윗 집 빌런! 아랫집 상전! 앞 집 꼴통! (제1화)
<지난 이야기 마지막>
몇 주 후, 한창 이사 준비 중인 은영에게 부동산에서 전화가 왔다. 인감증명서를 혹시 발급받았는지 물었다. 아직이라고 대답하자, 매수인 쪽 친정에서 자기들이 돈을 더 많이 부담하니 공동명의가 아닌 신부명의로 집을 사겠다고 했단다. 그래서 계약서는 나중에 잔금 치르면서 수정해도 되니, 매도용 인감증명서를 발급할 때 여자 쪽으로 떼어오라고 했다. 은영은 별생각 없이 알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다시 며칠 후 전화가 와서 또 인감증명서 발급을 묻더니, 시가 쪽 반대가 심해서 원래대로 공동명의로 하기로 했다며 인감증명서를 기존대로 발급받아달라며 귀찮게 해서 죄송하다고 했다. 은영은 한 번 더 별생각 없이 알았다고 했지만 그 뒤로 세 번의 똑같은 전화가 걸려왔다.
결국 잔금 치르는 전날까지 인감증명서 발급은 연기됐다. 은영은 의기양양하게 자신을 아래로 깔아보던 신부의 표정이 생각났다. 은영은 웃음이 피식 새어 나오는 통쾌함에 'Yes'를 외치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왠지 이삿짐이 더 잘 싸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반강제로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려 했다.
은영은 이사를 하고 겪은 일들을 소설로 쓰면 책 몇 권은 족히 나올 법하다고 생각했다. 본격 스펙터클 액션 서스펜스 스릴러 막장 치정 복수 판타지 휴먼 반전 드라마라는 이 경이로운 장르의 이야기를 은영은 작가가 되면 꼭 쓰겠다고 다짐했다. 은영의 인생에는 로맨스가 부족한데 그것만 쏙 빼고 모든 장르가 총망라된 것 같은 이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먼저 은영은 세상에 계획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우쳤다. 이사를 하면서 부모님 댁에 들어와 집 팔아 생긴 돈은 은행에 넣어두고 거기서 나오는 이자로 용돈을 쓰며 부모님 곁에서 작가지망생 라이프를 이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과년한 딸이 집에서 글만 쓰고 있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는 아버지의 예상 밖의 완고한 고집에 부딪혔다. 어쩔 수 없이 같은 아파트 단지 내 전셋집을 찾아 이사해야 했다.
사실 은영의 진심은 '얼굴 자주 보고, 목소리도 귀에 새기고, 한 번이라도 더 꼭 안아 주자'라는 부모님과의 추억 남기기가 목적이었다. 일을 핑계로 집을 떠나 있는 동안 늙고 병든 것은 자신만이 아니었다. 부모님의 노쇠한 모습은 함께 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자각하게 했다. 그때마다 서글퍼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버지는 이미 여러 해 전 팔순을 넘겼고, 엄마도 곧 뒤따를 것이었다. 아버지는 은영의 미혼을 핑계로 한사코 팔순 잔치를 마다했었다. 엄마도 똑같은 전철을 밟아야 하니 장녀로서 은영은 불효라는 죄책감으로 마음이 무거웠다. 결국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엄마를 모시고 살 사람은 은영이었다. 그래서 가시기 전에 추억도 쌓고, 마음의 준비도 할 겸 살림을 합치기로 결심했었다.
20년 가까이 따로 살았으니 안 맞는 부분이 많을 것이었다. 최근 유튜브에 푹 빠져 극우 유튜버들의 개인방송을 구독, 알림 설정까지 해서 보시는 아버지를 은영은 '남은 시간 하고 싶은 것 실컷 하다가 가세요'라는 생각으로 말리지 않았다. 청력이 많이 나빠지셔서 집에 들어서면 사이비 교주 같은 유튜버들의 자극적인 거짓 선동 발언들이 온 집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은영은 더 이상 젊지 않을 시간과 마주하면서 인생은 저마다 각자의 몫이 있다는 것을 잘 알게 되었다. 간섭은 입으로만 하는 소모적인 낭만주의라는 점 또한 그랬다. 그래서 이사에 대한 아버지의 고집도 억지로 꺾지 않았다. 덕분에 결혼하라는 말도 더 이상 나오지 않게 됐지만, 엄마는 한 번씩 "우리 딸 믿고 있다"라고 넋두리처럼 말했다. 하지만 가볍게 뱉은 말치고는 은영을 압박할 정도로 충분한 무게감은 있었다.
