재단과 동사무소의 도움으로 심장으로 유명한 병원에 입원시키셨다고 했다.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의술이 많이 발전된 상태도 아니었고 정밀한 기계들이 없어서
갓난아기가 검사하는 기계에 들어갔다가 나오면 죽는 아기도 있다고 했다.
그래서 엄마가 하나님께 엄청 기도했다고 했다.
그 검사하는 기계가 왠지 MRI가 아닐까 생각이 되는데, 그때도 MRI가 있었을까?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나만 입원한 게 아니라 자비로 입원한 아기들과 함께 있었다.
엄마말로는 아기들 중에 내가 제일 잘생겨서 간호사들도 다른 아기들은 그냥 지나쳐도 꼭 나를 보러 왔다고 했다.
음...
믿거나 말거나~
하하하~
하루는 아기들을 대상으로 목에서 피 뽑는 연습을 하는 신입의사가 있었다.
엄마가 지켜보기에 하루이틀 연습하는 거면 괜찮다 생각했는데,
아기가 숨 넘어가게 우는 데도 피도 잘 못 뽑고 자꾸 주삿바늘로 목을 찌르니까
우리 장군 같은 엄마가 큰 소리를 치셨다고 한다.
그 이후에 그 신입의사는 차마 나는 못 뽑고 다른 아기들만 데려다가 뽑았고, 나에게 피를 뽑을 일이 있으면 피가 얼마나 필요한지 이야기하고 뽑으셨다고 한다.
그런데 나라면 자비로 들어간 게 아니라서 이 소심한 성격에 내 아기를 쫓아낼까 봐 아기가 자지러지게 울어도 차마 의사한테 화를 못 낼 것 같은데, 우리 엄마가 참 당당하고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내 아이가 생기면 그럴 수 있을까?
그러다가 수술 날짜도 정해지지 않았는데, 한 간호사가 내 침대를 정리하고 있었단다.
엄마가 깜짝 놀라서 물어보니, 간호사가 의사가 정리하라고 해서 하는 거라고 했다.
이 의사는 신입의사가 아니라 그 위에 있는 의사 같았다.
역시 돈 문제인 것 같았다.
우리가 자비를 낸 게 아니라 재단소속으로 왔고 동사무소에서도 도와주는 제도 때문에 돈을 감면해줘야 해서 그런 것 같았다.
여기서 굴할 엄마가 아니지,
엄마는 나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당장 원장 격 의사 선생님 방에 달려가서 사정사정하니 그분이 웃으시면서 자리도 그대로 놓고 바로 수술날짜도 잡아주셨다고 했다.
나가라는 의사보다 더 높은 의사에게 찾아간 엄마의 지혜도 놀랍다.
이때는 우리 집이 가난했어서 아부지는 계속 일을 하셔야 했고
오로지 엄마 혼자만 내 간호를 감내하셔야 했는데 엄마도 이때 몸이 아픈 상태 셔서 이모저모로 힘드셨던 것 같다.
솔직히 어릴 때라 생각도 안 나고 자라면서 사춘기 이후로는 맞벌이인 부모님이나 오빠와 마음을 나누는 일이 없었어서 어느 순간 마음이 메말라 있었던 것 같다.
누구 하나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지도도 없고, 내가 뭘 잘하는지 관찰해 주고 인도해 주는 사람도 없었어서 취준 할 시즌에 완전 암흑기로 살면서 엄마는 내가 돈 벌어서 빨리 독립했으면 한다고 오해를 했었다.
그런데 이 심장병 이야기를 듣다가 엄마의 새로운 속마음을 알게 되면서 오해가 싹 풀렸다.
바로
'내 새끼가 죽게 생겼는데 눈이 안 돌아가? 돌아가지!'
이 말이었다.
이 말에 그동안 엄마에게 가졌던 서운함이 단번에 사라졌다.
사랑을 받아도 또 받고 싶고
사랑을 안 받아서 받고 싶고
사랑을 받은 게 생각나지 않아서 받고 싶고
어찌 됐든 영원히 부모에게 사랑을 받고 싶은 게 자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태어나서부터 엄마와 가족들을 경제적으로 심적으로 힘들게 했던 나는,
자라면서도 종합병원이었다.
