윗 집 빌런! 아랫집 상전! 앞 집 꼴통! (제4화)
<지난 이야기 마지막>
은영은 저녁도 먹고, 과일도 먹고, TV 보면서 얘기도 하다가 밤 9시가 되어 집을 나서려고 했다. 엄마가 그런 은영을 붙잡고 다시 당부했다.
"주변에서 좀 괴로운 일이 있어도 그냥 참고 넘겨... 내가 여태껏 살아보니 부딪히고 덤벼봐야 나만 아프더라... 너무 시끄럽고 괴로우면 그냥 밖으로 나와... 갈데없으면 엄마한테 오고... 알았지 우리 딸."
별 다른 내용 없는 늘 똑같은 말인데, 그날따라 은영은 가슴에 맺힌 게 스르륵 녹는 것 같았다. '이래서 엄마손이 약손이구나.' 은영은 가슴이 따뜻해져서 집을 나섰다. '그래... 엄마 말이 맞지 어차피 2년 살고 나올 건데... 시끄러운 것 좀 참지 머... 나머지 시간에는 정말 조용하잖아...'
은영은 집에 돌아와 글을 쓰기 위해 노트북 앞에 앉았다. 3층은 창가에 책상을 놓고 노트북을 켜면 시원한 바람도 불어오고, 아파트 단지에 오고 가는 사람들도 볼 수 있어서 은영은 여기에서 밤마다 글을 쓰는 것이 좋았다. 은영은 한참 글쓰기에 빠져 모니터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열심히 자판을 두드리고 있었다.
창가에서 글을 쓸 때, 유일한 단점이 있었는데... 바로 담배 냄새였다. 많은 이들이 아파트 밖으로 나와서 주차장에서 담배를 피우는데 저층이다 보니 바람이 세게 부는 날에는 은영의 집까지 연기가 올라왔다. 좀 참기 힘든 날은 창문을 닫고, 안 그런 날은 잠깐 나다가 사라지곤 해서 창문을 열어뒀다.
그날도 은영은 담배냄새가 나는 듯했지만 금세 사라지겠거니 생각하고 글 쓰는데 열중하고 있었다. 그런데 잠시 후 지금 생각해도 너무 소름 끼치고 끔찍한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드르르르륵....) '커억....' 퉤!"
더하기 윗 집 빌런
은영은 자신의 두 귀를 의심했다. 아니 그럴 새도 없이 마치 윗 집에서 은영의 얼굴에 침을 뱉은 것 같은 불쾌함에 얼른 창문을 닫았다. 그날따라 창문은 왜 그렇게 뻑뻑한지... 잘 안 닫히는 창문 때문에 은영의 손톱이 뒤집어졌다. 신경질이 났고, 너무 모욕적이고, 불쾌하고, 짜증이 났다. 온갖 육두문자만 떠오르며 당장 저 놈을 잡아다 경을 쳐도 시원찮을 기분이었다.
은영은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도대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다. 사고가 완전히 정지해 버렸다. '관리실에 전화를 할까? 경찰서에 신고를 해야 하나? 아니면 직접 올라가서 따져?' 당장 생각나는 모든 시뮬레이션을 돌려 봐도 결과는 '내 집에서 내가 담배 피우고 침 뱉는데 무슨 상관이에요?'라는 대답에는 할 말이 없어졌다. 딱히 은영이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것은 아니었다. 정신적인 피해? 우리나라에서 그런 게 받아들여지던가? 돌려차기에 맞아 기절한 상태로 성폭력을 당해도 보호받기 힘든 세상에...
은영은 억울하고 분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이럴 때 남편이 있었다면... 그래 그랬다면... 그래서 남자가 필요한 건가? 대신 나가서 싸워줄 호위무사가 필요한 건가? 은영은 자신도 모르게 그런 쪽으로 생각이 발전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억울함을 넘어 서글퍼지기 시작했다. 어릴 때는 경쟁자가 남자건 여자건, 장소가 학교건 회사건 은영은 다 물리칠 자신이 있었다. 자기 힘으로 혼자서 잘 살아가는 멋진 인생이었다.