여름 장마와 태풍을 피해 이사하려고 은영은 부단히 애썼다. 하지만 하늘은 무심하고 노력은 물거품인 것이 정석인지, 이사는 집중호우 속에서 어렵게 진행되고 있었다. 우선 사다리차부터 문제였다. 이사 전날 주차장 차량이동 안내가 무색하게 입주민 대부분이 폭우로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사다리차를 세워야 할 장소에 연락이 닿지 않는 주차 차량이 많았다.
은영은 관리사무소에 일을 어떻게 하는 거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짐을 풀기도 전에 안 좋은 첫인상을 풀어놓기 싫어서 해결책을 찾는데 집중했다. 힘만 빼는 책임추궁 대신 문제를 풀어가려는 모습에서 팀장 때 은영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은영은 폭우 속에서 이삿짐센터 직원과 주변을 돌아다니며 사다리차를 펼칠 다른 곳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결국 작업을 시작하기로 했던 9시를 훌쩍 넘겨, 빗방울이 좀 잦아진 11시가 되어서야 슬슬 주차장이 비어가면서 겨우 사다리차를 전개할 수 있었다. 부동산에서 집주인과 11시에 만나기로 했던 약속을 어긴 것을 시작으로 잘못 채워진 첫 단추는 뒤로 예정된 일들을 연이어 뒤죽박죽으로 만들었다.
가장 큰 문제는 인터넷과 가전 이전설치였다. 서비스 기사들이 도착했을 때도 짐이 올라오는 중이었기 때문에 어수선한 집안에서 기사들은 요리조리 눈치껏 피해 가며 각자의 일을 처리해야 했다. 원래는 오전에 이사를 마무리하고 오후에 각 시간대별로 불러 작업을 진행할 계획이었는데 모두 어그러졌다. 결국 각종 전선들이 마무리 안된 채 바닥에 너저분하게 널려있게 되었다. 전부 은영이 나중에 따로 정리해야 할 일들이었다.
특히 은영을 힘들게 한 것이 에어컨이었다. 처음부터 콜센터에서 기본요금 15만 원에 추가 요금이 발생할 수 있다는 안내를 받긴 했지만, 설치 기사는 오자마자 거치대 추가설치, 냉매가스 주입, 배관 연장 등 이것저것 추가항목을 설명하더니 최대 50만 원까지 나올 수 있다고 설명했다.
비싸다고 물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은영은 최소 비용으로 설치될 수 있게 해달라고 사정을 했다. 기사도 한번 그렇게 해보마 하고 시작했지만, 작업을 마치고는 여러 가지 추가 서비스가 무료로 제공됐음을 강조하며 결국 50만 원을 받아갔다. 나중에 짐 정리가 어느 정도 되고 은영은 엄마에게 물었다.
"아까 에어컨 설치기사가 실외기 거치대 추가설치 하면서 엄마한테 보여주고 허락받았다던데... 그게 꼭 필요했어요? 지금 설치된 거 보니까 원래 있던 거랑 별차이 없어 보이는데..."
"어머, 얘! 무슨 소리니? 난 기사하고 말 한마디 안 섞었어..."
은영은 A/S 센터에 담당기사가 사기를 쳤다고 당장 전화로 따져 물어 환불과 사과를 받고 싶었지만, 그럴 힘도, 정신력도 남아있지 않았다. 무엇보다 나중에 같은 기사가 A/S 하러 온다는 말에 너무 강하게 나가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엄마의 기억력에 대한 믿음도 부족했다. '그래 이거 먹고 떨어져라'라고 생각하며 또 한 번 그냥 넘겼다. 아니 넘길 수밖에 없었다.
에어컨은 우리 집 것뿐만 아니라 남의 집 것도 은영을 힘들게 했다. 마침 앞 집도 그날 에어컨을 설치하기로 했었는지, 이사가 정신없이 진행되는데 앞 집 에어컨 설치기사들이 공용복도를 본인들 작업공간으로 전용해 버렸다. 은영의 집에서는 이삿날에 현관문도 제대로 열 수 없었다. 가뜩이나 사다리차도 못써서 엘리베이터로 겨우겨우 나르고 있는데 복도를 떡하니 막고 있으니 인부들 불편이 말이 아니었다. 그렇게 밖의 폭우와 별개로 복도는 복도대로 대통합의 아비규환이 연출되고 있었다.