감기는 필수였고 시간노이로제에도 걸리고 만세를 못할 정도로 어깨가 너무 아파서 운 적도 있다.
남들 병원 한번 갈 때 나는 세네 번 갔다고 생각하면 된다.
친오빠는 자전거사고로 한번 입원하고 심하게 몸살감기 걸린 것을 제외하고는 태어날 때부터 건강해서 잔병치레도 없던 걸로 기억하는데 나는 완전 반대였다.
그래도 중고딩 때는 미주신경실신 외에는 건강했다.
대학 때는 일 년에 한두 번씩은 대중교통을 타다가 쓰러지고 위장염이 찾아와서 자주 입원을 했었다.
그러다가 서른 초반에 뇌경색이 오게 되는데,
이때도 엄마가 나 때문에 엄청 힘드셨어서 저혈압에서 고혈압으로 바뀌셨다...
뇌경색이 오기 한 달 전부터 소화가 되지 않고 배가 계속 아프다가 결국은 물도 입에 못 대면서 탈수증상이 찾아왔다.
온몸이 떨리고 영혼까지 떨리는 것 같아 쉬고 싶었지만,
막 들어간 계약직을 지켜야 했기 때문에 양해를 구하고 적은 시간을 일했었다.
그리고 솔직히 부모님께 죄송해서 일을 쉽게 그만둘 수가 없었다.
부모님께서 번갈아가며 출근을 도와주셨는데 한 달 동안 두세 번을 밤에 응급실을 갔었다.
응급실에서는 아무 이상이 없다고 했고
뇌경색이 발병되기 전에는 이마 안에 있는 골이 무지 간지러웠는데 찍어보니 이 또한 아무 이상이 없다고 했다.
단순히 피부가려움이 아니었다.
어떤 응급실 의사는 나보고 정신과로 가보는 게 좋겠다고도 했다.
그러고 다음날 출근준비를 하는데 코를 풀다가 왼쪽으로 풀썩 주저앉았다가 다시 몸을 일으킬 수가 없어서 결국에는 화장실 바닥에 눕고야 말았다.
중력이 사라진 것처럼 일어나려 해도 자석이 붙은 것처럼 계속 눕게 됐는데,
다행인 건 정신을 잃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머리 안에 풍차가 막 돌아가는 것 같았다.
너무 어지러워서 눈을 뜨고 있기가 힘들었다.
화장실에서 내 방까지는 1초 안으로 가는 거리인데도,
화장실 문턱을 기어 나와 거실 바닥에서 토하고 쉬면서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찬양을 떠올렸다.
생각나는 찬양이 새로운 사람이 오면 맞이하는 찬송과 '오 신실하신 주'였다.
웃긴 게 어릴 때 그 수많은 어린이찬양을 섭렵하고 중고딩 때도 주일마다 찬양을 불렀으면서 왜 기억나는 건 저 두 찬양인지 모르겠었다.
속으로 두 찬양을 번걸아가며 되뇌며 내 방까지 가는데 1시간이 걸렸다.
결국은 구급차가 왔다.
이때는 병명을 몰라서 '쉬면 괜찮아지겠지' 하며 안간힘을 다해 침대에 올라가서 한 시간 동안을 누워있었다. 그래서 괜찮아지기는커녕 왼쪽으로는 몸을 틀면 더 어지러울 정도라 가만히 누워서 눈을 감고 있었다.
구급대원이 오기까지 희한하게도 내 마음이 평안했었다. 나도 모르겠다. 정말 편안했다.
그런데 구급대원이 오셔서 나를 일으켜 가지고 오신 의자에 앉혀서 구급차에 실기까지 그 편안함은 사라지고 마음이 점점 좁아지는 것 같았다.
이 상황에서 구급대원께서 손을 잡아주셨는데 내 몸이 차갑게 식고 있어서 그랬던지 따뜻한 온기가 정말 힘이 되었다.
아마 몸이 차갑게 식고 있어서 그랬나 보다.
엄마는 얼른 병원에 입원할 물품들을 챙겨서 허둥지둥 구급차에 같이 타신 걸로 기억한다.
정말 죄송했다.
