윗 집 빌런! 아랫집 상전! 앞 집 꼴통! (제2화)
<지난 이야기 마지막>
오전이면 끝나리라던 이사는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겨우 끝났다. 그 사이 거짓말같이 비는 그쳤지만 푹푹 찌는 더위가 남아 사람들을 괴롭혔다. 은영은 포장이사라고 해서 TV광고처럼 진행사항 정도만 체크하고 가구 배치나 집기 정리 위치 따위만 결정하면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광고 속 모델의 도자기 같은 피부처럼 그런 이사는 말도 안 되는 꿈같은 얘기였다.
이삿짐 정리해 주시는 이모님이 그릇 정리할 위치를 물어왔을 땐, 대충 얼른 마무리해서 다 내보내고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은영이 가구 사이즈 하나하나까지 측정해서 그린 평면배치도는 커다란 발자국이 찍힌 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휴지 쪼가리로 전락해 있었다. 마감이 덜 되어 널브러져 있는 전선과 그저 있을 만한 곳이다 싶은 곳에 대충 놓인 집기와 가구는 마치 은영의 현재 속을 꺼내 놓은 것처럼 이사 전 보다 훨씬 더 어지럽게 널려있었다.
겨우 인부와 설치기사를 다 돌려보내고 난 뒤, 은영은 뒷정리를 위해 엄마와 둘이 남아있었다. '아 도저히 당 떨어져서 안 되겠다. 뭐라도 먹고 해야지... 그래도 이삿날은 역시 짜장면이지?'라며 중국집에 짜장면과 탕수육을 배달시켰다. 은영은 지금 힘든 것에 비해 자기가 한 일이라고는 미루고 넘기는 게 전부였다는 사실이 매우 못마땅했지만 지금은 우선 배부터 채워야 했다.
넘기고 미뤄버린, 쌓인 감정들의 해소방법
"(또독 또독... 또또독...) 103동 904호... 아! 아니지 아니지... 아휴 멍청이 (따다다다다다닥...) 105동 304호... 음...."
은영은 자기 머리를 한 대 콕 쥐어박았다. 배달앱에 새 주소를 등록하면서 아무 생각 없이 튀어나온 옛날 집 동호수에 자신도 깜짝 놀랐다. 언제부턴가 이렇게 무의식이 의식을 밀어낼 때면 은영은 말년에 치매에 걸리는 건 아닌지 항상 걱정이 앞섰다. 갑자기 물건 이름이 생각 안 난다던가... 포털에서 뉴스를 읽다가 뭔가 검색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뭐였지라며 불안해진다던가... 인터넷 쇼핑으로 주문한 물건이 아무리 기다려도 안 와서 배송지를 확인해 보면 옛날 주소로 보냈다던가... 걱정스러운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특히 배달앱처럼 위치추적으로 주소를 탐색하고 상세 동호수만 입력하는 방식이면 열에 아홉은 실수를 했다. '나중에 혼자 살아야 하는데...' 깔끔한 성격의 은영은 반려동물도 키우지 않았기 때문에 고독사도 걱정이 됐다. 한번 본 사람은 이름이며 얼굴이며 잘 기억했고, 주변의 사소한 것까지 하나하나 잘 챙겼던 은영의 총기는 온데간데 없어지고, 덤벙이가 되어버린 자신이 역시 매우 못마땅했다.
무엇보다 작가지망생이 되고 나서 머릿속에서 맴돌기만 하고 자판으로 처지지 않는 낱말이 나타나면 스스로 왜 이렇게 멍청하냐며 머리를 쥐어뜯기 일쑤였다. 이럴 때는 드라마를 본다던가, 아무것도 안 하고 멍을 때린다던가 해서 시간을 흘려보내면 갑자기 생각이 나곤 했다. 글을 쓰면서 은영이 터득한 나름의 해결방법이었다.
하지만 시간을 내다 버리는 것 같은 이런 비효율적인 방식은 스스로를 더 멍청이로 여기게 했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 은영은 국어사전도 독파해 보고, 사전 순서대로 매일 낱말 10개씩 작문을 해보기도 했지만 떠오르지 않는 것과 많이 알고 있는 것은 별개의 문제인 것 같았다. 다행인 것은 그렇게 고생해서 다시 기억해 낸 낱말은 새 생명을 얻어 다른 모습으로 기억 속에 각인됐다.
은영은 순간순간 생기는 감정을 넘기고 미루는 데 익숙해지다 보니 이렇게 된 것 같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은영은 중견기업의 제조부문 팀장이었다. 젊은 나이에 빠르게 출세했고, 여성으로서는 최초였다. 회사의 신입사원 교육자료에는 항상 은영의 이름이 올랐다. TV 인터뷰 프로그램에도 출연했다. 많은 후배들에게 둘러싸여 자신들의 롤모델이라며 아이돌 못지않은 인기도 누렸다. 그렇게 영원히 찬란히 빛날 줄 알았는데...
