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대학 전공은 중어중문과이다.
교육대학원 전공도 중국어과이다.
그런데 나는 중국어를 못한다.
글을 쓰기 위해 ‘내가 못하는 게 뭐가 있을까’ 생각하다가 이 주제가 퍼뜩 생각났다.
어쩌면 일 순위로 썼어야 했을 주제였는데, 왜 지금 와서 생각이 났나 모르겠다.
‘못하는 데 왜 선택했어요?’라고 물을 수 있다.
이걸 대답하려면 대학에 갓 입학한 시절로 돌아가야 한다.
때는 2005년.
내 나이가 다 드러나지만 어쩌리~
나는 고등학교 시절 제2외국어로 독일어에 흥미가 높아 있었던 상태라 독일어와 문예창작을 고민하고 있었었다.
고민까지는 아니었고 생각일 뿐이었다.
그때 나의 성격은 내가 뭘 하고 싶다고 주장을 하거나 뭘 잘하는지도 몰랐다.
그나마 ‘독서’는 잘하는데 ‘독서과’는 없지 않은가!
글도 잘 쓰는 편은 아니었다.
그래도 그나마 익숙한 '글' 쪽으로 기우는 편이 없잖아 있었는데,
이 시기에 누군가가 나에게 ‘글은 돈이 안 돼!’라고 말했었다.
그래서 단숨에 문예창작과 국문과는 포기했다.
포기한 이유도 글은 언제든지 쓸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럼 자신 있었던 독문과를 가면 되지 않느냐’ 하실 수 있다.
맞다!
독문과를 가거나 혹은 다른 과를 가더라도 독문과를 복수전공으로 택했다면 됐을 일이었다.
하지만 당시 사회적으로 ‘중국이 뜨고 있다’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을 무렵이었어서
엄마와 사촌언니는 이 분위기에 편승해 나에게 ‘중문과’를 추천하셨고
학교 이름만 보고 갔던 나는 아주 자연스럽게 접해보지도 못했던 중문과를 덥석하고 가버렸다.
애초에 인문학부를 가서 그 안에 있는 과를 선택하면 되는데, 나는 어리석게도 무조건 중문과로 돌진해 버렸던 것이었다.
그래서 나에게 암흑기는 20대 때부터 시작되었다.
중문과에는 온갖 뛰고 날고 공중부양 하는 분들이 많는데,
중국에서 살다 온 사람이 태반이었고, 고등학생 때 중국어를 잘해서 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나같이 아무 생각 없이 온 사람들은 거의 1프로에 불과한 듯했다.
대학교 1학년 기초 중국어 시간에 교실 맨 쥐에 앉아 중국어 발음을 처음 들었다.
웃겼다.
난생처음 듣는 중국어 말소리에 혼자 속으로 웃었었다.
그런데 공부를 하다보니 국어, 역사나 독일어처럼 자연스럽게 이끌려서 공부하게 되는 마음이 하나도 없었고,
억지로 쥐어짜야지만 겨우 섭취가 되는 나날들이 계속되었다.
대학원도 마찬가지였는데, 임용고시 준비를 하면서 임용 중국어 강의를 듣는데 마치 건조한 사막에서 걷는 느낌이 들었다. 내용자체가 너무 삭막한 느낌. 귀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고 들어오더라도 다 부스러지는 느낌.
하나도 재미가 없고 숨이 막혔다.
그래도 고등학생 때까지는 공부에 있어서 못하는 것도 아니었고 아주 잘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자신은 있었는데,
대학교와 대학원을 가면서 자신감과 자존감이 점점 내려갔고 열등감도 무럭무럭 자라났다.
누가 ‘너 못해!’라고 말한 것도 아니었는데도
남과 나를 비교하면서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옭아맸던 것 같다.
그래도 대학시절 ‘중국학교와의 복수학위’라는 제도가 생겨서 큰맘 먹고 지원하게 되었다.
‘중국에만 가면 다 잘 풀리지 않을까’, ‘중국어를 잘하게 되지 않을까’, ‘자신 있게 살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에 붙잡았다.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합격인원 미달로 갈 수는 있었다.
그런데 그때 엄마는 반대를 하셨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되었는데, 아무래도 내가 그곳에 가면 성격상 어떻게 될지 알고 계셨던 것 같다.
하지만 그 교수님이 여기서 취소하면 내게 불이익이 있을거라며 안좋은 말들을 하셔서 어쩔 수 없이 보내게 되셨다고 최근에서야 듣게 되었다.
난 그것도 모르고 그 교수님이 합격시켜줬다고 고맙다고 빵까지 사가지고 갔었었는데.
하아~
(그래도 추천서를 써주신 다른 교수님과 대학교 때 논문담당 교수님, 문학교수님은 정말 좋으신 분들이었다. 교수님 사회에도 친절하고 좋으신 분, 무례하신 분들이 있다는 걸 알았다. 사람사는 사회니까 뭐.)