엄마께 놀라지 마시라고 걱정하지 마시라고 몇 번을 이야기했던 것 같다.
솔직히 이런 상황은 자신보다 어린 자녀에게 서가 아니라 나이 많은 어르신들에게서 보이는 증상인데, 그렇게 힘들게 살려놓은 딸이 당시에는 병명을 알 수 없는 질병으로 눈도 못 뜨고 몸도 못 가누고 있으니 충격을 받으셨겠다.
응급실에 실려가서 수액을 맞으며 검사를 했다.
다행히 막 점심시간이었나 싶다.
한가한 응급실이어서 바로 들어가서 검사를 받고 어떤 병명인지 기다리고 있었다.
갑자기 소변을 보고 싶은데, 화장실을 갈 수 없으니 엄마께 부탁을 해서 소변 받는 통을 놓고 볼일을 봐야 했다.
이건 참 민망한 일이다.
엄마는 오빠에게 연락을 해서 오빠와 새언니도 왔다.
다들 병명을 이야기해 줄 때가 됐는데 아무도 이야기해 주지 않아 답답했다.
어떤 의사 선생님께서 오시더니 '이 병원에서 치료받으실 거예요? 아니면 옮기실 거예요? 정하셨어요?'라고 말씀하셔서
나는 순간 '머리에는 풍차가 돌아가는 데 병원에 왔으니 빨리 치료 좀 해주지 무슨 말이에요!'라는 생각과 함께 황당했었다.
알고 보니 엄마가 뇌경색으로 유명한 병원을 지인에게 추천받아서 그리로 옮길까 하는 생각에 의사 선생님께 말씀드렸다고 했다.
나는 엄마의 이런 생각도 모르고 '네? 치료해 주세요! 그런데 저 병명이 뭐예요?'라고 말했다.
의사 선생님 왈: 가족이 아직도 말씀 안 해주셨어요? 뇌경색이에요!
가족들은 내가 충격받을까 봐 말해주지 않았던 것이었다.
사망 3대 질환(심장, 뇌, 암) 중 하나가 뇌질환이라고 한다.
우스갯소리로 나는 심장병과 뇌질환에 걸렸으니 암이 남았다고 했지만 우스갯소리로라도 하지 말아야지.
뭐 요즘엔 4위로 밀려났다고 들었다.
허허허~
그날 밤이 고비였다.
이전과는 다른 머리 통증이 심각하게 몰려왔다.
그냥 일상생활을 살아가면서 아픈 두통과는 차원이 달랐다.
증환자실에서 혈전용해제였던가, 당시에는 몰랐던 약을 수액으로 받고 있었는데,
머릿속 풍차는 계속 돌아가고 있는데 머리 통증이 심해지니까
타이레놀 같은 알약을 먹어도 계속 아파서 그 약 이름을 기억해 놨다가 더 달라고 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밤새 뒷머리에 얼음찜질팩을 대고 있었는데,
팩이 차갑지 밤에는 춥지 머리는 아프지
이러니까 밤새 나도 모르게 무서워서 '천국은 어떤 곳일까' 상상해 봤다.
지금은 좀 달라졌지만 이때는 잔잔한 물가에 오두막 같은 집 하나가 세워져 있고 평화로운 곳이라고 생각하기도 했고,
폭신한 구름 위에서 편안하게 누워있는 상상도 했다.
중환자실 침대가 물침대라 구름이 연상됐나 보다.
그리고 또 다른 상상은 침대가 살아있어서 다들 잘 때 몰래 병원을 탈출하는 상상이었다.
참 동화 같은 상상이었지.
그래도 당시 나에게는 조금이나마 힘이 된 상상이었다.
중환자실에서는 엄마가 계신 게 아니었어서 소변을 혼자서 못 보니까 간호사를 불러야 했는데,
간호사 나이대가 나보다 어려 보였다.
부끄러움과 수치심이 올라왔는데 뭐 어찌할 방도는 없어서 도움을 받았는데
정말 다행인 건, 한 달 동안 먹은 게 없어서 대변은 안 봐서 다행이었다.
중환자실에서 일반병동으로 올라가니 엄마가 간호를 맡아주셨다.
나는 그때까지 엄마가 나에게 관심이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얼른 독립해서 나가길 바라시는 줄 알았다.