은영의 회사에 인사개편이 이뤄지며 새로 부임한 부문장은 마초남이었다. 포마드로 넘긴 머리, 상아무늬 안경테와 도트무늬 넥타이, 행커치프를 꽂은 쓰리피스 정장, 금색 롤렉스 시계와 번쩍이는 갈색 구두... 말을 안 했다 뿐이지 누가 봐도 젠틀맨임을 뽐내고 다니는 모습이었다. 항상 '레이디 퍼스트'를 입에 달고 살았지만, 정작 은영은 애완동물 취급 같아서 뭔가 석연치 않았다.
은영의 그런 걱정은 얼마 후 현실이 됐다. 팀장들이 모인 미팅자리에서 부문장은 은영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이제는 회사 여직원을 대표하는 얼굴마담을 바꿀 때도 되지 않았느냐고 했다. 은영은 '여직원'이라는 단어부터가 거슬렸다. 부문장은 '여성이 일하기 좋은 직장, 여성이 일하고 싶은 직장'을 만들겠다며 좀 더 젊고 싱싱한 사람을 새 얼굴마담으로 세우자고 했다. 만약 그럴만한 인물이 없으면 차라리 잘 나가는 연예인을 모델로 세워 기업 이미지 광고를 시작하자고 했다. 그러면서 팀장들의 의견을 물어왔다. 아무 말도 없자 '레이디 퍼스트'라며 은영에게 우선 의견을 말해보라고 손짓했다.
은영은 순간의 감정을 넘기고 미루는 것에 이골이 나 있었지만, 이 순간의 모멸감은 여태까지 살아온 중에서 최악이었다.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을 억지로 참으며 은영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똑같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팀장 똑똑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들었는데... 오늘 보니 소문이 좀 과장된 면이 있는 것 같네..."
부문장은 금니가 보일 정도로 은영을 보며 씩 웃었다. 그 후 회의 시간에서 은영의 의견이 묵살되는 것은 당연했고, 실적 보고 PT가 중간에 잘리기도 하더니, 나중에는 발언권마저 주지 않는 투명인간 취급을 하기 시작했다. 은영은 스트레스로 점점 몸이 약해졌다. 그리고 코로나 백신 2차 접종을 하고 나서 쓰러졌다.
백신 부작용이었는지, 스트레스 때문에 생긴 심적 발병이었는지, 아니면 진짜 노화였는지... 쓰러진 이후 은영은 건망증이 매우 심해졌다. 사람들의 얼굴과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했고, 주변을 챙기던 꼼꼼하고 섬세하던 총기는 흐려졌다.
은영은 억울했다. 지난 20년간의 노력이 부문장의 2년 훼방으로 연기처럼 사라진 것 같았다. 은영은 계속 넘기고 미루면서 어떻게든 끝까지 버텨보려고 했다. 하지만 중요한 협력업체와의 미팅 약속을 잊기도 하고, 팀원 누구에게 업무지시를 내렸는지 까먹기 시작했다. 예전에 남들에게 정신 차리라며 쏘아붙였던 말들이 자신에게 돌아오자 은영은 결국 사표를 냈다.
세상도 은영도 팬데믹 이전과 이후의 삶은 180도 변해있었다. 개인적인 경험까지 소중히 하겠다던 다양성의 시대는 저물었고, 조직폭력배, 마약, 흉기난동 같은 연이은 강력범죄 소식에 사회는 점점 불안해졌다. 얼마 전까지 어린이 집의 아동학대 사건이나 스쿨존 어린이 교통사고로 민식이 법을 강조하며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던 시선은 교권침해나 촉법소년 등 규제강화의 목소리로 옮겨갔고, 나라 밖은 전쟁과 기후변화 그리고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우익의 득세 소식이 전부였다. 팬데믹은 마치 청산하지 못하고, 넘기고 미뤄버린 이기적 유전자들의 복귀무대 같았다.
은영 또한 백신이 자기 안에 무언가 흔적을 남기고 갔음을 느꼈다. 은영은 바깥세상의 변화와 상관없이, 넘기고 미뤄버린 자기 안의 것들만은 청산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 방법을 찾아 나섰고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처음에는 소설이라는 허구의 장치를 통해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볼까도 싶었지만, 계속 생각하고, 쓰고, 고치기를 반복하다 보니 넘기고 미루는 것은 비겁하고 무능한 것이 아니라 세련되고 성숙하게 익어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도망치는 것이 아니고 시간을 들여 결실을 맺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지금 은영 앞에 놓인 맺어야 할 결실은 이삿짐 뒷정리였다. 배를 채우고 나니 시간이 저녁 7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오늘 잠잘 곳도 없는 신세가 된다. 은영은 아버지 저녁 챙겨드리라며 엄마도 보내고 혼자만의 이사를 시작했다. 우선 시작은 바닥청소였다.