당시 중국을 갔을 때 내 중국어 수준이 ‘이거 얼마예요?’, ‘싸게 해 주세요.’의 왕기초 수준이라 '무조건 잘 될거야'라는 마음에 간 댓가는 혹독했다.
같이 간 사람들은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이미 중급 수준이라 생활에 그다지 어려움이 없어 보였다.
나는 이때 정신이 퍼뜩 들었던 것 같다.
중국 땅에 가족은 없고 나 혼자였다.
중국어공부에 대해서 나를 호의로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다.
어쩌다 같은 공간에 살게 됐던 친구는 나보다 훨씬 잘하는 상태였기 때문에 자신의 실력을 높이기에 급급했지 내가 어떤지 살펴봐주질 않았다.
‘네가 잘해야지. 왜 친구탓 하냐? 그 친구도 돈 내고 간 곳인데.’라고 할 수 있다.
맞다!
도와주길 바라는 마음이 컸는데 표현하지 못한 내 잘못도 있다.
그 친구는 자기 선에서 다른 면으로 이끌어 준 면도 있고 배려해 준 면도 있었으니!
그래서 나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만약에 내가 도울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도울 사람이 가까이 있다면 돕겠다고.
당연히 불평불만만 토하거나 탓만 하는 사람은 함께 하기 힘들겠지만 적어도 도움이 필요하고 고맙게 여기는 사람에게.
그런데 내가 지금 이렇게 말할 자격이나 있는지 싶다.
웃긴 건, 무슨 깡으로 기숙사에서 나와서 외주를 했던 건지 지금 생각해 봐도 알 수가 없다.
그래도 같은 과 동생이 같은 아파트로 이사 와서 다행이었지, 아니었으면 정말 더 힘들었었을지 모른다.
원룸 같은 곳에서 살면서 두려움, 불안, 걱정들이 이때 막 생기고 자라나기 시작했다.
원래 성격은 긍정적이고 ‘하면 된다’는 성격이었는데,
혼자 있다가 누가 쳐들어오지 않을지, 중국어를 잘 못하는데 일처리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든 게 막막했었다.
중국꼬마아이가 중국어를 잘하는 걸 보면서 ‘나보다 우위에 있다’라는 바보 같은 생각까지 하며 기가 죽었었다.
그래도 착한 선배언니와 같은 아파트 사는 동생 덕분에 여차저차 지내긴 했는데,
마음이 참 힘들었다. 태어나서 인생의 쓴맛을 중국에서 봤다.
그래서 당시 아일랜드로 교환학생을 갔던 친구가 ‘GLEE(글리)’라는 미드를 추천해 줘서 보게 되었는데, 정말 많은 위로를 받았었다.
이 미드의 OST들이 아직도 내 플레이리스트에 있다.
아무튼 다시 돌아와서
이렇게 중국을 일 년 반쯤 다녀오니 그래도 HSK5급 실력은 되었다.
같이 다녀온 사람들은 이미 중국에서 고급실력이 되어 중국에서 학교를 다니면서 회사에 인턴으로도 출근하고 그랬었는데, 나는 이 정도밖에 안 됐다.
학교에서 보내준 게 정말 기적이었지.
실력은 조금 늘었을지 몰라도 내 마음은 피폐해졌다.
‘혼자’사는 세상을 처음 접해봐서 그런지 몰라도 굉장히 두렵고 무서웠다.
실패를 깊게 맛본 곳이었다.
이때부터 미래에 대한 걱정이 시작되었다.
실패와 미래걱정은 항상 짝꿍인가 보다.
대학원도 솔직히 도피한 하나의 방편이었다.
명목상으로는 교사가 되기 위해 교육대학원에 갔다고 자신했지만,
속으로는 중국어 실력이 없으니 갈 곳이 없어서 간 것이었다.
그곳에서는 역시나 중국어를 잘하는 동기들은 다들 나중에 뚝부러지게 기간제로 취업을 잘했다.
중국어는 중고등학교에 한 학교당 한 명이 있을까 말까 해서 일하기가 정말 힘들었다.
회사에 도전해 볼 생각이 안 들었던 게 HSK5급이지만 회화가 기초밖에 되지 않으니 스스로 문을 닫았고,
중고등학교 수준보다는 나으니 기간제로 2년 동안 대략 200~300군데를 지원했었다.
하지만 다 떨어졌다.
겨울이 되면 피가 마르는 것 같았다.
내가 노력한 곳은 하나도 되지 않아 힘들어하고 있는데, 과에서 전화가 왔었다.
일주일에 7시간을 가르치는 강사자리였다.
한번 해보자 싶어서 1년 간 했고 열심히 했지만, 내 안에서는 ‘실력 없는 내가 누굴 가르쳐’라는 생각에 이미 잠식당하고 있어서인지 이 길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으로 수학여행을 가게 되면 중국어담당 교사가 다 맡아야 하는데 이 얘길 전해듣고 걱정도 됐었고,
내가 아이들에게 그당시 현재 중국흐름이나 문화를 플러스로 알려줘야 하는데 그것도 힘드니 빨리 접어야 할 것만 같았다.