그런데 엄마를 단단히 오해하고 있었다.
(참고로 위 심장병에서 오해가 풀렸다는 이야기는 퇴원하고 한참 후에 대화를 나눈 일이다)
엄마는 나를 간호하시면서
내가 자꾸 안 먹으니까 스트레스 안 주고 먹이려고 사과를 일부러 조금씩 잘라 내밀기도 하셨고
얼굴과 발도 닦아주시고 죽도 집에서 해오였다.
그래서 언제는 '피클국'이라고 명명한 여러 채소들을 시원한 물에 담가서 먹는 동치미처럼 만들어오셨는데, 그 시큼함 때문인지 목을 넘어가는데 마치 '생명수'라고 느껴졌었다.
이걸 마시면서 음식을 다시 먹을 수 있었다.
피클국은 '엄마의 사랑수'다.
그렇게 엄마는 2~3주 되는 기간을 집과 병원을 오가셨었다.
2018년 여름이 무지 더웠었는데 엄마가 집에 가실 때 더위도 더위지만 마음이 힘들고 충격이라 휘청하셨다고 하셨다.
엄마는 내가 입원 중에 계속 누워있었으니 바람도 쐴 겸 운동을 시켜야 한다는 생각에
나를 휠체어에 태우고 병원 1층을 돌기도 하셨고 또 퇴원해서는 어지러워서 혼자 못 다니니까 평소 안 잡던 내 손을 잡으시고 공원에 산책을 도와주셨다.
에혀
죄송하다.
그래도 중증의 환자라서 그런지 엄마가 그 귀여운 손도 잡아주셔서 좋았다.
의사 선생님은 나에게 더 이상 할 치료가 없으시다고 하셨다.
나는 아직도 어지러운데 할 치료가 없다니.
그래서 요양병원을 알아봐 주신다고 하셨다.
하지만 이 당시에 요양병원이라고 하면 '가서 죽어라'라는 뜻으로 들렸기에
엄마는 한사코 거부하시며 집으로 데리고 간다고 하셨다.
그래서 그렇게 오고 싶던 집에 왔다.
병원침대보다 내 방 침대가 정말 그리웠었다.
하지만 나는 집 안의 기압과 밖의 기압이 다 느껴질 정도로 쇠약해져 있었다.
몇 년을 병원에 있었던 것도 아니고 단 2~3주 되는 기간뿐이었는데도
숨 쉬기가 답답했고
눈 애교 살 위치 밑에 큰 병을 앓는 사람들처럼 살이 좀 튀어나왔고
기력이 없으니 침대에 거의 한 달간을 앉아 지내면서 더워서 밖에 나갈 엄두를 못 냈고
아침에 눈을 뜨면 밤에 밀려오는 피로가 2~3년간 지속되었고
티브이도 몇 달을 보지 못하다가 볼 정도의 기력이 되었을 때도 싸우거나 격정적인 프로그램은 힘들어서 보지도 못했고
초반에 외출을 할 때 누가 옆에 쌩하니 지나가면 두려움이 들 정도였고
비나 눈이 세차게 내리면 무서워졌고
기력이 없어 몸이 떨리니까 두 주먹을 꽉 쥐고 산책을 나가기도 하고
긴장하면 뒷목이 굳고 내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이기도 해서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쓰였고
어지러워서 길을 걷다가 휘청해서 또 휘청하면 어떡하지 라는 걱정이 앞서기도 했고
이렇게 몸 안에 있는 진액이 뇌경색으로 빠져나가면서 내가 마치 죽음을 앞둔 노인이 된 것만 같았다.
보통 나이 드신 분들이 큰 병을 앓고 돌아가시는 형태를 보면
큰 병을 앓아서 쇠약해지고 또 병이 와서 더 쇠약해지면서 점점 낼 수 있는 에너지가 없으니 어느 날 돌아가시는 거라고 들었다.
생각해 보니 뇌경색 발병 전부터 희한한 생각이 하나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내가 몸무게 67킬로가 되면 죽을 수도 있겠는데'라는 생각이 들었었었다.
그게 60킬로를 넘으면서부터 든 생각이었던 것 같다.