이사를 하면서 보니 집주인이 신경 써준다고 해준 도배인데, 도배사들이 초짜였는지 바닥이 풀 범벅이었다. 지금 이대로 둔다면 모든 집기가 끈적끈적해져 기분 나빠질 것 같았다. 게다가 커터칼 조각이 풀과 범벅이 되어 바닥에 딱 달라붙어 위험한게 방치되어 있었다. 제거도 쉽지 않았다.
우선 스팀 청소기로 바닥에 풀을 닦아냈다. 그리고 물걸레로 다시 한번 구석구석을 닦아 내고, 물기가 마르기를 기다렸다가 물걸레 청소기로 마무리를 하려고 스위치를 켜는 순간! 인터폰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아~ 여기 상황실인데요... 105동 304호죠?"
"네... 안녕하세요..."
"거 혹시 청소기 돌리는 중이세요?"
"네... 그런데요... 아 혹시 시끄럽다고 민원 들어왔나요?"
"네... 잘 아시네... 우리 아파트는 저녁 8시 이후로는 청소기, 세탁기는 사용하지 않는 걸로 되어있어요..."
"아... 네 죄송합니다. 오늘 이사 와서 잘 몰랐어요.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아... 오늘 이사 오셨구나... 그래도 조심 좀 부탁드립니다. 수고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인터폰 너머로 나이 지긋한 상황실 근무자가 여자라고 다짜고짜 반하대하는 말투가 걸렸지만 잠시 접어두고 생각해 보니, 은영은 아차 싶었다. 본인도 작가지망생이 되다 보니 층간소음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잘 알고 있었는데... 오늘이 이삿날이라서 아랫집이 어느 정도 이해해 주리라 넘겨짚은 것이 문제였다. '나라도 이 시간에 청소기 소리는 참기 힘들지...' 은영은 그나마 스팀 청소로 어느 정도 끈적임이 해결돼서 나머지 바닥청소는 다음으로 미뤘다.
'그럼 바닥청소는 내일 하고 우선 안방에 침구부터 정리해야겠다' 은영은 잘 자리는 있어야겠기에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가구들이 놓여있는 상태가 아주 조금씩 어긋나 있었다. 인부들을 빨리 물리고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에 대충 OK 하고 넘어간 것이 원인이었다.
아랫집에 조금 미안하긴 하지만 가구 조금 움직이는데 큰소리야 나겠나 싶어서 은영은 서랍장과 화장대를 살살 움직였다. 가구 다리에 이미 양말을 신겨놔서 괜찮겠지 싶었다. 마지막으로 침대 프레임을 각 맞춰 움직이려는 순간! 다시 인터폰이 요란하게 어서 받으라고 울어댔다.
"아~ 여기 상황실인데요..."
아랫집 상전
은영은 또 한 번 상황실에 죄송하다고 사과를 해야 했다. '그래 맞아 윗 층에선 작은 소리라도 아래층에서는 큰소리라고 했어... 어쩔 수 없이 오늘은 이 정도로 하고 옷정리만 조금 더 하고 자야겠다.' 은영은 옷방으로 갔다. 큰 짐은 대충 이삿짐센터에서 정리해 놓고 갔지만, 비싸고 예민한 재질의 옷은 따로 캐리어에 쌌었다. 캐리어를 끌고 옷방으로 가서 지퍼를 여는 순간! 인터폰이 또 요란하게 울렸다. 이번에는 누군가 찾아왔다.
"누구세요?"
"아~ 네 상황실인데요... 층간소음민원이 하도 들어와서 제가 좀 와봤습니다. 늦은 시간이라 죄송하긴 한데... 문 좀 열어주시겠어요?"
"아~ 네~" 은영은 문을 열며 순찰 일지를 들고 서있는 경비아저씨에게 살짝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 층간소음민원이 계속 들어와서요... 혹시 뛰는 아이가 있거나 반려동물 키우시나요?"
"아니오. 아이도 없고 반려동물도 안 키워요."
"아... 그러시구나... 그런데 계속 시끄러운 발소리, 끄는 소리, 청소기 소리가 들린다고 민원이 빗발치네요..."
"아... 그래요? 죄송해요... 이삿날이다 보니 짐정리 때문에 많이 시끄러웠나 보네요. 진짜 조심할게요. 죄송합니다. 지금부터 안 할게요."
"아 넵 그럼 조심 좀 부탁드립니다. 저희도 민원이 계속 들어오면 이렇게 와 볼 수밖에 없어서요. 늦은 시간이지만 이해 좀 부탁드립니다."
"아이~ 아니에요... 괜히 저희 집 때문에 고생 많으시네요. 주의하겠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은영은 청소기나 가구 옮긴 건 그렇다 치고 옷방정리할 때 그렇게 소음이 났었나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근무자의 고압적인 태도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이사 첫날이라 경황도 없고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 같았다. 그래서 모든 정리를 내일로 미루고 침구만 얼른 정리해서 잠을 청하기로 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