하지만 울타리를 벗어나 소속도 없이 진짜 야생의 세계에 던져진 자신은 그저 힘없는 여자 생물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무기력함에 미치도록 괴로웠다. '친구들이 말한 결혼의 안정감이라는 게 이런 걸 말한 거구나...' 은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던 지난날의 선택을 처음으로 후회했다. 끊었던 술이 마시고 싶어지는 밤이었다.
은영이 며칠간 가만히 관찰해 보니 그동안의 담배 냄새는 전부 윗 집 빌런의 소행인 것 같았다. 바람이 세게 불던 어느 날 늘 담배를 피우던 남자가 주차장에 있었는데도 냄새가 날아오지 않았다. 어떤 날은 남자가 없는데도 담배 냄새가 심하게 났다. 어디서 나는 냄새인지 몰라서 창 밖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는데, 곧 윗 집에서 '드르륵' 창문 닫는 소리가 들렸다. 그 뒤로는 창문을 닫고 있어도 집안에 담배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외출하고 돌아오는 길에 윗 집 베란다 문이 열려있어서 밖에서 보게 된 내부는 딱 흡연실 같아 보였다. 둥근 갈색 테이블 하나에, 의자 하나가 있었는데, 아마도 테이블 위에는 재떨이가 있을 것으로 추정됐다. 창문을 열어놓은 날, 어디서 나는지 알 수 없이 흘러들어오던 담배냄새는 윗 집의 꽁초 냄새가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짐작이 확신이 되는 날은 그리 멀지 않아 찾아왔다. 이번엔 윗 집에 문이 열려있었는지 '드르륵'소리 없이 담배연기의 기습 공격이 시작됐다. 그리고 걸걸한 남자의 통화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소리인지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소란스러웠다. 그렇다 이렇게 딱 들어맞는 표현이 없다. 시끄럽고 소란스럽고 이기적이었다. 말하는 투로는 최소 건달 아니면 조폭이었다. 은영은 술을 많이 마셔서 피부는 검붉고 배불뚝이에 사람 깔보는 듯한 눈빛을 하고 있는 윗 집 빌런의 모습을 상상했다. '아마 분명히 문신도 있을 거야...' 은영은 공격을 피해 창문을 닫으면서 전의를 상실했다.
은영은 기분 더러워지는 윗 집 소음을 다시 들을까 무서워 창가 책상 근처에 잘 가지 않게 되었다. 글도 잘 쓰지 않게 되었다. 가끔씩 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창문을 열어둘 때면 윗 집에서 '드르륵'소리가 나는지 날카롭게 신경을 곤두세웠다. 소리가 나면 잽싸게 창문을 닫았다. 은영은 노이로제에 걸릴 것 같았다.
새벽 4시 반 또다시 윗 집 배불뚝이 빌런의 발망치 공격이 시작됐다. 은영은 장애인일 거라면서 배려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이려 했던 자신의 과거가 비겁한 변명처럼 느껴졌다. 윗 집 빌런... 저런 녀석은 발망치 소리도 저렇게 혐오스럽게 내는 것이 당연했고, 창문을 열 때도 저렇게 무례하게 '드르륵'소리를 내는 것이 당연했다. 전화 통화 소리도 저렇게 이기적으로 버럭버럭 소리 지르며 소란스럽게 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했다.