아무튼 6년 동안 요양생활 중에도 여러 잔병들이 왔는데
대상포진과 급성피부두드러기, 담낭수술, 오한 등등으로 평안히 계시려는 엄마를 자꾸 걱정과 간호로 가만히 두지 않았다.
'지금은 사람구실을 하니?'라고 물으신다면 반반이다.
반은 일주일에 한 번씩 집안청소하고 부모님 이부자리를 정리하게 되었고 요리하는 건 아니지만 밥상을 차리게 되었다.
부끄럽지만 나는 집안일에 전혀 신경을 안 쓰는 사람이었다...
아프고 나서야 가족에게 사람구실을 한다.
나머지 반은 이 나이에 몸이 쇠약해져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멀리 나가지도 못한다.
겉만 보면 멀쩡해 보이고 기본건강검진에서도 다 정상이지만,
(이런 표현밖에 생각이 안 나서 적는다) 내일모레 죽을 수도 있는 기력이라 생각한다.
그래도 지금은 6년 전보다 많이 괜찮아졌다.
전에는 발에서 심장박동이 느껴지고 잠을 잘 때 '내일 내가 눈을 뜰 수 있을까'라는 생각까지 하면서 잤었는데, 지금은 엄마가 부지런히 먹이셔서 밖에서 자유롭게 활동까지는 아니어도 집과 공원, 교회, 동네는 날씨가 좋으면 돌아다닐 수 있다.
스트레스를 받거나
춥거나 덥거나
사람들이 북적거리거나
뭐 가만히 있어도 기력이 소모되는 기타 등등의 이유로 나도 나 자신을 제어할 수 없이 에너지가 마이나스가 되어버린다.
그래도 좀 괜찮아졌다고 생각해서 지인 동네로 가서 밥을 먹기로 했었다.
추운 겨울이라 따뜻하게 입고 왔다고 생각했는데 음식점에서 맛이 가서 응급실에 실려갔었고
또 다른 지인의 집에 초대를 받아 아프고 나서 처음으로 먼 길을 갔는데 집에 올 때는 시체가 되기 전 상태가 되어서 내 건강에 대해 함부로 속단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내 나이또래에는 사회에서 어느 정도 직급을 쌓았을 위치다.
텔레비전에서 보면 내 나이또래 사람들이 엄청 성숙해 보인다.
나는 겉만 늙었지 않은 아직도 아이 같은데 말이지.
그러니 뭐 외모에 대한 자신감이 있긴 하나
재택근무할 만큼의 능력이 있길 하나
그냥 나는 부모님의 보살핌이 아니면 이렇게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어도 집에 와서 죽었다.
유튜브를 보다가 고독사하는 사람들 중에 사각지대에 놓인 청년들이라고 했다.
다치거나 질병이 있어서 일을 못하는데
나갈 돈은 많고 보살펴줄 어른은 없고
나이가 젊으니 국가에서는 도와주지 않아서 죽음을 택한다고 한다.
남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지만,
공모전에 이 세태를 더 알리고픈 마음에 단편소설을 써서 냈다.
떨어졌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글 쓰는 일뿐이었다.
글도 잘 쓰는 건 아니지만 두세 시간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진짜 이것뿐이다.
'나는 건강하지 못하다'
하지만 '그래서' 가족들과의 관계를 회복했고
각각의 사랑표현이 어떤지 알게 되었으며
내려놨던 글을 다시 시작했다.
내 나이에 뇌경색이 걸려 겨우 들어간 일터를 금방 그만둘 줄 몰랐다.
당연히 커리어우먼에 멋진 배우자에 돈 많이 벌어서 가족에게 용돈 플렉스하는 삶을 살 줄 알았다.
망상이었다~ 하하하~
진짜 삶은 모른다.
요양 중에
하루하루 버티기도 힘들어서 운 날도 많았고
또 부모님과 있으니 마냥 좋아서 '이런 상태라도 살아도 좋구나' 싶던 날도 있었고
혼자 있어서 고독하다는 느낌을 받고도 말씀 읽고 기도하며 보낸 나날들도 많다.
또 최근에는 돈을 벌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겨우 벗어났다.
참고로 우리 집은 부자가 아니다!