가전 브랜드가 은영네 집은 L社, 앞 집은 S社였다. 각자 빨갛고, 파란 유니폼의 사람들과 포장박스들이 한 데 뒤섞여 마치 올림픽 개막공연을 방불케 했다. 은영은 앞집에 찾아가 항의라도 하고 싶었지만 이건 누구를 탓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앞집의 에어컨 설치를 못하게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이사를 연기할 수도 없고 도대체 해결책이 없었다. '그래… 이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야… 단지 타이밍이 안 좋았을 뿐이야'라며 불운은 탓하고 이 대환장의 파티도 어떻게 어떻게 넘겼다.
은영은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폭우를 뚫고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사 왔다. 그리고 인부들에게 대접하며 미소와 함께 립서비스를 날렸다.
"아! 사장님 너무 고생 많으세요. 여기 시원한 커피 좀 드시고 하세요."
"와~ 사장님! 이거 진짜~ 비도 너무 많이 오고, 덥기도 무진장 덥고, 동선도 힘들고... 이렇게 힘들게 이사해 본 건 처음이네요. 진짜~"
"그렇죠? 아휴~ 보고만 있어도 이렇게 막막한데 직접 하시는 분들은 어떻겠어요... 그래도 이렇게 믿을 수 있고 성실한 좋은 사장님 만난 거 보면 제가 인복은 있는 것 같아요. 호호호"
은영의 주목적은 작업자들이 대충 끝내고 도망가려는 마음을 먹지 않게, 지쳐서 나가떨어지지 않고 잘 마무리시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힘든 것에 대한 보상심리로 추가비용을 요청하기 전에 입막음을 하려는 접대 멘트이기도 했다.
오후가 되면서 다행히 비가 그쳤다. 그 사이 인부들 중 좀 높아 보이는 팀장이라는 사람이 따로 점심값을 요구해 왔다. 은영은 김밥과 음료수를 사다 주는 선에서 합의했다. 사실 본사에 항의 클레임을 넣을 수도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래... 좋은 게 좋은 거지... 진짜 힘들기도 했잖아... 그래 일 해 주는 사람들에게 이 정도는 해줘야지... 팁이라고 생각하자'라며 다시 한번 넘겨야 했다. 이건 자기 합리화인가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현재 은영의 상태로는 적당한 타협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넘기고 미뤄버린, 쌓인 감정들의 해소법
오전이면 끝나리라던 이사는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겨우 끝났다. 그 사이 거짓말같이 비는 그쳤지만 푹푹 찌는 더위가 남아 사람들을 괴롭혔다. 은영은 포장이사라고 해서 TV광고처럼 진행사항 정도만 체크하고 가구 배치나 집기 정리 위치 따위만 결정하면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광고 속 모델의 도자기 같은 피부처럼 그런 이사는 말도 안 되는 꿈같은 얘기였다.
이삿짐 정리해 주시는 이모님이 그릇 정리할 위치를 물어왔을 땐, 대충 얼른 마무리해서 다 내보내고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은영이 가구 사이즈 하나하나까지 측정해서 그린 평면배치도는 커다란 발자국이 찍힌 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휴지 쪼가리로 전락해 있었다. 마감이 덜 되어 널브러져 있는 전선과 그저 있을 만한 곳이다 싶은 곳에 대충 놓인 집기와 가구는 마치 은영의 현재 속을 꺼내 놓은 것처럼 이사 전 보다 훨씬 더 어지럽게 널려있었다.
겨우 인부와 설치기사를 다 돌려보내고 난 뒤, 은영은 뒷정리를 위해 엄마와 둘이 남아있었다. '아 도저히 당 떨어져서 안 되겠다. 뭐라도 먹고 해야지... 그래도 이삿날은 역시 짜장면이지?'라며 중국집에 짜장면과 탕수육을 배달시켰다. 은영은 지금 힘든 것에 비해 자기가 한 일이라고는 미루고 넘기는 게 전부였다는 사실이 매우 못마땅했지만 지금은 우선 배부터 채워야 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