윗 집 빌런! 아랫집 상전! 앞 집 꼴통! (프롤로그)
집이 팔렸다.
봄과 여름사이, 풍경에 초록이 짙어질수록 야생의 생명력도 짙어지는 계절이다. 근처 소나무 숲 공원에서 날아오는 비둘기는 아침마다 에어컨 실외기에 배설물 테러를 저지르기도 하고, 거기서 무슨 짓을 하는지 '구구' 야한 울음소리를 내기도 한다. 은영에게는 방충망을 열어젖히며 비둘기를 쫓는 일이 매일 아침 첫 일과였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 테러도 없고,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웬일이지?' 속으로 갸우뚱하면서도 모처럼 찾아온 평온을 만끽하기로 하고 침대에서 뒹굴 거리고 있었다. 잠시 후, 까치라기엔 좀 작은 까만 새가 비둘기 대신 베란다에 앉아 집안을 두리번거리는가 싶더니, 이내 다른 곳을 향해 날아올랐다. 낯선 새의 첫 방문으로 은영은 은근히 새 바람이 불 것 같은 기대감으로 얼굴에 빙그레 미소가 지어졌다.
은영은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크게 켜고, 이불을 걷어차며 일어났다. 그래도 몸매 관리는 해야겠기에 운동복을 입고 밖으로 나왔다. 뒹굴 거리느라 평소보다 늦었더니 공기가 많이 데워져 있었다. 상쾌함과는 영 거리가 멀었고, 약간의 답답함마저 느껴졌다. 은영은 그 핑계로 뛰지 않고 걷기로 결정했다. 썬 캡, 덧소매로 완전무장했더니 하찮은 용기가 생겨 팔을 힘차게 흔들며 주위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몸통 앞뒤로 박수까지 치며 걸었다. 그때 낯선 번호로 전화가 왔다. 070이 아닌 010으로 시작되는 번호였다.
"여보세요?"
"네! 사장님 안녕하세요. 여기 호박부동산이에요. 혹시 집 파셨어요?"
"아! 안녕하세요. 아니요 아직 안 팔렸어요."
"그럼 혹시, 전세 놓을 생각은 없으세요?"
은영이 회사생활을 끝낸 지 일 년이 지났다. 이곳에서의 내-일이 없어진 지 오래고, 양도소득세 면제를 위한 실거주의무도 올해 초에 끝났다. 엄마에게 생존신고를 핑계로 전화할 때마다 은영은 잔소리를 들었다.
"언제까지 그 촌구석에 있을래? 돌아올 생각이 없는 거지?"
"집이 팔려야 가죠."
은영도 그때마다 영혼 없는 대답으로 차일피일 은근히 이사를 미루고 있었다.
은영은 사실 올해 초 부동산에 집을 내놨었지만, 그동안 감감무소식이었다. 부동산 시장 침체 덕분에 조금은 마음 편하게 혼자서 작가지망생 라이프를 즐기고 있었는데, 갑자기 전세 제안이 들어왔다. 은영의 머리는 빠르게 회전했다. ‘음... 전세니까 2년 뒤면 또 내놔야 할 거고... 그러면 여기 다시 와야 되잖아? 에이... 이사까지 가는 수고를 해야 하는데...’ 거절하는 게 낫겠다는 결론이었다.
지금 라이프스타일을 조금 더 연장하고 싶은 마음도 한몫했다. 은영은 전화를 끊고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상쾌한 기분으로 다시 생각했다. ‘그래 감감무소식보다 전세제안이라도 들어온 게 어디야.’ 오늘 아침 이름 모를 작은 새가 진짜 새 소식을 물어다 준 것 같아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은영은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아침을 먹고, 책을 읽다가 그대로 살짝 졸고 있었다. 그런데 창밖에 또 새가 나타났다. 아침과는 다른 종(種)이었다. 이번에는 지저귀기까지 했다. 울음소리는 마치 일어나서 손님 맞을 준비하라는 듯이 들렸다. ‘음... 이게 무슨 일이래?’ 은영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오랜만에 로봇청소기까지 동원했다.
진공청소기는 침대나 소파 밑을 청소하는데 불편하고 한계가 있었다. 그런데 로봇 청소기는 가구 밑으로 들어가서 청소를 하기 때문에 손님이 오는 날이면 은영은 항상 로봇청소기를 꺼냈다. 그렇게 바닥은 로봇청소기에게 맡기고, 식기세척기에서 그릇들을 꺼내 정리하고, 빨래를 개어 넣고, 화장실 청소까지 했다. 오랜만에 대청소로 기분이 더 좋아졌다. 잠시 후, 부동산 번호로 또 벨이 울렸다.