앗! 그리고 자꾸 탓하게 되는 글을 쓰게 되는데,
이전 ‘나는 연애를 못한다!’에서 나를 가스라이팅 했던 남자 친구를 이즈음에 사귀고 있었었다.
나에게 들어온 소중한 강사자리였는데, 그때 남자 친구가 말하길 ‘네가 거기에 있는 남자들이랑 같이 있는 게 싫어’라고 말했었다.
이때는 ‘나를 너무 좋아해서 그런 거구나 ‘ 여기고 좋아했고 ‘더 이상 일을 안 해도 되겠다’라는 결론을 마침 내렸는데,
시간이 흘러 되돌아보니 ‘가스라이팅이었구나’ 깨달았고, ‘내가 왜 나 스스로를 지키지 못했을까’라는 반성이 들었다.
그때는 눈에 초첨이 없었던 것 같다.
너무 정신적으로 나약해져 있어서 ‘이 남자 친구가 떠나면 누가 날 만나주지’라는 두려움이 있어서 일보다는 남자 친구가 먼저였었다.
부모님께 죄송했다.
대학 등록금, 생활비, 중국복수학위 등록금과 생활비, 대학원에서는 조교를 했었지만 그래도 초반에 들어간 등록금 등등 나에게 지출을 많이 하셨는데,
지금 내가 드린 거라고는 뇌경색으로 인한 요양생활이다.
‘하기 싫더라도 열심히 공부해서 다들 잘 일해.’라고 말할 수 있다.
인정한다.
하지만 하기 싫어서 안 한 건 아니었고, 나도 최선을 다했다.
일단 중국어를 선택했으니 책임져보려고 했으나 도무지 되지가 않았다.
최근에 어떤 연예인의 인터뷰를 봤는데
‘아침 일찍 학교에 가서 예습복습을 다하고 저녁에도 열심히 공부했는데도 반에서 뒤더라. 확실히 공부머리는 따로 있는 것 같다’라는 말에 너무 공감을 했다.
나도 내 공부머리가 딱 거까지 였던 것이다.
대학원을 다니면서 국문과 계열 센터에서 조교를 하게 되었는데,
그때 처음 간 센터에서 조교들의 분위기를 보자마자 내가 찾던 곳이구나 바로 느껴졌었다.
중국어과를 보면 사람들이 모두 다 활발하거나 괄괄한 성격을 가졌어서 나랑은 반대였는데, 내가 이상한 게 아니었구나.
정말 순간의 선택이 20대를 좌우했다.
내가 똑 부러지는 성격이었다면
공부머리가 좀 더 있었다면
중간에 내 갈길을 찾아갔거나
아니면 중국어를 끝까지 잡고있어서 지금도 외부에 외출하지 못하는 건강상태라도 번역일이라도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프고 나서야 나 자신을 돌아보고 알아가면서
뒤늦게 내 길을 돌아보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동안 집에서도 티브이를 볼 때 오빠가 장난으로 ‘무슨 뜻인지 알아?’라고 물어볼 때 민망하고 부끄러웠었다.
부모님이 고생고생해서 보내준 대학과 대학원에서 아무런 능력도 가져오질 못했으니 말이다.
돈만 버린 셈이다.
아주 큰 실패이기도 하다.
10년의 실패.
정확히 말하면 30대 초반까지 해서 13년의 실패.
뇌경색부터는 실패라고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반성은 실패가 아니라 성공의 첫걸음이니까.
라고 자신있게 말하고 싶은데 '무슨 성공이 있어야 이 과거의 실패들의 습관이나 흔적들을 없애든가 하지' 라는 말이 절로나온다.
하하하하~
어쨌든 오히려 이 주제가 나를 자유롭게 한다.
나는 중국어를 못한다!!!!!!!!!!!!!
그래도 애증의 관계라서 미운 정 고운 정은 다 들었다.
가끔 꺼내보거나 티브이에서 들리면 친숙하다.
영어도 못하지만 영어는 좋아한다.
일어도 못하지만 요즘 듀오링고로 공부 중이다.
독일어도 다 까먹었지만 여전히 좋아한다.
언어들을 좋아하지만 마스터한 언어는 없다.
그래도 평생 배워가면 되니까 괜찮다는 생각이다.
‘돈을 벌려고 이걸 한다 ‘라고 생각해서 시작하면 아무것도 못할 것 같다.
그냥 ‘내가 좋아하니까’, ‘하다 보니’로 시작하련다.
그리고 이제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만 하려고 한다.
물론 새로운 것에 도전해야 뇌에도 좋고 변화가 있다고 한다.
일단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걸 충분히 하면서 자존감과 자신감을 높여놓고
새로운 분야는 천천히 조금씩 해보고 싶다.
그래서 '글'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부족하지만 내가 고민하며 쓴 과정이 있으니까 작은 성취들이 있어서 자신감이 조금씩 회복되어 가는 것 같다.
못하는 건 못한다고 인정하고 글을 쓰며 살아가련다!
이렇게 세상에 찌든 마음을 토닥여주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