감정 해소 창구가 막히자 은영은 또 점점 피폐해져 갔다. 어쨌거나 이 해괴한 난관을 넘어서야 했다. 은영은 고민하기 시작했다. '관리실에 전화를 할까? 뭐 그래 봤자 경고 방송 정도 하고 말겠지... 윗 집 빌런이 듣기나 하겠어? 아니면... 엘리베이터에 호소문을 붙여볼까?...... 아니야 인터넷 뉴스 보니까 무뢰한들한테는 씨도 안 먹히는 것 같았어. 아~ 어쩌면 좋지? 뭔가 적진에 쳐들어 갈 만한 명분이 있어야 하는데... 아니 그전에 적에 대한 정보를 모아야 하는데... 아... 옛날 같으면 떡이라도 돌리면서... 아 그래! 이사떡!' 은영은 유레카를 외쳤다.
은영은 현재 자신의 처지를 십분 활용하기로 했다. 요즘 세상에 누가 이사떡을 돌릴까 싶었지만 적진을 염탐하기에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사 온 지 얼마 안 됐으니 이사떡을 돌린다는 명분이 제일 자연스러웠다.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윗 집이건, 아랫집이건 하나 같이 마음에 안 들었지만, 이사떡을 돌리고 적들의 정보를 수집해야 앞으로도 잘 대응해 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생각해 보니 위 건, 아래 건 아직 얼굴도 모르고 있었다. 건달이든 진짜 조폭이든, 깐깐한 아줌마든 일단 정보가 필요했다. 옛날부터 가장 무서운 적은 내부의 적과 미지의 적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 피폐하던 은영에게 의욕이 생기기 시작했다. 게다가 아랫집에도 앞으로 소음문제로 얼굴 붉히기 전에 미리 인사를 해둔다면 이건 그야말로 일석이조였다.
그렇게 작전 구상에 열을 올리던 은영에게 어느 날 저녁 전화가 왔다. 모르는 번호였지만 왠지 은영의 옛날 집에 이사 온 신혼부부일 것 같았다. 주택 매매 후 두 달 안에 중대한 하자가 발생하면 비용을 물어줘야 한다는 계약서 문구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번 여름에는 폭우에, 물난리에, 태풍에 사람이 정신을 못처릴 정도로 원, 투, 쓰리... 레프트 훅, 라이트 훅, 어퍼컷이 들어왔다.
은영은 만약 자신의 예상이 맞다면 일부러 주소 이전을 하지 않고 옛날 집에 남겨둔 주택화재보험에 비용을 청구할 생각이었다. 부동산에서 계약 내용 설명을 들으며 이 문구를 봤을 때, 처음 이사 올 때가 생각났다. '두 달 안'이라는 이 문구 때문에 처음 집을 사러 다닐 때보다 더 꼼꼼히 집안 상태를 체크했었다. 어떻게든 수리할 곳이 나오면 두 달 안에 발견해서 전 주인에게 비용을 청구해야 했기 때문이다.
은영은 두 가지 중대한 하자라고 생각되는 것을 발견했다. 비 오는 날이면 베란다에 어디서 새는지 모를 물이 고여있었고, 이사를 가면서 중문을 잘못 떼었다 붙였는지 고장 나 있었다. 은영은 계약서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했다. 그런데 전 주인은 이 상황을 어떻게 처리할지 도리어 은영에게 물어오는 고단수를 썼다. 어쩔 수 없이 답답한 사람이 움직여야 했다.
은영이 여기저기 알아보니 베란다에 새는 비는 아파트 연식에 따른 새시 실리콘 마감 문제로 전 주인의 책임이 아니었고, 중문은 이사업체에서 와서 다시 설치하겠다고 하는 것을 어차피 인테리어 하면서 새 걸로 교체하려고 했기 때문에 은영이 그냥 떠안았다. 결국 전 주인이 할 일은 하나도 없었고, 전부 은영의 몫이었다. 아파트 관리실, 인테리어 업체와 직접 처리하며 나쁜 마음을 먹고 있어서 벌 받는 것 같은 기분에 은영에게는 조금 부끄러운 기억이었다.
은영은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전화를 받았다. 역시 예상이 적중했다. 신혼부부 중 신랑 되는 사람의 전화였다. 은영은 상황이 자신의 예상대로 흘러가자 아직 촉이 살아있음에 자신감이 생겼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여기 103동 904호에 새로 이사 온 사람인데요. 여기 보일러 고장 난 거 아니에요?"