부자면 차라리 맘 편히 요양했을 텐데 아부지는 도배일을 하시고 엄마는 알바를 하신다.
그렇다고 가난한 것도 아니다!
부모님이 젊으셨을 때 열일해서 모아두셨기 때문이다.
암튼 다시 돌아와서
현실에 쫓기지 않게 되었고
나와 내 가족만 잘살자는 이기주의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또 자기만 잘살겠다고 친구들과는 멀어지고 입원해 있을 때 찾아와 준 고마운 친구 두 명과는 계속 연락하며 지내고 있다.
신기한 건 30대 나이에 아무것도 없고 폐인처럼 다닌 나를 교회에서 새 가족이라고 챙겨준 일이었다.
뭐 나를 피한 사람들도 있었다.
심방이라고 나를 만나려고 이쁘게 차려입고 우리 집 근처에 와준 새섬팀장님도 계셨었다.
이때 나는 167센티에 67킬로였고 딱 붙는 옷이 아니라 보통 티셔츠도 답답해서 못 입어서 노인분들 입으시는 펑퍼짐한 모시옷을 입고 있었다.
'교회에서 영업하나 보네'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이분은 교회에서 일하시는 분이 아니라 자기 일을 가지고 있는 한 청년에 불과했다.
나를 귀하게 여겨주고 따뜻하게 대해주셨었다.
그리고 내 소심한 성격에 교회에 있다 보니 그다음 새섬팀장 언니가 나에게 함께 해보자고 제안을 해줬고 내 건강도 배려해 주셔서 함께 활동을 할 수 있었다.
돈도 없고 재미있지도 않고 비판정죄의 아이콘이고 기력 때문에 무표정이었는데도
다들 천사인지 나를 이해해 주고 배려해 주었다.
물론 기력이 없어서 무표정으로 다니고 건강상태가 달라서 활동을 못하는데, 이걸 모르고 '사람들과 어울리기 싫어서 일부러 저런다'고 하는 분도 있었듯이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런 건 아니었지만,
내가 생각지도 못한 좋은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
아무것도 없어도 친구를 해주는 사람들이 있구나
하는 깨달음 말이다.
친해지려고 하면 다들 결혼을 하고 이사해서 지금은 각자의 삶을 응원하고 있다.
또 결혼해서 떠날 천사 같은 동생만이 교회에서 날 대해주고 있지만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게 이렇게라도 사람관계가 지속되니 감사하다.
예전에는 유명해지고 싶고 인기 많고 싶고 죽기 전에 이름을 남기고 싶고 완전 능력은 없으면서 욕심은 한가득이었는데,
지금은 이름 없이 죽어도 좋고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나 사람들을 대하고 싶다.
환절기에는 여전히 한 번씩 눈알이 도는 것 같이 어지럽지만
예전 어떤 친구가 내 말을 듣더니 '후유증'이라고 말해줘서 그런가 보다 하고 살고 있다.
아까 마무리 지으려고 했는데 길어졌다.
하하하~
아부지는 70이 넘으셨고 엄마는 60대 후반이신데 나보다 짱짱하시다.
오빠도 언니도 새로 태어난 조카도 나보다는 다들 건강하다.
그래서 감사하다.
내가 부디 가족들에게 짐이나 민폐가 되지 않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생각날 때마다 기도하고 있으니
건강하게 해 주시거나 아니면 다른 방도를 열어주시겠지!
건강했을 때는 건강함의 소중함을 모르고
건강을 잃었을 때는 건강에 대한 박사가 되어가는 내가 참 웃긴 것 같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나는 건강하지 않아도 주어진 대로 감사하게 살고 있다!
'가족이 벌어오는 거 집에서 편하게 먹고 쉬면 되겠네'라고 생각하신다면 큰 오산인 게
부잣집도 아니고
다들 10대 때부터 일해온 식구들 사이에서 죄송하기만 하고
나도 일을 하고 싶은데 마땅한 일이 없으니 답답할 때가 많지만
이외에도 가족들이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표정이 어떤지, 어떤 포인트에 웃는지, 지금 상태가 어떤지 등등 마음 써 줄 수 있고 집안일을 할 수 있으니 감사하다는 뜻이다.
기쁘고 기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