이번에는 집을 보러 오겠다는 사람이 있는데, 조금 싸게 팔 수 없냐고 물어왔다. 사실 부동산이 마음대로 의뢰가보다 천만 원 낮게 인터넷에 올리는 바람에 이미 의지와 상관없이 싸게 내놓은 상태였다. 은영은 엎질러진 물 같아서 탓하지 않고 넘어갔는데, 염치없게 '더 싸게'를 외치고 있는 부동산을 보니 괘씸해졌다. 안된다고 거절하고 전화를 끊었지만 기분은 좋지 않았다. 조금 있다가 다시 부동산에서 전화가 왔다. 바로 30분 후에 집을 보러 오겠단다...
뭔가 급박한 감이 없지 않았지만, 은영은 이미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새, 그 녀석 참 용하네...'라고 생각하며 알았다고 대답했다. 세수를 마치고 양치질을 하고 마스크를 끼고 방문객을 기다렸다. 잠시 후 초인종이 울리고, 중개인과 함께 젊은 여자와 엄마로 보이는 중년 여성이 방문했다.
집을 이리저리 살피고 있는데, 젊은 여자... 음... 맨발이다. ‘남의 집에 오면서 매너 없게...’ 은영은 애써 외면하고 편하게 둘러보시라는 말을 남기고 교양 있게 책을 펼쳤다. 처음부터 정년퇴직까지 10년 이상 살 계획으로 공포의 시댁 인테리어라고 불리는 체리몰딩 실내를 요즘 트렌드인 '우드 앤 화이트'로 꾸민 집이었다. 그런 집을 2년 만에 팔게 됐으니 누가 와도 은영은 자신 있었다.
방문객들은 여기저기 둘러보고, 열어보고, 틀어보더니 잠시 후 잘 봤다면서 집을 나섰다. 집값 깎인 것도 기분 나쁜데 맨발로 와서 여기저기 발자국까지 찍고 가니 은영은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이러려고 오전이 그렇게 기분 좋게 흘러갔나 보네...’라고 생각하며 억지로 좋게 넘겼다. 걸레를 빨아 방바닥을 한번 싹 닦고 나니 부동산에서 전화가 왔다. 100만 원만 깎아달라고...
은영은 근래 엄마에게 생존신고를 잘 안 했다. 전화를 받을 때마다 '여보세요?'대신 '집 팔렸다고?'가 인사였기 때문이다. 엄마의 잔소리도 듣기 싫었고, 집은 임자가 나섰을 때 팔아야 한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어온지라 괘씸하기는 했지만 그러자고 했다. 곧바로 계약서 작성이 시작됐다. 부동산 사무실에 들어서니 조금 전의 젊은 여자와 친정엄마, 그리고 시어머니로 소개된 중년 여성이 한 명 더 있었다.
작성된 계약서를 보니 매수인은 공동명의로 신혼집을 구하는 중이었다. 나이가... 헉! 신랑은 은영이 대학에 입학하던 해에 태어났고, 신부는 한 살 아래였다. 완전 아기들이 집을 사러 왔다는 생각에 갑자기 강아지 안아주는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곧바로 계약서에 쓴 자신의 주민번호가 생각나며 은영은 괜한 자격지심에 갑자기 중개사까지 총 네 명 앞에서 면접을 보는 듯한 기분이 되었다. '그 나이 먹도록 뭐 하다가 여자가 혼자 살고 있냐...'는 따가운 눈초리를 은영은 분명히 느꼈다.
계약을 마치고 잠시 후 부동산에서 또 전화가 왔다. 평소 환불도 잘 못하는 성격의 은영이었지만 '혹시 계약 해지하자는 말이 나오면 계약금은 절대 못 돌려준다고 해야지'라고 굳게 마음을 다잡고 전화를 받았다. 일상적인 작은 일에는 소심하지만 큰 계약이나 거래에서는 의외로 대범함을 보이는 은영이었다.
"아! 사장님! 호박부동산이에요..."
"네, 그런데 무슨 일로..."
"다른 게 아니라, 매수인 쪽에서 신랑이 꼭 같이 집을 보고 싶다고 해서요. 저는 저녁에 모임이 있어서 같이 못 가고, 친정엄마, 시어머니, 신랑, 신부... 이렇게 4명이 한번 더 집을 보러 가고 싶다고 하는데 괜찮으시겠어요?"
따지고 보면 전혀 모르는 사이인데 여자 혼자 사는 집에 중개사도 없이 오겠다니... 그것도 남자를 대동해서… 은영은 갑자기 머리가 복잡해졌다.
"아... 그게... 저..."
"아휴... 죄송해요... 저도 같이 가면 참 좋겠는데... 모임 약속이 있어서... 친정엄마, 시어머니도 같이 간다고 해서 저도 사장님께 여쭤보고 연락드린다고 했어요... 호호호"
은영은 젊으니까 신혼 때 같이 집 보러 다니는 낭만도 느껴보고 싶겠다는 생각에 조금 이해해 주자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양가 어머님들이 동행하는 조건으로 허락했다.