아직 중후함은 고사하고 혀 짧은 발음 때문에 응석받이 느낌도 제대로 못 벗은 앳된 목소리로, 강해 보이려고 다짜고짜 용건부터 세게 말하는 애송이를 상대하고 있자니 은영은 피식 웃음이 나며 가소로워졌다. 하지만 교양 있고 여유로운 배운 사람의 품위를 잃을 순 없었다. 회사에서 저런 식으로 의욕만 앞세워 덤벼들던 남자 후배들을 여럿 다뤄본 은영이었다.
"아~ 그래요? 뭐가 어떻게 안 되나요? 제가 이사 나오는 날까지 잘 쓰고 나왔었는데..." 은영은 싸움을 걸어와도 받아 줄 생각이 없다는 듯이 가볍게 받아넘겼다.
"아... 저... 온수를 틀어도... 뜨거운 물이 안 나오는데요..."
남자가 조금 당황한 듯 거침없던 태도가 약간 수그러졌다.
"아~ 그래요? 혹시 도시가스회사에 전화해서 가스 봉인 풀었어요?"
"네?"
남자는 완전히 당황했다. 은영은 속으로 '아가야 엄마젖 더 먹고 오렴…'이라고 생각했다.
"가스 봉인 풀었냐고요. 이사 나오면 도시가스요금 정산하고 봉인해서 막고 나오잖아요? 그거 풀었냐고요."
은영에게는 어떤 상황인지... 안 봐도 비디오였다. 말끝에 '~요'는 붙이지만 은영은 어느새 훈계조로 쏘아붙이고 있었다.
"아... 그런 거예요? 죄송해요 그런 게 있었구나.... 헤헤헤"
남자의 태도가 180도 달라져 처음 집 보러 왔을 때의 앳된 아이로 돌아와 있었다. 늘 집에서 엄마가 해주는 밥만 먹고 다니던 모습이 그려졌다. 은영은 한 번 더 원숙한 태도로 말했다.
"도시가스회사 전화번호 문자로 보내놨으니까 거기로 연락해서 가스봉인 풀고요... 그러고 나서도 온수 안 나오면 또 전화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전화 너머로 남자가 꾸벅 인사하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전화를 끊고, '왕년의 이은영 아직 안 죽었네'라는 자신감이 팍 들었다. 아직 저 정도의 어린애는 제까짓 게 남자랍시고 아무리 세게 나와도, 사회물을 먹을 대로 먹다가 토할 것 같아서 나온 은영에게는 상대가 안 됐다. 은영은 갑자기 의욕이 넘쳐흘렀다. 윗 집 빌런과 아랫집 상전을 처리할 용기가 생겼다.
앞 집 꼴통 추가요.
은영은 인터넷에서 떡집을 검색하며 예산과 윗 집 빌런과 아랫집 상전에게 할 말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삐빅 삐빅 소리가 들렸다. 아직은 문을 열어 놓고 살아야 하는 날씨라서 처음에는 밖에서 나는 소리인 줄 알았다. 하지만 소리는 점점 노골적이고 신경질적으로 변했다. 은영은 자세히 소리를 들어봤다. 집 현관에서 나는 소리였다.
은영은 너무 깜짝 놀랐다. 그리고 무서웠다. 조심히 현관문에 다가가 보니 누군가 번호키를 누르고 있었다. 비밀번호 오류 부저가 울리자 손잡이를 돌려 덜컹덜컹 소리를 내고 있었다... 은영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인터폰의 화면을 켜봐도... 문에 있는 구멍으로 밖을 봐도... 캄캄한 어둠뿐이었다. '술주정뱅이 인가?' 은영은 번호키 외에 걸쇠와 문고리까지 천천히 걸어 잠그고 조심스레 밖을 향해 말했다.
"누구세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