"아휴... 사장님 감사해요. 그럼 신랑이 퇴근하고 바로 가면 여섯 시 반에서 일곱 시 사이 정도 될 거래요. 가기 전에 연락드리라고 할게요. 이해해 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사장님~!"
중개사의 목소리 톤이 한층 더 올라가며 간드러졌다. 하지만 이미 계약은 성립됐고 중개수수료도 받았겠다 한 번 더 보러 가든지 말든지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뉘앙스가 강하게 배어있었다.
전화를 끊자 은영은 기분이 묘해졌다. 처음에는 팔려서 마냥 좋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섭섭한 마음이 커졌다. 그리고 이내 가슴이 답답해졌다. '잘한 거 맞나?'라는 의문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뭔가 더 잘할 수 있었을 것 같은 아쉬움도 같이 들었다. 그리고 이내 아까워졌다.
행복하게 살려고 꾸며놓은 아방궁을 빼앗긴 기분이었다. '정이 들어서 그런가?'라고 생각해 봤지만 결이 달랐다. ‘사기당한 기분? 아니야 그것도 아니야... 아깝고 약 오른다는 게 가장 비슷하긴 한데...’. 은영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이 묘한 마음은 뭘까 계속 궁금했다.
약속 시간이 되자 초인종이 울렸다. 은영이 문을 열자 팔짱을 낀 신랑, 신부와 양가 어머님이 나타났다. 신랑은 앳되어 보였지만 키도 크고 잘생긴 얼굴이었다. 하지만 늦은 시간에 찾아와서 죄송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네 가족은 이미 자기 집인 양 당당하게 들어와 여기저기를 둘러보며 청사진을 그렸다. 은영은 내 집인 듯 내 집 아닌 내 집 같은 공간에서 어이없다는 듯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신부의 눈빛이 이상함을 느꼈다. 마치 일부러 은영에게 보란 듯이 신랑에게 더 밀착하며 자랑하듯 아래로 깔아보는 눈빛이었다. '설마 묘한 기분의 정체가 이거였나? 에이~ 아니야 내가 또 괜한 자격지심에 잘못 느낀 걸 거야' 은영은 부러 외면하며 신경을 껐다.
잠시 뒤, 이번에는 양가 어머님들이 문제였다. 처음에는 도배도, 장판도 깨끗해서 집에 손볼 게 하나도 없다며 서로 좋아하다가, 집안의 가구들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주고 갈 수 없냐고 은영에게 묻기 시작했다. 은영은 황당하다 못해 정신이 아득해짐을 느꼈지만, 코베이지 않으려면 정신 똑바로 차려야겠다 생각하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가구를 시작으로 두 중년여성의 요구는 블라인드, 가전 등 신혼살림이라도 장만하려는 듯 시장 물건값 흥정 수준이 되어 가고 있었다. 은영은 자칫하면 계약금을 물어주고 계약을 파기하자고 할 뻔했다. 계약금은 절대 못 돌려준다고 말해야지 다짐했던 상황이 코미디 같이 느껴졌다. 빨리 이들을 내보내고 싶었다. 다시 자신의 아방궁으로 되돌리고 싶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결국 은영은 빌트인 인덕션 레인지를 주고 가기로 했다. 아니 뺏겼다. 네 가족은 '하하 호호' 자기들만 행복한 웃음을 남기고 떠났다.
그리고 반강제로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려 했다.
몇 주 후, 한창 이사 준비 중인 은영에게 부동산에서 전화가 왔다. 계약서 서류 준비는 다 했는지 물었다. 특히 인감증명서를 발급받았는지 물었다. 아직이라고 대답하자, 매수인 쪽 친정에서 자기들이 돈을 더 많이 부담하니 공동명의가 아닌 신부명의로 집을 사겠다고 했다면서 계약서는 나중에 잔금 치르면서 수정해도 되니, 매도용 인감증명서를 발급할 때 여자 쪽으로 떼어오라고 했다. 은영은 별생각 없이 알겠다고 했다.
다시 며칠 후 전화가 와서 또 인감증명서 발급을 묻더니, 시가 쪽 반대가 심해서 원래대로 공동명의로 하기로 했다며 인감증명서를 기존대로 발급받아달라며 귀찮게 해서 죄송하다고 했다. 은영은 한 번 더 별생각 없이 알았다고 했지만 그 뒤로 세 번의 똑같은 전화가 걸려왔다.
결국 잔금 치르는 전날까지 인감증명서 발급은 연기됐다. 은영은 의기양양하게 자신을 아래로 깔아보던 신부의 표정이 생각났다. 은영은 웃음이 피식 새어 나오는 통쾌함에 'Yes'를 외치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왠지 이삿짐이 더 잘 싸지는 것 같았다.
(계속)